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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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연구

신들의 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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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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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신비주의자의 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전수받은 인격주의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종교역사상 가장 독특한 형태로 인간을 종교적 삶의 중심에 놓았다.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게 하기 보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인격적 신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종교는 이런 인격적 신개념이 갖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사고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개념을 추구해왔다.


결국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인격적 범주를 초월해 불교의 열반이나 힌두교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 아트만과 유사한 비인격적 범주를 통해 신을 이해하기 위한 신비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유일신론은 역사적으로 신비주의 신앙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는 예언자의 체험과 붓다같은 명상가의 체험의 차이에서 잘 파악된다. 유일신종교는 신의 뜻이 하늘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확신에 근거한 적극적 경건신앙에서 출발했다. 이는 인간과 신의 대면적 접촉을 강조하며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하나의 정언적 명령으로 신을 이해한다. 신비주의신앙은 이성적 신앙보다 신의 현존의식을 끊임없이 고취시켜 一者에 도달하는 길을 제공한다.


1.유대교신비주의


2, 3세기 초기유대신비주의는 신과 인간과의 괴리감을 강조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박해당하고 소외받는 현실에서 참 정의가 실현되는 신적 영역에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 일곱하늘나라를 통과하는 모험적 여행을 거쳐 도달할수 있는 전능의 왕이라 믿었으며 기존의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장대한 웅변술을 강조하는 독자적 수도했위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대교 랍비들과 적대관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보좌신비주의라 불린 그들은 12, 13세기 사이의 새로운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에 귀속될 때까지 유대 랍비전통과 함께 중요한 종교적 요소를 채워주었다.


그러나 랍비들도 깊은 종교체험을 했는데 랍비 요하난은 에스겔이 신의 전차를 본 신비적 환상에 관해 논의할 때 하늘로부터 내로온 불길같은 성령을 체험했다. 에스겔이 본 전차와 보좌 위에 앉아있던 신비적 존재에 대한 환상을 초기 유대신비주의 주제가 되었다. 397


유대신비주의자들은 일곱하늘이라는 신화론적 영역을 거쳐 신의 보좌를 향한 여행에 몰입했다.


초기유대신비주의자의 환상 중 가장 특이하고 논쟁적인 것은 쉬우르코마(최고존재자의 측정)에서 볼 수 있다. 이는 5세기경의 문서로 에스겔이 본 보좌위의 신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신에 대한 신비적 묘사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소개해 주었다. 첫째는 상상을 통한 것이고 둘째는 형언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모습은 신의 이미지이지만 신비주의자는 그것을 그들의 상승초후의 단계에서 보좌에 앉아있는 것을 본 것이다. 402


초기 유대신비주의문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5세기경의 세페르예지라(창조의 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세상창조과정을 신이 직접 묘사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대신비주의자는 자신이 쓰는 언어를 점차 극단적 형태로 변형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창조 이야기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언어를 인간의 사고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어 그것을 초월하는 탈언어적 의미를 도출함으로써 인간에 대해 신이 갖고 있는 타자성을 지적하려는 것이 유대인 보좌신비주의자들의 의도였다. 403


입신의 신비체험이 문화적 정황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분명한 인간삶의 한 요소다. 407


<기독교>


동방기독교회에서 신 체험은 암흑보다 빛으로 이해되었다. 동방기독교인은 신의 본질과 세계 속에 드러난 신의 역동성 또는 행위를 구분해 역설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인간은 그자체로서의 신을 알수 없으나 기도를 통해 신의 역동성르 체험할수 있다. 신의역동성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햇살같이 빛 자체는 아니지만 빛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세계를 밝혀주는 빛의 광선과 같다. 409 동방교회 신비주의자는 불교승려처럼 점차 이성적 상념이 잦아들고 미혹적 표상이 사라지며 기도 자체와 하나됨을 느꼈다.


성상(이콘)은 동방기독교인의 신비체험의 핵심이었으나 8세기까지 동방기독교회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교리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때문이었다. 즉 예술가가 단지 예수의 인성만을 그릴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 확연학 분리된다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상파괴주의자들의 주장은 성육신이후 인간의 육체는 영적 요소를 부여받았으므로 신격화된 인간모습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413


<이슬람신비주의>


8세기 9세기의 무의타질라파나 쉬아파처럼 아랍 귀족층의 사치생활을 비판하고 초기이슬람 공동체의 근검생활의 부활을 강조한 금욕주의 이슬람 신앙이 태동하였다. 그들은 메디나의 초기 무슬림의 검소한 생활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했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즐겨 입었다는 거친 모직옷을 입었다. 그결과 그들은 수피라고 불리게 되었다.416


수피는 무슬림법의 기본적  요구들에 금식 철야 만트라로서 신성한 이름의 낭송이라는 실천을 추가하였다. 이들의 수도방법은 때로 괴상하고 유별난 행위를 초래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술취한 수피들이라 불렀다. 이러한 수피의 최초인물이 비스타미였다. 그는 인간이 자아소멸을 통해 신비적으로 몰입되는 탈자아상태를 추구했다. 즉 수피의 가장 핵심적 이상은 자아소멸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는 자아소멸다음에는 자아로의 회귀가 이어져야 하며 신과의 연합이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시킨다고 가르쳤다. 419


알 할라지(양모짜는 사람으로 알려짐)은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무아적 신비체험시 “내가 진리다”라고 외친 것 때문에 유명해졌다. 이슬람에서 인간이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내가 진리다 라고 외친 알할라지의 주장은 신비주의자들의 신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주관적 실재임을 보여준다. 뒤에 알 가잘리는 그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오해할수 있는 비의적 진리를 표현하는데 현명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샤하다의 구절처럼 알라외에 참된 실재란 없으므로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적 실재에 귀결되고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즉 무슬림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신적 속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수피는 오직 예수 한 사람만이 성육신을 통해 신적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신과 하나되는 신비적 체험을 통해 인간내면에 담겨있는 신적 속성을 재발견함으로써 태초의 본원적 인간으로 돌아갈수 있다고 믿는다.  423


11세기에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은 신에 관한 객관적 설명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해 신비주의로 기울었다. 특히 알가잘리는 수피즘이 진정한이슬람 영성을 구현한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일반무슬림이 받아들일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흐라외르디>


그는 조명의 대가라고 불렸다. 그는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빛을 통해 신을 경험했다. 그는 전 세계의 모든 종교적 통찰을 결집해 하나의 영적 종교를 완성하려 했다. 그의 철학은 이슬람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 우주론과 프롤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 신플라톤주의 유출체계를 결합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견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영혼의 치유자인 이맘에 대한 환상을 보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고통을 겪던 불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내게 네 자신 스스로를 일깨우라. 그리하면 네 문제가 해결되리라.”


 그는 고대 페르시아의 원형적 세계의 신앙에 의존했다. 그것에 따르면 현실세계의 모든 사람이나 대상물은 그것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을 천상세계에 갖고 있다. 즉 그는 신비주의자의 환상이나 천국 지옥같은 성서의 상징들이 현실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처럼 실제로 존재하는데 다만 그 존재양태가 다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으나 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인식케 하는 고도의 상상력에 의해 식별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에 접근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상상력을 통해 신존재에 관한 상징을 해석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븐 알 -아라비>


그는 카으바 순례중 환상을 보았는데 이것이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하늘의 성광에 둘러싸인 니잠이라는 소녀를 보고 그녀가 신적지혜가 인간의모습으로 현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 현현을 통해 철학의 합리적 논의에만 의존하면 신을 사랑할수 없음을 인식했다. 그는 신비주의자란 니잠같은 소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스스로 신의 현현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431


그는 상상력을 신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라고 믿었다. 신비주의자가 원형적 세계에 존재하는 절대적 실재를 현실세계로 끌어당겨 스스로 신적 현현을 창조하는 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상상력의 결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신의 접근불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을 구름 또는 맹목적이라는 뜻의 알아마라고 부르기 좋아했다. 그는 신성과 인성은 온우주에 활력을 불어넣는 신적삶의 양대 필수요소로 본다. 이는 예수안에 신이 성육신해다는 기독교인의 이해와 유사하나 그는 아무리 거룩한 존재라 해도 예수에게만 무한한 신적 실재가 드러났다는 것은 인정할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인간개인이 독특한 성육신의 진리를 드러낼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개인이 독특한 신체험을 갖되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 있는 보편적 신체험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느 종교도 신에 관한 진리를 독점적으로 전유할수 없으므로 타인의 종교를 무조건 부정하고 자신의 종교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용납할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가르침이었다.437


12,13세기에 수피즘은 소수파위치를 벗어나 이슬람제국의 전체 영역을 주도하는 신앙형태가 되었다. 그때부터 수피즘 내에 제각기 독자적인 해석을 내세우는 교단들이 나타났다. 수피의 교주는 일반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지녀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이슬람 제국이 정치적 격번기엿 바그다드의 칼리프제도가 와해되고 몽고족의 침략에 의해 이슬람 도시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슬림은 파일라수프(철학자)의 소원한 신이나 성직자들의 법률적 신보다 더 직접적이고 동정적 신을 원했다.


따라서 수피의 실천 즉 무아적 신체험을 유도하기 위해 만트라(주문 진언)로서 신성한 이름의 낭송이 종단을 넘어 일반 무슬림에 확산되었다. 이 영적 수련은 보통 사람에게 인격적 단일개념의 신이해보다 인간 자아의 내면에 임하는 신비적 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교단은 신비적 수도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사용했다. 439


수피교단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라위야였다. 이들은 춤추며 날뛰는 수행승이라 알려졌다. 그들의 무용은 정신집중을 위한 방법으로 그들은 무용에 빠져들어감에 따라 파나 (자아소멸)의 상태를 미리 맛본다. 이 교단의 창시자는 루미였다. 그의 시집 마스나위는 수피의 성서로 알려졌고 일반무슬림에게도 큰 호응을 받았으며 신비주의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방랑 수도사 샴스 아드딘을 만나 그에게 매료되었는데 아드딘은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환생이라 믿었고 그렇게 부를 것을 주장했다.


성난 무슬림이 그를 죽이자 루미는 슬픔을 이기고자 신비주의음악과 춤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슬픔을 인간을 향한 신의 열망과 알라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동시에 포용하는 신적 사랑의 상징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존재의 근원과 분리되어 있음을 깨달아 신과 합일을 추구해야 함을 뜻한다.

그는 모든 존재의 내면에 거하는 신비적 실재에 눈이 머는 원인이 자기중심적 사고에 있으며 자신이 분리된 존재임을 깨달으면 모든 존재의 근원과 재결합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고 가르쳤다.


443 당시 유럽의 유 대인에게 들이닥친 비극적 사건들은 그들이 새로운 신개념을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서구 십자군운동의 주요 스로건의 하나였던 반유대주의가 유대교 공동체를 무참히 파괴하자 유대인은 보좌 신비주의에 의한 세상사에 초연한 신보다 직접 현실속에서 체험할수 있는 인격체적 신을 갈망하게 되었다. 443


<마이스터 엑카르트>


그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뉘시우스와 마이모니데스의 영향을 받았다. 모미니크수도회의 탁발수도사였던 그는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철학교수였다. 그러나 1325년 그의 신비주의가르침이 그의 주교인 쾰른 대주교와의 다툼을 야기했고 대주교는 그가 신의 善性을 부정하고 신의 인간영혼태생설과 세계의 영원성과같은 이단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그는 신을 무라고 규정했다. 그는 신이 무이기 때문에 그와 하나되기위해 인간도 무의상태가 되어야 하는 매우 힘겨운 고통의 과정이다. 수피가 자아소멸을 주장한 것처럼 그가 이탈 또는 분리되어 있는 것의 과정을 강조했다. 460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


살로니키의 대주교인 그는 신의 본질은 인간이해를 초월하지만 인간이 체험하는 신의 동력은 신의 본질과 무관한 한탙 신적 후광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삶에서 신을 명상할 때 대체적 신의 실상이 아니라 신의 본질 자체를 깨닫는 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463


그는 신에 대한 환상을 하나의 상보적 무아체험으로 보고 인간이 스스로를 초월함으로써 신적 세계에 도달하지만 신 또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무아적 체험을 겪는다고 주장했다. 14세기 철학적 신학을 패퇴시키고 동방기독교회의 정통신학의 자리를 차지한 팔라마스의 신학사상은 유일신종교에 걸친 신비주의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464 기독교회는 14세기에 신비주의신앙을 본격 수용했으나 유대교나 이슬람과 달리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제8장 종교개혁자의 신


15 16세기는 서방 기독교가 동방 기독교 유대교이스람을 따라잡는데 성공한 시기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어 북유럽까지 퍼졌고 신세계 발견 및 과학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서구 기독교인의 신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인들은 중세형 신앙에 만족하지 못했고 개혁자들이 나타나 기존의 신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이로써 서구 기독교회는 양분되었다. 16세기는 서구 기독교인이 신숭배에만 전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무신론을 꿈꾸는 자들이 나타났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동방 기독교회는 러시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스페인내의 무슬림들은 페르티난트와 이사벨라가 스페인을 함락함으로써 추방당했다. 스페인 이슬람세력의 몰락은 유대인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사방 기독교국가 군주들이 스페인 거주 유대인에게 기독교로 개종치 않으면 스페인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유대인 15만명이 추방당해 터키 발칸반도 북아프리타로 흩어졌다.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후 가나안 땅을 떠나 오랜세월 유랑생활을 한 유대인에게 최고 거주지를 허용했던 스페인 이슬람세력의 몰락은 그들에게 큰 슬픔을 주었고 그 경험이 카발라 (신비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신개념 창출의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새 보수파>


이 시기에 이슬람교에는 새로운 보수주의가 등장해 과거의 이슬람 신앙을 회복하려 했다. 이러한 보수적 상황에서 신이해의 혁신을 기대함은 무리였다. 14세기 이스람신앙의 보수주의 경향은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인 야우지야에 의해 주도되었다. 타이미야는 샤리야(신성한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칼람(이슬람신학)과 팔사파(이슬람철학) 아쉬아리학파까지 비판했다.


야우지야는 타이미야의 꾸란 중심에 수피즘을 추가했고 꾸란의 문자적 해석을 주창하고 수피들의 제의를 단죄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의 정신과 유사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은 종교생활의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준 진보주의자로 보았다.


15, 16세기에 세 개의 새로운 이슬람 제국이 창건되었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을 자지한 오스만 투르크제국, 이란의 사파비왕조, 인도의 무갈제국이다. 사파비왕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유사한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세 제국의 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정신이 여전히 이슬람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류에 대해 서구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경향과 함께 사파비왕조의 이란에선 새로운 형태의 12이맘파가 국교가 되었고 이것은 쉬아파와 순니파의 전례없는 반목의 불씨를 지폈다. 그때까지만 해도 쉬아파는 그들보다 더 지적이고 신비주의적 순니파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양자는 서로 적대하는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란의 쉬아파>


이슬람 내분쟁은 사파비조의 창건자 샤 이스마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순니파신앙을 부정하고 자신을 그 시대의 이맘이라 주장하면서 전례없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사파비조의 모든 사람에게 쉬아파신앙을 택하도록 강요했다. 개혁된 쉬아파는 그들영토에서 순니파(수피의 신비주의종파)를 폐지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가 수도원을 해체시킨 것을 상기시킨다. 471


이란의 쉬아파는 수흐라와르디의 신비주의전통과 접목시킨 독자적 팔사파를 발전시켰다. 쉬아파의 팔사파 창시자 미르다마드는 신학자이며 과학자였다. 그는 신적 빛은 무함마드나 이맘같은 인물들의 견성으로 보았으며 수흐라와르디처럼 종교경험의 무의식적이고 심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란의 쉬아파는 신을 체험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순수과학이나 형이상학보다 신비주의를 꼽는다. 몰라 사드라는 ‘신을 본받음’을 철학의 목표이며 어떤 특정신앙원리나 신조에 국한될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범신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다만 신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고 인간의 경험적 실체를 통해 제한적 형태로 신적 빛이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이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통해 빛을 발산하는 태양의 통일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오직 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알수 있는 비객관적 실재이다. 그는 쉬아파 이맘뿐 아니라 순니파 수피 그리스 철학자 모두를 존중해서 이란의 쉬아파가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인도의 무슬림보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더 강조했던 무슬림은 없다.


<종교적 관용시대>


종교간 관용과 협력이 가장 발현된 때는 1560년-1605년까지 집권하면서 모든 신앙을 존중한 무갈제국의 3대 아크바르 통치시기였다. 그는 유일한 신이 올바른 모든 종교속에 자신을 계신한다는 신성한 유일신론 고백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수피교단을 만들고 수피즘 원리를 문명발달사 해석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아크바르는 신에게의 헌신이라는 본래의미로서의 이슬람은 어떤 종교에 의해서도 달성될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관대한 종교정책은 무갈제국의 전성기에만 유지될 수 있었으며 그후 종교분쟁이 일어났다. 이는 신앙의 통일성이 이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본 아우렝제베황제의 이슬람 유일주의 정책에 의해 야기되었다.


아크바르 당시 그에게 강력히 도전한 사람은 시르힌디(1563-1625)이다. 그는 신비주의체험을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신비주의자들이 신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의식이 공허해져 결국 아무런 객관적 실체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유한한 인간이 신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신과 세계 사이의 어떤 일치성을 말한다는 것은 카다란 오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유대신비주의>


이베리아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로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던 세파르딤이 새로운 카발라(유대신비주의)를 발전시켰다. 즉 그들은 갈릴리의 사페드에 정착해 고향상실이라는 경험속에서 심오한 의미를 밝혀낸 신비주의 신앙전통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랑생활이 모든 존재의 근원에서의 이탈을 상징한다고 보았으며 신마저 자신으로부터 이탈했기에 모든 창조물이 더 이상 적절한 처소를 가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479


1. 이삭루리아


그는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악의 문제에 고심했다. 그는 신이 자신의 내면으로 하강해 스스로에게 하나의 유한적 실체를 부과한다는 그의 생각은 신이 자기 계시의 행위에서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케노시스와 유사하다.


루리아의 창조설 482-483


루리아는 신의 인간구원사역에 기도나 선행같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점이 유대인이 절망적 상황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보다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질수 있었던 원인이다.


<14, 15세기 기독교 >


1453년 콘스탈티노플의 함락 1334-1342년까지교황의 아비뇽유수 1378-1417년까지의 대분열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인간 삶의 근본적 무기력함과 교회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은 신의 도움 없이 인간 삶의 고통스런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기 시작했다.


  이런 신앙적 침울성은 예수부활의 측면을 도외시하고 오직 예수의 인간적 연약함과 고통만을 강조했다. 14, 15세기의 기독교인은 그들 신앙생황의 중심에 예수 뿐 아니라 성모님 다른 성자들을 섬기는 의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유물에 대한 열광적 수집이나 성지방문행위는 그들이 진정 섬겨야 할 유일한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의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신중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마르틴 루터>


기독교는 사탄을 절대부정했는데 이는 다른 종교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꾸란은 사탄이 최후의 심판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마르틴 루터도 기독교 신앙을 사탄과의 싸움으로 보고 마녀 사냥의 정당성을 확신한 사람이었다. 비록 종교개혁자가 새로운 신개념을 제시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종교개혁은 당시 유럽인의 사탄 세력에 대한 불안감 해소를 위해 감행한 하나의 시도였음을 알아야 한다.


루터는 인간 본성에 관해 매우 비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1520년까지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켰다. 신은 오직 징법만을 맏을 뿐인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인간의 눈에는 연약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 신의 강함을 보이셨다는 것이 그의 십자가 신학의 요지였다. 루리아는 신은 기쁨과 평온속에서만 발견될수 있다고 가르쳤으나 루터는 신은 오직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만 발견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콜라 교부들이 구성한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거짓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 신학과 신앙의인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인격에 근거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정통신조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갈뱅>(1509-1564)


칼뱅은 교리에 별 관심이 없었고 주로 종교의 정치 사회 경제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단순히 성서적 경건신앙의 회복을 강조했으나 그것의 비성서적 출처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중시했다. 그는 회심체험 전엔 기존 교회의 권위와 교황숭배의미신에 사로잡혀있었으나 신의 섭리에 의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예정설은 칼뱅의 핵심사상이 아니었다.그것이 중시된 것은 그의 사후의 칼뱅주의에 의해서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신이 영원히 지옥에 몰아넣을 사람을 미리 정해놓았다는 예정설을 부정했다. 예정설은 문자적 성서해석에 근거한 인격적 신이해가 낳을수 있는 문제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청교도들은 칼뱅주의에 입각해 신을 기쁨과 자비보다 심판과 고통의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남긴 글은 그들이 예정설에 사로잡혀 구원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교도 신앙이 부정적 모습난 가진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그동안 노예적 속박으로 여겨왔던 세속직분에 대한 거룩한 소명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가톨릭>


가톨릭교인들도 청교도 못지 않은 신앙적 갈등으로 고통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들어 이그나티우스나 아빌라의 데레사도 크나큰 죄의식에 시달렸다.


이러한 종교개혁시기에 서구유럽의 공포적이고 암울했던 신앙사조는 왜인가?


그 당시는 극단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과학과 기술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세계 정복을 지향했으나 당시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계 도래로 인해 중가한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시켜줄 만한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했다. 그들은 늘 신에 대한 일종의 속박감을 느꼈고 본래 그것을 덜어주려 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런 종교적 속박상태로 몰아넣었다.  510


16세기부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의 철저한 문자적 이해에 신앙의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자적 성서 이해는 새로운 과학발전의 도전에 이겨내지 못했으며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즉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가오는 역사적 변화의 물결에 대비하는 종교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종교개혁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 그들은 신을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만들어 버렸으며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에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새로운 의미의 무신론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종교개혁이후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상상력에 근거한 신비적 신이해보다인간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신이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9장 계몽주의


16세기 말부터 서유럽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로 진입함으로써 다른 사회와 새로운 인간관을 창출했다. 새로운 산업사회출현은 유럽의 신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서구 기술문명사회의 특징은 전문화에 있었다. 전문화를 통해 여러 방면으로 개별화되었다. 또 각 개인은 자기 운명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기 시작한 자율성이 등장했다.


전문화과정에 관련된 사람들은 점차 인간삶의 전체적 구조를 볼수 없게 되었다. 즉 그들이 지니게 된 학문적 정신은 과거 이슬람 철학자들이 지닌 신앙행위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아니라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적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진리 추구를 위해선 성서나 교회같은 전통권위를 위협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경험주의 주도하에서도 무신론은 여전히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신존재를 인정한 점에서도 알수 있다. 


<파스칼>


신존재에 대한 의혹을 갖고 무신론을 진지하게 다루었던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신학자였던 그는 1654년 11월 23일 종교경험한 것을 기록한 메모가 조끼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신은 철학자의 신이 아니라 계시의 신이었다.


파스칼 회심의 압도적인 힘은 그로 하여금 얀센주의자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이끌었다. 그가 주장한 신의 부재에 따른 공포감과 황폐감이 서유럽에 등장한 종교적 신앙심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파스칼에게 있어 신앙이란 합리적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결단의 문제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동안 신존재논증에 매달려 오던 서구의 유일신론 역사에 새 장을 여는 것이었다. 신앙은 합리적 논증이 아니라 선택적 결단에 근거함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즉 신앙은 기존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신앞에 엎드려 결단하고 변화하는 자신을 깨닫고 예수의 동행자로 거듭남을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계시체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은 합리적 증명에 의해서는 발견될수 없는 숨은 신이었다. 그의 팡세는 인간존재에 대한 염세적 회의를 보여준다. 숨은 신에 대한 그의 염세적 신앙은 당시 서구인의 신앙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는 초기의 염세적 신앙관에서 신존재에 대해 도박을 걸고 신을 갈구하는 자에게 숨은 신이 나타난다는 실존적 신앙관으로 대체하였다.


<데카르트>


그는 신을 발견하는 지성의 능력에 신뢰를 두었다. 그는 지성만으로도 인간이 확실성에 도달할수 있다고 믿었다. 즉 그는 파스칼의 도박적 신앙론에 근거한 인간의 순수주관적 경험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인간의 순수주관성에 근거해 신존재증명을 시도했다.


그는 1200년전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존재의 확실성을 인간내면의식에서 찾았다. 그것은 내면세계의 경험을 통해 확실성을 발견할수 있다는 주관적 의식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이 의심할 때 자아의 유한성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은 그가 무한성의 완전존재를 이미 인식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신개념을 통해 인간에게 신존재의 확실성을 주지시키고자 노력한 그의 인식론적 신이해 방법은 서구인에게 자율성에 근거한 개인주의적 인간관을 제공함으로써 의존적 인간관을 전제로 했던 기존 신이해를 거부하게끔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성찰만을 중시한 데카르트에게는 자연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경단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의 합리주의적 신이해는 신비주의적 신이해를 부정했다. 이와같이 서유럽에서 신비주의는 종교개혁 때 일어난 교리 논쟁으로 인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신비와 신화론에 근거한 영성중심의 신앙이 서구 기독교인에게 낯설었기 때문이다.


<뉴턴>


신을 자신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종속시킨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신비주의적 기독교신앙을 거부했다. 그는 신이 하나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되는 우주에 관한 물리적 설명으로부터 신앙체계를 구성했다. 뉴턴의 물리학에서 자연은 전적으로 수동적 객체인 반면 신은 모든 활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신존재를 증명할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우주를 관장하는 신적 주관자가 있기 때문에 우주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536


데카르트는 완전이란 용어로 신적 속성을 말했으나 뉴턴은 지배라는 단어를 썼다. 그는 고대 플라톤주의 유출론에 관심을 기울려 공간은 무소부재의 신으로부터 영원히 유출되고 있다. 즉 신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의 무조부재성의 필연적 결과가 창조라고 보았다.


 그도 신비주의를 무지와 미신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에 관한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기독교로부터 모든 기적 요소를 제거했다. 원형적 종교에 기적과 경이스런 이야기들이 첨가 되면서 미신적 우상숭배로 전락했다. 결국 신은 원형적 종교의 타락을 막기 위해 예언자 그리고 예수도 이를 위해 보내졌다.


그는 1670년대에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신학적 연구에 몰두한 후 삼위일체 교리는 아타나시우스가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예수가 신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아리우스 주장이 옳았으며 신약성서의 어느 구절도 삼위일체와 성육신교리를 뒷받침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시대까지 서구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운동과 종교재판 그리고 마녀사냥과 같은 기독교의 만행을 목격해왔다. 기존기독교회의 정통교리 추종강요는 양심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에 매료되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종교개혁때 벌어졌던 교파간 유혈투쟁은 그들에게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새롭게 추구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어디에서 종교의 참 본질을 찾을 것인가 당시 서구인들이 찾은 그 해답은 이성이었다.


세속화 시도의 기독교 신앙형태가 理神論이었다. 그것은 신비주의나 신화라는 상상력을 요하는 훈련을 위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계시라는 신화에 등을 돌렸고 삼위일체라는 전통적 신비에도 등을 돌렸다. 삼위일체 등은 사람들을 너무 오랫동안 미신이라는 노예상태로 붙들어 왔던 것이다. 그대신 理神論은 인간 노력에 의해 발견할수 있는 비인격적 신과의 동맹을 선언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신이라는 이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부한 신은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몰아넣는 냉혹한 존재로 묘사된 정통교리의 신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성의 원리에 벗어난 신비주의 신앙의 신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접근할수 없는 지고의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다. 


<스피노자>


그에게 신은 단순히 법칙의 원리 즉 존재에 관한 영원불변의 법칙들의 집약체였다. 그의 신은 우주를 통치하는 질서로서의 물질적 존재였다. 그는 뉴턴처럼 고대 철학의 유출설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 그에게 신은 물질적이고 영적인 모든 존재속에 현존하는 존재질서의 법칙이었으며 신의 행위는 수학적 원리를 통해 입증될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부정했다. 550 대개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간주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신이 세계의 다른 실재들에 관계되는 인격체적 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신은 냉혹하고 종교체험의 역설적 신비를 허용하지 않는 인격적 신이었다. 그의 신은 전형적 계몽주의 사상가의 신이었다. 그는 인간이성으로 도달할수 있는 신에 관한 지식에 매우 만족했으며 신의 선함을 그의 신학의 중심부에 위치시켰다. 만일 이간이 계시에만 의지해야 한다면 많은 사람이 신적 계획에서 배제됨을 뜻하므로 이는 신의 선함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552


<칸트>


신에게 이를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덕적 양심의 자율적 영역에서 발현되는 실천이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단적 교회권위, 기도, 예배의식 등을 인간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종교적 속박의 소산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신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정신은 시공에 있는 실체만을 인식할 뿐 이 범주를 벗어난 실재는 인식할수 없으므로 인간 사유능력에 근거한 과거의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도덕에 관한 그의 관심은 신존재 필요성을 그에게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인간이 도덕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행복이라는 대가를 부여하는 절대통치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게 신은 인간삶의 도덕적 윤리체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으며 종교의 주체도 신의 신비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자신이 되었다.


그에게 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이 보다 효율적이고 도덕적으로 살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전략적 실체에 불과했으므로 결국 그의 자율적 인간삶을 위한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신존재이해는 곧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칸트는 과거 서구 기독교회의 전통적 신 존재증명의 타당성을 거부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게 과거의 존재론적 신증명은 아무 것도 확신시킬 수 없는 궤변에 불과했다.


<존웨슬리>

 

마음의 종교라는 새로운 신앙형태를 주창한 사람으로 그는 자신이 회심체험을 한 뒤 영국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농민과 도시하류층 사람에게 마음중심의 기독교신앙을 전파했다. 사실 거듭남의 체험은 신앙의 핵심이다. 그는 이 체험을 끊임없이 영혼속에 살아숨쉬는 신의 임재를 깨닫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온유와 인내의 마음으로 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감정적 종교경험만이 참된 신앙과 구원의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나 영적 신앙이 갖는 위험을 직시하고 마음의 평정을 강조한 신비주의 신앙과 달리 이런 감정중시의 신앙은 퀘이커 교도와 쉐이커 교도의 무아체험에서 나타나는 광란적 신앙표출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런 감정 중시신앙은 가톨릭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예수회와 교회 당국이 감상적이라 비난한 예수의 거룩한 심장에 대한 숭배현상을 낳았다.

 

<에드워즈>


사회학자들은 서구 기독교특징으로 억압과 관용의 기간이 폭력적으로 교체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억압국면일 때 종교적 부흥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완된 도덕 풍조후 더욱 근본주의적 종교성을 수반한 빅토리아시대의 억압이 뒤를 이었다. 또 1960년의 관용적 사회정신 후 1980년대 철저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을 탄생시킨 엄격한 청교도 윤리정신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어느 한 원인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 17-18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거듭남 체험을 강조한 기독교신앙은 폭력적이고 광란적 감정 분출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이런 현상은 1730년대 미국 뉴일글랜드 지역을 휩쓸었던 대각성 운동을 통해 극에 달했다.


자신의 절망적인 죄의식에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극단적인 자만의 신앙을 낳았다. 그래서 격한 감정을 드러낸 그들의 신앙은 미국의 기독교 부흥운동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이것은 격렬한 고통과 투쟁의 소용돌이를 수반한 거듭남 체험의 신앙으로 신 깨달음을 위해 오래 씨름한 서구인에게 신앙투쟁의 새로운 표현양태였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에드워즈가 이끈 대각성운동이었다. 그가 주도한 운동은 미대륙같은 신세계에 인간노력으로 신의 나라를 앞당겨 건설할수 있다는 천년 왕국색체를 띠고 있었다. 그가 주도한 운동은 비극적 실패를 했으나 성서의 구원계획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신념을 미대륙사람들에게 깊이 심어주었다.


2. 계몽주의 시대의 유대교

 

<샤베타이 제비>


유대교의 메시야로 추종받던 자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오스만 제국황제 술탄의 이름 대신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어 기도했다. 그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전 유대인은 샤베타이가 체포되어 감금된 갈리폴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이스탄불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죽음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했다. 그는 이슬람개종을 선택하자마자 즉시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연금을 받으며 충실한 무슬림으로 살다 167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개종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유대교 신앙마저 포기했고 랍비들은 그에 관한 모든 문서를 소각하고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자의 랍비 나단은 샤베타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주장하는 일에 바쳤다. 그에 따르면 샤베타이는 이스라엘 구원의 사명완수를 위해 어둠과 죄의 나락으로 내려가야만 했으며 그 과정으로 이슬람 개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변론은 유대인에게 지지를 받았다.


<카르다조>


유대교 신앙의 역사적 부가물을 벗겨내어 오직 경전에만 근거한 순수한 형태의 신앙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영지주의자의 반유대주의적 신개념을 바꿔 해석했다. 그는 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한 신과 보통 사람에게 계시한 신으로 나누었다.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원인이고 전자는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이스라엘을 구원할 신이다. 이 두성격의 신이 어떻게 유기적 관계를 가질수 있는가?


카르다조는 유대교에서 우상숭배로 금지해온 삼위일체론을 신해석에 수용함으로써 유대인에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샤베타이 제비가 메시아였을 뿐 아니라 신의 성육신이라 믿었다. 이 신앙은 서서해 발전해서 그는 구원의 역사가 신성한 자인 샤베타이가 자신을 들어올려 하늘위 본원적 신에게로 복귀함을 상징하는 그의 이슬람 개종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는 샤베타이가 본원적 신의 두 번째 파르주프인 이스라엘의 신이라 말함으로써 그를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성자 예수와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은 카르다조의 이런 삼위일체론적 샤베타이 해석을 발전시켜 이스라엘신이 샤베타이를 통해 성육신했다고 믿기 시작했다.


<야곱프랑크>


그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카발라에 근거한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샤베타이주의자의 삼위일체의 세가지 파르즈핌 각각이 지상에서 다른 메시야로 대표된다고 믿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을 신이 성육신한 존재라고 자부한 그는 유대교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인물로서 자신의 무교육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그는 과거전통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즉 그는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 예수와 샤베타이처럼 죄와악의 심연으로 내려와야 하지만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율법과 관습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다. 즉 그동안 신성시해온 모든 율법을 파괴하는 죄악의 심연을 향한 하강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음 말을 통해 주장했다. 


“구원의 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종교를 파괴하라 그대의 자유를 억압해 구원의 길을 막는 종교를 파괴하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의 어두운 비전과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연결을 느낄수 있다.


<하시디즘>


하시디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하시디즘은 유대교적 경건주의운동으로 새로운 유대교 종파이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일부 유대인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소리내어 기도하고 몸을 흔들며 찬양하는 무아체험강조의 신앙을 발전시켰다.


하시디즘의 제창자인 엘리에제르(후에 베쉬트라 불리움)는 36세에 자신이 귀신을 내쫓고 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샤베타이 사건을 통해 신비주의와 메시아주의의 결합이 갖는 위험성을 직시하고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모든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초기 신비주의를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재앙이 되는 신적 광채의 어두운 면보다 신의 현존으로 세상을 가들 채우는 밝은 면을 볼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이삭 루리아의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거부했다. 그것은 그가 루리아와 달리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는 신적 광선을 재결합시켜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시디즘은 실망과 좌절에 빠진 유대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하시디즘에 귀의한 사람중 상당수가 과거에 샤베타이를 메시아로 믿던 자들이었다. 베쉬트는 그의 제자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계율(미츠바)이란 말은 인간과 신을 묶어 주는 하나의 유대적 끈이다.


한 사람이 율법을 준수시 자기와 주변의 존재속의 신적 광채를 재결합함으로써 자신을 신과 합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베쉬트는 계율실천을 요구해온 율법에 신비주의적 수도의 중요성을 결합시켰다. 이들의 구원 실현을 위한 신적 광선보호주장이 기이한 현상을 연출하기도 하나 이는 현실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시도한 종교적 노력이었다.


베쉬트는 스피노자나 일부 급진적 기독교인과 달리 세계 내 모든 것이 신이라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이 신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신은 만물에 생명과 존재를 부여하는 근원적 힘이었지 만물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는 소수의 지식인만이 이해할수 있는 난해한 비의적 원리를 부정하고 신비주의원리에 대한 문자적 이해도 거부했다. 


하시딤은 독자적인 성육신사상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하시디즘적 랍비인 자딕이 하늘과 땅을 잇고 신적 임재를 대표하는 성육신한 신으로 숭배됨으로써 비롯되었다. 하시드(경건한 자)는 기독교인이 신과 가까워지고자 예수를 모방하듯이 신에게 올라갔던 자딕을 닮고자 노력했다. 하시딤은 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딕의 모범을 따르고자 했다.587


1780년대 잘만은 신비주의를 합리적 명상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하시디즘을 창시했다. 그것은 신의 세 속성(지혜 지성 지식)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하비드로 알려졌다. 하바드유대인은 신체험을 위한 이성능력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계몽의 사상가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적 명상수도를 강조한 점은 계몽주의자들과 다르다. 잘만은 누구나 신깨달음의 체험을 할수 있다고 믿었다. 하바드(신비주의 훈련)은 신비주의자 엘리트를 우한 것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종교개혁>-와합주의


재판관 이븐 알 와합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슬람에 부가된 이차적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이슬람 그 초기의 순수함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신비주의에 심한 적대감을 가져 성육신론적 신학-수피의 성인이 쉬아파이만에 대한 숭배를 포함해-을 암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19세기동안 와합주의는 이슬람 정서를 지배하게 되었고 수피즘은 점차 주변화되어 결국에는 기묘하게 미신적으로 되었다. 무슬림도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처럼 신비주의적 이념에서 등을 돌리고 보다 합리주의적 형태의 신앙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신론자 홀바흐>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 또는 도덕적 물리적 세계의 법칙>은 무신론적 유물론의 경전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자연은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물질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신의 전능과 선함이 서로 양립할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신개념이 통일성을 유지할수 없던 탓에 신은 늘 인간 마음속에 불신의 싹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계몽주의가 인류의 그 유아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과학이 종교를 대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떤 절대적 진리와 근원적 바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홀바흐는 신은 단순히 불필요한 존재정도가 아니라 매우 유해한 존재라는 것이다.


결론: 유일신론자들은 신이 일반 경험대상과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이 어떤 객관적 존재인양 말했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신을 다른 조재와 별 차이없는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서 증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홀바흐같은 무신론자들이 저기 어느 곳에 신이 있다는 기존의 종교적 주장을 뒤집어 저기 모든 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들과 유사한 주장을 폈다. 그들은 그후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신죽음 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10장. 신의 죽음


신존재를 부정하는 여러 이념이 서구인에게 지지받음으로써 서구 기독교의 인격적 신이해는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서구 기독교의 몰락은 수많은 잔혹행위가 과거 역사의 기독교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서유럽인의 인식에 기인했다.


19세기 낭만주의는 이성의 지나친 강조에 반기를 들었다. 서구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래 합리성을 강조했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적 신학은 이성중심의 신학에 감정을 부가시키려는 시도혔다. 그에게 감정은 이성과 함께 형언할수 없는 절대자를 가리키는 종교적 신앙의 피수였다. 그는 종교의 본질은 절대의존의 감정이라 규정했다.


19세기에는 철학자들이 신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도전했다. 그들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져 저편 어딘가에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초월적 신개념을 비난했다. 그러나 유대교인, 무슬림, 동방기도교인들은 서구 기독교회의 인격적 절대초월의 신개념이 신의 신비적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모두 신은 인간이 파악할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신을 무로 규정했다.그러나 서구 기독교인은 상상의 차원의 신개념보다 현실을 주관하는 구체적 신개념을 중시했다. 이는 19세게 서유럼의 무신론자가 공격하기에 충분한 모순과 약점을 안고 있었다.


<헤겔>


그는 신과 인간의 합일을 인간과 영 유한자와 무한자가 자기실현의 과정속에서 상보적으로 작용하는 변증법의 모델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인간 세계와 동떨어진 율법강요의 신을 거부하고 인간삶의 한 차원을 점유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자이고 계몽주의적 사상가였다. 그러므로 그는 상상력보다 이성을 더 중시했다.


<포이에르 바흐>


그는 서구 기독교의 신개념의 치명적 결점을 드러냈다. 즉 서구 기독교인은 신을 인간삶의 외부로 밀어내 전재군주의 모습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을 우상화했을 뿐 아니라 인간존엄과 가치를 경시하는 오류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인간의 죄와 악 투쟁과 고통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19세기 무신론자들은 다른 종교의 신앙보다 서구 기독교신개념을 공격했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비판한 마르크스가 대표적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역사적 과정외에는 아무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보았으므로 신존재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초월자로서의 신이해 못지않게 성서의 신에 대한 문자적 이해도 기독교 신앙을 과학적 발전시대에 맞지 않게 만든 요소가 되었다.


<세속주의>


다윈의 진화론이 기독교인들의 신이해에 치명타가 되진 않았다. 그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구 사회의 세속주의 물결이었다. 성서의 문자적 이해가 여전히 잔존한 것은 사실이나 서구 세계 모든 종파의 사람은 신의 죽음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서구사회의 세속화에 따른 우주관의 변화였다.


역사를 통해 신개념이 더 이상 역할을 못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폐기해왔고 때로 그것은 폭력적인 우상파괴라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의 이방신전을 파괴한 것이나 예언자들이 이웃 이교신들을 매도한 것이 그것이다.


<니체>


니체는 그동안 사람들이 신이라 불러온 현상을 점차 믿을 수 없게 만든 의식의 변화가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인식했다. 그런 서구인의 의식변화는 문자적 성서 이해를 어렵게 만든 과학의 발전과 신이 모든 일은 주관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게 만든 세속주의의 등장에 근거한 것이었다.616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신을 대치하는 초인의 탄생을 선언함으로써 기독교의 구가치들 특히 인간의 나약함을 대변하는 사랑과 연민의 기독교적 이념을 일소하는 강력한 인간출현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그는 신의 죽음을 주장하면서도 그는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신이 돌아올 것을 탄원하도록 만들었다. “돌아오십시오 끝까지 남은 모든 외로운 자들에게, 내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하는 신이여 나의 고통 그리고 나의 마지막 행복이여”


<프로이드>


프로이드는 종교란 유아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 작품이기에 비록 그것이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윤리적 가치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나 성숙한 단계로의 발전을 위해 인간삶의 중심부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신은 인간에게 새 도덕적 가치를 제공하고 인간이 새로운 도전에 과감히 대처케 하는 새로운 로고스인 학문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융은 프로이드와 달리 신을 개인이 주관적으로 경험할수 있는 하나의 심리적 진리로 보았다. 이같이 프로이드는 융이 주장한 인간내면의 주관적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종교를 폐지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는 타당한 주장을 폈다. 인간이 신존재의 벽을 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무신론과 세속주의에 휩쓸리는 것은 인간존재자체의 부정과 억압을 가져올수 있다는 것이다.


Q; 계몽주의시대에 무슬림은 어떻게 적응했고 대처했으며 어떤 신관의 변화를 경험했는가?


중동의 아랍 무슬림든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할수 있는 자신감을 상실했다. 오스만 제국붕괴후 아랍인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나 영국과 프랑스침략으로 희망이 좌절되며넛 더 자신감을 잃었다. 스미스는 당시 아랍인의 굴욕감이 과거 위대했던 이스람전통에 대한 향수로 더욱 악화되엇다고 말한다.


“오늘날 아랍인과 미국인의 차이는 위대한 과거전통에 대한 향수와 금세기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의 차이이다”

꾸란은 정의ㅣ와 평등같은 신의 뜻에 사는 자는 실패하지 않음을 가르쳤고 이슬람역사는 이를 입증했다. 예수와 달리 무함마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였다. 개인적 성공뿐 아니라 이슬람 제국건설로 인한 세속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사실이 무슬림에게 충실한 믿음생활이 세속적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역사와 꾸란가르침을 반추하고 새의미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들의 굴욕감은 서구인의 경멸에 의해 더 심화되었다. 이스람 학자들은 과거 이슬람의 전성시기를 강조하면서 이스람 가치의 정당화를 시도함으로써 신을 이스람 신앙의 중심부에서 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1930년-1948년까지 이집트 학술지 알 아즈하르에 관한 스미스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기간에 두 편집자가 근ㅂ무했다. 1930-1933년까지 종교를 정치사회적 실체라기 보다 초월적 개념으로 이해한 이스람 전통주의자 후세인이 편집을 맡았다. 그에 따르면 이스람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보다 미래의 삶에서 이루어질 초월적 규범이다. 인간삶에서 신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현재 움마의 고난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무슬림은 장차 이루어질 신의 뜻ㅇ르 구현하기 위해 이슬람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알라의실재를 당연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