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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그리스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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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그리스도론
1. 서론
주의깊게 살피지 않아도 대부분의 삼위일체 논쟁기간 동안 특수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는 한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비록 니카이아 공의회가 ‘아들은 육으로 이루어졌고 사람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진술로 된 신조를 내놓기는 했으나, 확실히 그리스도론적인 문제는 도외시하였다. ‘아들은 육으로 이루어졌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구세주에게 불완전한 인성을 부여한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후에 해석하였으나, 오히려 그 표현 뒤에 숨겨진 의도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에 반대하여 그분의 성육신의 실재를 강조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에 동의하였으므로, 신성과 관련해서 말씀의 지위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결론은 성육신의 구조(만일 우리가 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에 대한 견해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파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 요소와 결합되어 있는데 대하여 그들이 품고 있던 관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거기서 생겨난 논리적 귀결이었다. 니카이아파도 그들 나름대로 동일본질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구세주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일치시키는 문제와 불가피하게 대결하게 되었다. 그 문제는 4세기 중엽 이후에 곧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anism)가 나옴으로써 전면에 드러났지만, 니카이아 논쟁의 그리스도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출발부터 이미 그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의 관심은 동방교회에 있다. 동방교회는 이 문제를 두고 열띤 논쟁을 해왔다. 이에 반해 서방에서는 힐라리우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상을 펼쳤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독창성이 없었다. 서방의 공헌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하겠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아폴리나리우즈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4세기 전반에 풍미하던 그리스도론적인 이론과 후반기에 출현했던 다른 경향을 띤 반(反) 아폴리나리우스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하겠다.
그 시기에는 대부분 소위 ‘말씀-육’ 유형의 그리스도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3세기 오리게누스의 특수한 가르침에 반대하여 대응하던 신학자들은 그러한 그리스도론을 지지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던 이 그리스도론은 성육신을 말씀과 인간 육의 결합으로 보았고, 육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혼 혹은 영에 의하여 생명이 부여된 육체를 인간이라고 보는 플라톤적인 인간관을 그리스도론의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과 경합하고 있던 ‘말씀-인간’ 유형의 그리스도론의 영향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그리스도론은 말씀이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고 있는 완전한 인성과 결합되었다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또한 이 그리스도론의 배후에는 인간을 영혼-육체적 단일체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론과 복음에 묘사된 그 인물의 참 인간적 특성에 대해 공정하게 대하려는 결의가 함축되어 있다. 이 두가지 유형은 각각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론’과 ‘안티오키아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했다. 엄밀히 말해 이런 명칭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편리한 점이 있다.
2. 아리우스파와 유스타티우스
아리우스파가 대표하던 좌익 알렉산드리아주의와 이에 반대하는 사람, 즉 니카이아 신조 정착에 가장 열렬했던 투사들 중 한 사람이던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 336년 사망)를 대조해 보면, 아폴리나리우스주의가 등장하기 몇 십년 전에 이 두 가지 그리스도론적 시도가 어떻게 충돌했는지 상세히 연구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권위있는 자료가 공통으로 알려주는 바는 아리우스파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은 이성적 영혼을 지니지 않은 인간의 육체와 결합하였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곧 자연주의적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잇달아 주교를 지낸 유독시우스(Eudoxius)가 작성했다고 하는 신조에 잘 나타나 있다.‘우리는 육으로 이루어졌으나 사람이 아닌...한 분의 주님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인간의 영혼을 취하지 않고 육이 되어 하느님께서 장막을 통해 우리와 통교하듯이 육을 통하여 우리 인간과 통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두 본성이 아닙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육 안에 영혼의 자리에 계신 하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혼합에서 나온 하나의 본성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주장에 특이한 점이 없다. 이것은 268년에 안티오키아에서 말키오누스가 특히 말씀과 육에 의하여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단일성을 주장할 때 개략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그대로 주장한 것일 뿐이다. 아리우스파를 비난하던 초기 비판가들이 놀란 것은 그들의 ‘말씀-육’ 그리스도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이것을 자신의 일반적 신학의 관심에 이용하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타나시우스로부터 간추려보면 그들은 주께서 무지와 지혜의 성장과 시험당할 때 도움의 필요성을 귀속시키는 복음서의 구절들뿐만 아니라 요한 12,27(‘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과 요한 13,21(‘예수께서 심령이 산란하셨다’) 등과 같은 어려운 본문들도 로고스에다 연관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모순을 느끼거나 난처해하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로고스는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하기는 해도 여전히 변화를 감수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피조물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본성상 하느님이신 분으로서는 분명 그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정통파에 대해 역설하던 것 중의 하나는 로고스가 신이라는 가정 아래서 로고스와 육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 구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단일성이 참으로 초월적인 로고스와 인간의 육 사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육 그리스도론을 전제로 할 때 이러한 생각들은 설득력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반발이 일어났는데 그 반발자 중의 하나가 유스타티우스였다. 비록 그는 전통적으로 철두철미한 안티오키아학파였지만, 니카이아 논쟁 이전의 그의 사상에서는 몇 가지 비안티오키아적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하느님-사람(God-man)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늘 인정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신적인 로고스와 결합함으로써 어느 정도 신격화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몸도 ‘거룩하였기’ 때문에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모습에 반영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는 전형적인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이미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세례자 요한이 말씀을 품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과 축복받은 동정녀가 ‘하느님을 잉태하였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리우스파 그리스도론의 정체를 밝혀낸 첫 번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들은 왜 그리스도가 영혼없는 몸을 취하였음을 증명하여 그들의 추종자들을 속이려 했는가? 그것은 단지 그들이 이 거짓 이론을 믿도록 몇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런 열정 때문에 생긴 변화를 신적인 영에게 귀속시켜서,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 본성으로부터(즉 성부로부터) 생겨날 수 없음을 쉽게 설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몸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영혼이나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분 고난의 주제였다고 그가 주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거부하고 하느님이 어린 양처럼 도살자에게로 끌려 갔다거나, 말씀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임을 선언한 것이다.
발전된 그의 교의에 함축되어 있는 그리스도론은 분명히 말씀-인간 유형이었다. 유스타티우스는 그것을 해설하면서 하느님-사람 안에 있는 본성들의 이원성을 구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구적인 면으로 흔히 주목되어 왔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파의 맥락에서 ‘그 사람’과 ‘그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아직 나의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아버지 품 안에 있는 하느님이신 로고스가 한 것도 아니고, 모든 피조물을 포용한 지혜가 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 지체로 구성된 사람,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지만 아직 성부께로 올라가지 않으신 그 사람이 한 말이다. 이러한 유형의 이론들은 말씀과 ‘그 사람’이 어떻게 참된 단일성을 이루는지를 설명해야 할 문제에 늘 직면한다. 유스타티우스의 이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빈번히 내세운 주장은 말씀이 그분의 성전과 그분의 집, 그분의 천막인 인성 속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 머뭄은 말씀이 예언자나 영감받은 사람들에게 머무는 것과 유사하나 그의 머뭄은 지속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인간적 영혼이었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서로 일치한다.
유스타티우스에 의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말씀이신 하느님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말은 잘못 해석할 수 있으나 비록 유스타티우스가 그것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어도 그가 단일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3.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론
말씀은 하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가진 아리우스파 그리스도론이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극단적인 좌익에 서 있었다면, 아타나시우스는 그 학파의 고전적 대표자였다. 그의 출발점은 요한 1,14이었다. 그는 이것을 ‘로고스가 사람이 된 것이지,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구원론적 관심으로써 하느님만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물론 말씀이 전적으로 완전한 신이다. 그는 ‘우리 자신들이 그의 성육신의 동기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고 나타나서 인간을 사랑한 것은 우리의 구원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성육신은 모든 점에서 말씀의 초월적 지위를 조금도 변경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는 육을 취할 때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인간의 육을 지녔어도 우주에 대한 주권을 계속 행사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사람이 될 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가 육 혹은 몸을 취했다고 하거나 혹은 그가 동정녀의 태내에서 자신을 위하여 몸을 조성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성전 안에서처럼 이 몸 안에 거하고(요한 2,19이하에 나와 있는 이 이미지의 사용은 안티오키아학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말씀이 육체와 맺은 관계는 결코 우연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이 그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몸은 다른 이의 육체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다른 이의 육체라면 그의 구속적 목적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로고스의 참된 성육신 즉 ‘사람되심’이다. ‘그가 육이 된 것은 그가 육으로 변화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살아있는 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음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에게는 말씀-인간 유형의 그리스도론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말씀이 마치 예언자들 속으로 들어갔듯이 거룩한 한 사람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마리아로부터 몸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신적 로고스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스토아학파는 로고스를 우주의 영혼으로 파악하였다.
물론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로고스가 인격적이라는 점에서는 스토아학파와 차이를 보이지만 그는 스토아학파의 이런 관념을 차용했다. 그의 견해로는 로고스가 우주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며 이를 다스리는 원리이고, 인간의 육체와의 관계에서 동일한 역할을 성취하는 인간의 영혼은 로고스 그대로 본뜬 사본이며 실제적으로 로고스의 축소판이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일부이며 이것은 우주전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에 어느 특수한 부분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로고스 안에서는 어떠한 부조화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로고스는 성육신한 분의 몸 속에 현재적이면서 그것을 생기있게 하고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 어디에나 현존하면서 생명을 주는 그의 능력으로써 우주를 살아있게 하고 지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나온 결론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원리이었고 이것이 바로 복음서의 인물에서 드러난 모든 말과 경험과 행위의 주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적을 행하고 울고 배고파하였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십자가에서 큰소리로 울부짖었으며 마지막 때의 날짜를 모르는 무지를 시인한 분은 하나이며 같은 로고스였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그의 신성과 불가고통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사실상 아리우스파는 이 점을 논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영원한 존재로서의 말씀에 속한 것과 성육신한 분으로서의 말씀에 속한 것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 그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사도 베드로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신으로 고난당하였다’(1베드 4,1 참조)고 지적한 것이며 이 뜻은 우리가 이러한 인간적인 약점과 고난을 그리스도의 육적인 본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것들은 말씀으로서 말씀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육의 주체였다’고 설명한다. 주(主)의 정서적 경험과 명백한 정신적 한계(예를 들면, 주의 마음이 괴롭다거나 잔을 치워주십사고 기도드린 것이나 버림받음에 대한 그의 외침이나 모른다고 고백한 점)에 대하여 그가 언급한 것은 이 원리와 같은 맥락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주의 괴로워함, 두려움 등을 가능한 순수하게 육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육의 격정이었다. 만일 성서가 예수께서 지혜와 은총이 날로 자라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육과 그의 신성의 드러남이 동등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의미이다. 그가 모른다고 고백했다는 보고가 있더라도 그것은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짐짓 모르는 척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육을 취하였고 육은 본래 무지한 것이므로 그가 무지한 척 하였다는 것은 적절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서 각각 행하는 두 종류의 행동을 구별하면서도 이 두 가지 행동이 동일한 하나의 품격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신학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의 그리스도론의 중심문제를 직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의 이성적 영혼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로고스가 영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간주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철저하게 플라톤적이고 영혼을 육체와 아무런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는 그의 인간학은 후자의 가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가명으로 쓴 C.Apollinarium이라는 두 논문들이 그가 집필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견해는 362년까지의 그의 태도가 관계되는 한에서는 심각한 반론에 부닥쳤던 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육’이나 ‘몸’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영혼에 대하여 명확하게 분명한 언급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이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런 언어는 전통적인 것이고 신약의 용법을 반영해 주는 것이며 아타나시우스 자신이 ‘인간’과 ‘육’을 성서적으로 동등하게 본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비록 언어적인 논쟁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되더라도, 우리는 그의 사상이 단순하게 인간적 정신을 위한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대로, 그는 말씀이 신으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겪은 모든 경험의 유일한 주체라고 보았다.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죽음이 그의 몸에서 말씀이 분리된 것으로 보았고 그 말씀이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말했다. 아리우스파의 가설로는 피조물에 불과한 말씀에다가 구세주의 무지와 고난 등을 적당히 귀속시킨 아리우스파의 주장과 비교할 때 그의 태도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타나시우스가 인간 영혼을 인정했다면, 그에게는 이 때가 바로 무감각적이고 신적인 말씀보다는 인간적 영혼이 이러한 경험들의 참된 주체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에게는 이런 명백한 해결책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그대신 그 경험들을 육에다가 귀속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렸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론은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론처럼 말씀-육 도식을 따랐다. 그가 아리우스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말씀의 지위를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적 정신에 관한 명백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인간적 정신을 명시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그가 필시 그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이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362년경에 그의 태도가 변했는지는 아직 문제가 되고 있다.
그 해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주교회의에서는 ‘구세주는 영혼과 감각과 지성이 없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었다면 주의 몸에 지성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몸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포함한 구원은 말씀 자신을 통해 구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주교회의의 의장이었던 아타나시우스는 이 신조에 서명하였으므로 일반적으로 362년부터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상적인 인간 심리를 인정한 것으로 추측해 왔다. 알렉산드리아에 출석한 대표단 가운데에는 안티오키아학파인 파울리누스파(Paulinians)가 있었는데 이들은 유스타티우스를 추모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적 영혼을 믿던 그의 신앙을 신봉하였다.
만일 구세주가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까지 구원한다면, 그도 창조된 영혼을 취하였음이 틀림없다고 하는 그들의 논증이 아타나시우스에게 감명을 주었음직하다. 그는 그후 얼마 안가서 정확하게 그와 동일한 구원론적 주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구세주는 참으로 그리고 진실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육체와 영혼 전인(全人)’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아마 정당화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수락하는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의 후기 저술에 나타난 증거에 의거해서 그가 인간적 영혼을 인정하였다는 것이 그것에다가 어떤 신학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결코 성공하지 못하였으므로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사실상 그가 위에 제안된 대로 사상전환을 했었는지에 대하여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가 혹시라도 영혼과 감각과 지성을 지니지 않은 몸이라는 결정적인 말을 주께서 창조된 정신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로고스 자신이 그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원리였고, 하느님-사람의 지성이나 영혼으로 봉사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공식은 아마 말씀-육 그리스도론이 불완전한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주장에 따라 말씀-육 그리스도론의 추종자들이 거기에 대한 반론에 맞서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출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답변은 정신이나 영혼의 원형인 말씀이 그의 육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이론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의 참된 의미였다. 이어지는 문장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볼 때 그의 몸에 지성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강조점은 ‘주께서’에 있는 것이지 흔히 생각하듯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이 말들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 어려운 전체 구절에 대한 이런 해석은 해석보다는 오히려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론 일반 및 정신이나 νους를 신적인 말씀의 형상으로 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관념에 더 잘 부합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아타나시우스는 362년 주교회의 때 즈음 자기의 그리스도론을 수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신중한 견해일 것이다.
4.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우리는 이제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요 보좌주교이었던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 310-390)의 이름과 관련된 이단에까지 이르렀다. 이 이단은 사실상 4세기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론을 펼쳐온 가장 교묘하고 철저했던 시도였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오랫동안 인정해 온 경향들을 그 논리적 한계점까지 밀고 나갔던 것이다. 이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수 안에 인간적 정신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었으므로 학자들은 때때로 그 사상적 근거를 아리우스주의에까지 소급시키려고 시도하곤 하였다.
그들이 지적하는 바로는 아폴리나리우스 자신은 라오디케의 아리우스파 주교 테오도투스(Theodotus) 밑에서 독경사(讀經師)로 봉직했는데, 그가 젊었을 당시 지적인 분위기는 아리우스적 사상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성의 문제에 있어서 그토록 강인하게 아리우스파에 적대적이던 그가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들의 영향에 넘어갔으리라고 보는 것은 역설적이며 그 가설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사람 안에 인간적 정신이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제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말씀-육 그리스도론이 지닌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이었음을 살펴 보았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보고한 바로는 아폴리나리우스 자신이 자신의 가르침은 268년에 사모사타의 바울로를 정죄한 교부들의 입장을 재천명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이러한 자가진단이 표적에서 멀리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찌안쭈스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아폴리나리우스적 이단은 352년경 만큼이나 일찍 발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회의(362) 이전에는 그 이단설이 공적인 문제거리로 되지 않았으며 그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지한 논쟁의 불꽃이 붙었다. 성자의 동일본질설을 열광적으로 대변한 아폴리나리우스는 평생 이원론자의 반대자였다. 이것은 후에 ‘양성론자’라고 부르게 된 안티오키아학파의 그리스도론적 시도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할 때 사모사타 바울로의 해로운 영향을 반영했고 그의 교리는 유스타티우스와 파울리누스파와 플라비안과 타르수스의 디오도레와 같은 교사들이 재생시켰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들이 주님을 성육신하신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도 바울로-모방자들에 의하여 잘못 도입된 분할에 빠지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것은 그들은 노예처럼 사모사타의 바울로를 추종하면서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선언한 하늘로부터 온 분과 땅에서부터 온 그 사람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육신하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합된 사람을 고백하는’ 즉 단지 외적으로만 하나가 된 사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고, 하느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두 아들’을 구별하여 오도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고 항의한 듯하다. 이런 구분은 그리스도가 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역설하고 있다. 성서를 배제하고서라도 어떤 경우든 그러한 이원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분명히 구원론적 동기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그는 만일 구세주 안에 신성과 인성이 분리된다면, 우리의 구속이 위험스러워진다고 보았다. 만일 그리스도를 단지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분은 인류를 구원할 생명을 갖고 있지 못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거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거나 혹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 안에 신성이 거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경배하거나, 그의 죽음을 통해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류를 면할 길이 없고 썩어버릴 존재들에게 희생물이 되고 따라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토록 오류라고 생각했던 이원론을 없애기 위하여 말씀-육 그리스도론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을 썼다. 즉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성육신하신 하느님’이니, ‘육을 지니신 하느님’이니 혹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이라고 즐겨 말한 것이다. 이러한 묘사로써 그는 육은 단순히 말씀이 입고 있는 겉옷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육은 잉태하는 순간부터 존재의 절대적인 하나됨 가운데서 신성과 결합되어 있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는 ‘육신은 신성에 부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신성과 더불어 하나의 실재 혹은 본성을 이룬다’고 말한다. 성육신자는 결국 ‘인간적 형식으로 된 복합적인 단일체’이고 ‘고통당할 수 없는 신성과 고통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구성된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저는 제자신을 거룩하게 하오니’(요한 17,19)라는 본문이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그것은 ‘하나의 살아있는 실존체의 불가분할성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그의 육과 실체적으로 하나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파악한대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의 독립된 ‘본성’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존재하려면 그것은 영과 결합함으로써 생명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가르침의 풍부한 의미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육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운동과 행동의 다른 어떤 원리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원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자체로 완전한 살아있는 실존체가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과 결합해야 한다. 그래서 육신은 천상적 지배의 원리 즉 로고스와 결합하였고 그것과 융합한 것이다....따라서 피동자와 기동자에 의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실존체가 된 것이다. 둘도 아니며 두 가지 완전한 자동적 원리로 이루어진 하나도 아니다.’
이 논증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전제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 심리를 신적인 말씀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인간학에 의하면 사람은 ‘육과 결합된 영혼’이다. 따라서 그가 표현한 대로 이 하느님-사람 안에서 ‘신적인 에너지는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의 역할과 인간 정신의 역할을 성취시킨다’. 이것과 관련하여 육체가 되는 것은 그가 이분법자(二分法者)인가 (즉 그는 인간적 본성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는지) 혹은 삼분법자(三分法者)인가 (즉 그가 인간적 본성이 육체와 동물적 영혼 즉 φνχη 와 이성적 영혼 즉 νους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는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시적이고 지성적인 원리인 동시에 그분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공통된 견해는 보통 의지와 지성에 의해 행해지는 기능을 말씀이 수행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그의 그리스도론의 가장 특이한 특징에 대하여 제대로 언급하지 못한 것이다. 즉 말씀은 하느님-사람의 유일한 생명이면서도 순수하게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도 그의 안에 생명적 에너지와 운동을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이 점 때문에 그가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동의할 것이다. 그는 ‘한 사람으로 발견되었다’든가 ‘사람들의 모습으로’라는 본문의 말에서 그 차이점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의미가 사실상 확실히 보통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정액물질 대신에 신적인 영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 인간적 심리를 제거함은 그의 안에 두 가지 모순되는 의지와 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잇점이 있다.
그것은 또한 구세주의 무죄함을 설명해 주었다. 인간적 정신은 ‘오류를 면치 못하고 더러운 생각들에 예속되었으나’ 말씀은 불변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신적인 생명이 그의 안에 약동하고 있어서 성육신자는 심리적 내지 육신적 정열에 동요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능히 죽음을 물리치게 되었다. 그야말로 말씀은 그의 안에서 생물학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생명력과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사람이 단일체이듯이, 그와 꼭 마찬가지로 유기적인 생명적 단일체이다. 말씀과 그분의 몸 사이에는 ‘본성의 단일성’이 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표현대로 ‘그분은 나누임이 없는 하나의 위격이므로 하나의 본성이다. 그것은 그분의 몸만으로는 본성이 되지 못하고, 성육신된 신성도 그 홀로는 본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의 본성이듯이 사람들의 모습으로 온 그리스도도 하나의 본성이다.’ 그는 한 위격으로 간주되는 하느님-사람을 prosopon이라는 용어로 나타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hupostasis란 말을 사용하는데, 그는 이 용어를 그리스도론의 어휘 속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 용어는 하나의 자아를 결정하는 실재를 내포하고 있다. 성육신자에 대한 그의 일반적 표현은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안티오키아학파가 가르친 ‘두 본성’의 교리(兩性論)에 끊임없이 대항한다. 그는 유명한 어느 구절에서 ‘신성한 말씀이 성육신한 하나의 본성’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특별히 그가 같은 문맥에서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한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어휘에 있어서 ‘본성’과 ‘위격’을 동의어로 간주할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오류를 범한다면 그의 신학이 지닌 특수한 의미를 상실하고, 이질적인 관념을 그의 신학에다가 끌어드릴 위험이 있다. 만일 말씀이 성육신자의 위격을 구성하고 있다면, 그를 ‘성육신할 하나의 본성’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유기적 단일체를 암시하고 있다. 즉 생물학적이고 육적이고 영적인 수준에서 그분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결합되어 구성한 단일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중요한 대목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도 없으며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부터 그 몸을 따로 떼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의 본성이 되지 못한다. 반면 말씀도 그의 성육신 상태를 떠나서 따로 하나의 본성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께서 땅위에 사는 것이 육 안에서이지 육을 떠나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과 신성을 깊이 연관지어 ‘하나의 단일 생명과 인성(人性)으로’(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결합한다는 것은 아폴리나리우스 사상의 특징적인 핵심을 드러내준다. 그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은 그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흘러나오고, 그것에 비추어서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육은 말씀과 결합된 결과로 인해 영광스럽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신적인 육’ 혹은 ‘하느님의 육’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 안에 육과 천상적인 영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천상적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교리 때문에 아폴리나리우스는 주의 육이 그 기원에 있어서 천상적이고 선재적이라고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교리는 그 몸이 축복받은 동정녀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신성한 몸이라면 그 몸이 결코 말씀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기록한 모든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바는 구세주의 육을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의 육은 육이지 하느님이 아닌 만큼 하느님과 동질적이 아니지만, 신성과 결합하여 한 위격을 이루고 있는 한에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라고 논평하였다. 둘째로, 그는 이것의 논리적 귀결로서 그리스도의 육이 경배의 올바른 대상임을 확신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육이 경배받을 만한 말씀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육은 말씀에 속해 있고 따라서 말씀의 신적 속성에 참여하고 있다. 셋째로, 그는 모든 알렉산드리아 사상가들처럼 속성의 교류를 받아들이고 이용한다. 그는 ‘주의 육은 말씀과 결합되어 있을 때에도 육으로 남아 있고 (그것의 본성은 변하지도 않고 상실되지도 않는)’ 말씀의 명칭들과 속성들에 참여한다. 그리고 말씀은 여전히 말씀과 하느님으로 남아있으면서 성육신되어 육의 명칭들과 특성들에 참여한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우스가 사용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오직 한 위격만이 주체가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가능해진 말과 칭호의 외적인 상호교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육을 경배해도 좋다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참된 속성의 교류를 포괄하고 있다.
그 까닭은 육과 말씀이 양자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본성’ 안에서 결합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마지막으로 아폴리나리우스는 육이 실제적으로 말씀의 속성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성찬시 신자들이 주의 몸을 모실 때 신적 본성이 그들에게 나누어진다고 추론해 낸다. 그는 ‘거룩한 육은 신성과 더불어 하나의 본성이고 그 본성에 동참하는 자들 안에 신성을 주입시킨다’고 본다. 그 결과 ‘우리는 그것을 음식으로 나누어 먹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들은 구세주의 신격화된 육에 동화됨으로써 신격화된다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은 논리적으로 그의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