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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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8장 4. 일본개신교의 시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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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4-09-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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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우치무라 간조는 단순히 천황제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사상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평화주의와 무교회주의였다. 그의 불경 사건은 우치무라 간조라는 한 개인 뿐 아니라 이런 생각을 지닌 무리들이 일본 개신교 안에 많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당시 일본이 벌이고 있다는 전쟁‐러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절대평화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서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길 “성서에서는 인간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전쟁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밀하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을 했다.

 또 우치무라 간조의 독특한 점은 그가 무교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무교회주의자란 교회 자체를 무시한다거나 교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아니다. 무교회주의자의 특징을 꼽자면 그들은 어떤 제도나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한다. 교회라고 하면 보통 건물을 생각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고 교회이지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따라서 무교회주의에서는 제도나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한다. 우치무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사랑에 의해 결속하고 영적인 교제를 하는 단체이어야지 안이한 제도 교회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무교회주의적 측면도 일본에서 그리스도교가 정착하지 못했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위 각자는 교회의 성례전‐ 전례나 의식‐을 부정적으로 보고 성례전을 행하는 것보다 성서 연구가 더 좋은 방법이기에 성서 연구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무교회주의자들은 전례보다는 성서 쪽에, 건물보다는 존재 자체를 교회로 보는 시각이 두드러졌다.

우치무라 간조는 성직도 부정했다. 교회 건물뿐 아니라 성례전이나 성직도 다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가 구성되려면 집이 필요하고 물론 이것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되지만 그 필요성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이 외에도 우치무라 간조는 소수의 구원론을 주장하는 데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역사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은 결국 소수구원론에서 야기된 것으로 본다. 신의 사랑이 무한하고 보편적이라고 볼 때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은 소수구원론이 아니라 만인구원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치무라는 만인구원론과 더불어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사실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그 외 김교신, 유영모 같이 개신교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분들은 모두 무교회주의자이다. 유영모 사상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분들은 모두 우치무라의 집회에도 참석했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가 일본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일본 개신교 전체를 무교회주의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무교회주의는 일본 토착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일본으로 건너와 무교회주의이면서 무교파주의가 되었지만 무교회주의가 일본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신학은 서양신학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있고 일본화한 것도 있고 둘을 혼합한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통 복음주의 신학이다. 대표적 신학자로 우에무라 마사히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 기독신학의 중추적 신학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을 살펴보려면 먼저 자유신학자인 가나모리라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자유신학과 정통신학은 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유신학은 말 그대로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 신학이다. 예를 들면, 성경 전체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태도를 갖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태도를 갖는다. 성경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통신학이다. 그러나 자유신학은 상대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이라든가 ‘유일하신 분’같이 절대우위성을 부과하는 표현들에 대해, 자유신학자들은 비교우위성을 말한다. 다른 것보다 비교적 우위에 있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리스도론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정통신학과 다른 표현을 쓴다. ‘예수는 비범한 종교인이지만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순 없다.’고 하며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통신학에서는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예수는 인간이면서 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전통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성만을 인정하되 보통 인간은 아니라고만 한다. 즉 정통적 기독론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했다는 속죄론도 다르게 해석 했다.

가나모리는 자유신학을 추구했다. 자유신학은 메이지 중기 1880년 전후에 일본에 들어왔는데 가나모리는 정통신학을 하다가 1892년에 정통신학에서 탈퇴한다. 일본에는 개신교 교파가 없고 정통 조합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가나모리는 그로부터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학이 정통조합 교회의 정통적인 사상과 다른 입장이라는 점 때문에 탈퇴를 선언하고 나가자 조합 교회는 1892년에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가나모리 같은 자유 신학자들이 확산될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이것이라는 신앙고백문 곧 예수그리스도론과 속죄론을 아우르는 신앙고백문을 발표하고 이는 일본 기독교의 공식입장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우에무라는 가나모리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실 가나모리가 정통 기독교를 비판한 것에 대해 우에무라는 가나모리를 비판한 것이다. 가나모리의 정통 신학 비판을 우에무라가 다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가나모리는 우에무라의 비판에 대해 다시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의 논쟁거리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우에무라는 가나모리 사건 이후 정통신학의 신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것이 일본 신학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정통신학은 정통조합교회의 신학으로 자리매김 하면서 일본 기독교의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가장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정통신학은 천황제와 결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