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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삼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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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 종교에서의 신개념의 전개 및 새로운 신개념형성
1) 모세이전의 유대교의 신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 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중 하나다. 아브라함의 신 엘은 굉장히 부드러운 신으로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찾아오고 심지어 인간의 형체를 취하기도 한다. 현현이란 이런 형태의 신성출현은 고대이교세계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야곱은 엘이 특별한 보호를 해 준다면 그 대가로 엘을 엘로힘(사람에게 신이 의미할수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말)으로 곧 유일하게 섬기는 신으로 모시겠다는 일종의 협상을 벌인 것이다. 이런 실용주의는 신의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신관념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2. <출애급>의 신-모세와 야훼의 계약
출애급기 6,3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신을 엘샤다이라 불렀고 야웨라는 이름을 몰랐다. 모세는 야웨라는 강력한 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했다. 하지만 이 신은 자연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사실 모세도 야훼의 성격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같다. 다만 그는 체험을 통해 하나의 사명 즉 백성을 원하는 신과 신을 원하는 백성사이에 계약을 맺을 수 있느 장소인 시나이로 가기위해 자기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사명만을 알고 있었다.
모세의 지도력은 이스라엘 종교를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모세 당시나 그 후에도 이스라엘인은 다신론적 신앙에 탐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 관습이 아직 그들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 모세의 유일신 신앙이 단순히 신학상으로만 오직 한 신이 존재함을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충성과 실천에 대한 요구가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지속해서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나이산 아래서 일어난 아론의 배교에 대한 얘기에서도 알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40주야를 시나이산에 올라가 있을 때 그들은 난폭하게 되었다.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 관계에서 이 관계가 충실히 지켜지기 위해 하느님은 계명을 주신다. 즉 충성과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신 신앙의 원초적 특징이며 이것 때문에 늘 타신앙 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이 계속 다신교신앙쪽으로 에집트를 갈망한 이유도 바로 이 유일신 신앙이 요구하는 실천적인 면때문이었다. 신앙과 윤리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된다. (솔로몬시대, 아합왕시대-엘리야와 바알사제)
이와같이 성서는 사람들이 언약에 충실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솔로몬왕은 다윗왕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도시 예루살렘에 야웨를 위해 가나안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성전을 건설했다. 솔로몬왕자신도 대단한 종교혼합주의자였다. 그는 각자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던 이방인 후궁을 거느렸고 이웃 나라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와같이 야웨신앙은 다른 종교를 격렬히 탄압하고 거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3. 바빌론유배이전-예언자들의 신- 하느님의 의인화
오래전부터 중동종교엔 예언자가 있었다. 예언자라는 직업을 지닌 사람들은 열렬한 신자도 있었으나 탐욕많은 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예언은 해롭다고 해서 종교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 그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적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1) 아모스
아모스에 의해서 자연의 섭리와 야웨의 관할권에 대한 관념이 구체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종교는 새 기원을 열게 되었다. 즉 그는 야훼가 자연의 섭리를 관할하고 있음을 말함으로써 야웨의 활동무대가 전세계적임을 말했다. 그는 추수 석달전부터 비를 내리지 않았고 전염병과 지진을 내렸다. 따라서 이제 야웨 신앙은 복종과 실천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가 우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는 새로운 신의 관념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2) 호세아
아모스가 사회적 악을 공격한 것에 비해 호세아는 이스라엘 종교에 내면성이 결여된 것에 관심을 가졌다. 즉 신에 대한 지식은 헤세드(사랑)와 연관된 것으로 제의를 외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넘어 야웨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98
선지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감정과 경험을 야웨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신을 창조한 셈이 되었다. 왕족의 일원이었던 이사야는 야웨를 왕으로 보았다. 아모스는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민을 야웨에 부여했고 호세아는 아내에게 버림받았으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사랑의 부드러움을 갈급하여 느끼는 남편으로 야웨를 생각했다. 모든 종교는 당연히 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는 신인 동형동성론의 요소를 가지고 시작한다.
예언자들은 이웃신들의 신을 자주 조롱했다. 이러한 이웃신에 대한 배타성은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종교적 태도였다. 이방종교는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신앙이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신들을 싫어하고 비판할 필요없이 차라리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유대교 경전에서 우상숭배라는 새로운 죄 곧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은 구토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01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 하느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날 유대인은 여기서의 “우리의 신 야훼는 한분이시고 유일하다”을 유일신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글을 쓴 신명기 기자는 아직 이러한 유일신론적 견해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인 야웨라는 말은 신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야웨야말로 경배할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신이라는 뜻이었다. 107
3) 이사야
기원전 742년 우찌야 왕의 통치가 끝날 무렵 등장한 자가 이사야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부분을 지적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 이후 황금의 새시대가 도래한다는 부분이다. 그는 북왕국의 시련과 멸망을 직접 보고 따라서 사방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민족이 다시 모여들것이라는 꿈과 환상을 보게 되었다.
이사야는 신과 인간의 차이 즉 철저한 분리 타자성을 의미했다. 시나이산 에 나타난 야웨의 현현은 인간과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간극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오토가 말한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그 누멘적 감정을 경험했다.
야웨와의 경험은 우파니샤드와 달리 한 인격과의 만남이다. 즉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 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에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시키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은 신화나 제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사건들 속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서 자신을 이방신들로부터 구별했다.
야웨는 더 이상 백성들의 축제 신년의식 순례들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이사야의 청중을 경악하게 했다. 중동에선 제의적 축제가 종교의 본질이다 이방종교는 고갈된 에너지를 갱신하기 위해 이런 제사에 의존했고 신들의 위엄은 부분적으로 그들신전의 웅장함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야웨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무의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사야는 제의준수하는 일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야웨는 희생보다 인자함을 더 원한다.
**<바빌론유배>
요시아왕 당시 622년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우연히 신명기계 법전이 성전에서 발견된 것이다. 요시아는 이 법전을 기초로 해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우상숭배 완전축출, 이교신당을 없애고 그 제관을 죽이고 예루살렘성소이외의 다른 성소를 모두 폐쇄시켰다. 유일하신 하느님, 유일한 율법, 유일한 성전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는 자기 이상구현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급거하자 그의 모든 사업이 뒤흔들렸다. 그후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로 유배갔다. (586)
유배지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을 지켜 나갔다. 사실 예언자들의 예언과 신명기계 개혁사업이 결실을 거둔 건 국가적 재앙덕분이었다. 이런 내부작업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새로운 유형의 종교쇄신을 했다. ---유다이즘의 출현
(요시아스의 개혁이 있은 다음 신명기계 법전은 증보되었다. 즉 신명기계 정신을 반영하는 설교들이 첨가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모세의 최후에 대한 몇가지 설화와 예언자들의 설교소재들을 다룬 대찬가가 첨가되었다. 첨가된 설교들의 공통적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의 재보를 맛보려면 율법을 실천하도록 권유하는데 있었다. )
**제관계학파**
예루살렘의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제시하신 요구를 모두 경신례에 결부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사제들 역시 이스라엘 전승의 중요한 측면을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 사제들의 업적은 신명기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신명기보다 좀 후대의 것이고 성스러움의 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이 언제 쓰어지고 공포되었는지 전통적 관습을 기초로 해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다.
모든 율법 예절법 도덕법 시민법이 이 이념을 지상에 실현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성스러움은 도덕적이라기 보다 예절적인 결백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도덕규범을 지킴은 사제들이 바치는 제사나 기도와 똑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이다. 도덕의 동기는 하느님의 엄위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라.”
** 제관계 법전의 형성
제관계 율법은 유배이전에도 있었다. 그 율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풍부해졌고 하나의 전통적 유산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전례들은 대부분 종식되었다. 그렇게 되자 국가가 재건되는 날까지 전통적 규정들을 정확하게 보존하기 위해 모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시급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직자들이 포로로 붙들려 가서 필생사업으로 여기고 자료수집과 편집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과거 모든 유산이 수집되었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제관계 법전이 완성되었다.
**제관계의 거룩한 역사
제관계율사의 작업은 천지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이는 성전재건전 6세기에 쓰여졌음에 틀림없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계약역사를 고찰했다. 이 역사에서 그들은 다음 4단계를 본다. 즉 세상과 인류의 창조-노아를 통한 하느님과 인류의 계약-성조들과 계약-시나이에서 맺은 계약 이 그것이다.
<예레미야>
**유배시대부터 스스로 아나윔(야훼의 가난한 이들)을 자처하는 자들가운데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야훼의 가난한 자들의 대열에서 예레미야는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나윔들의 시조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그는 종교와 국가간의 유대가 끊어진 시대에 사람들에게 “영과 진리로 행하는 경신례”를 미리 깨달아 실현했다. 유배시대에 그의 영향을 받아 그의 영성모범을 따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의 심적 태도와 표현을 따라 하느님의 백성은 바빌로니아에서 야훼의 가난한 자들의 교회로 된다......종교는 개인을 하느님과 합일시키는 내적교류라는 사상을 그만큼 명쾌하게 표현한 사람은 없다.
<에제키엘>
**유배시대에 이스라엘종교발전사상 획기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에제키엘의 공헌이다.그전까지의 예언자들은 회개를 설교했지만 그것은 백성전체의 회개였다. 그러나 에제키엘에 와서 이미 재앙은 지정사실이 되었다. 그것은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기 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돌연히 개별적 종교관에로 전향했다. 즉 개인구원론을 부르짖은 것이다.**
<예언자들의 메시지>
이스라엘종교의 독창성은 그 전승자체의 기원과 발전에 있어 영감받은 이물들의 역할에 있다. 이스라엘 종교전승의 기원은 모세이다. 그리고 왕정시대에 가선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모세의 전승을 보전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그 내용을 다듬고 심화시켜 나갔다.
이스라엘의 참된 전승은 모세와 더불어 시나이에서 생겨났으며 다윗시대에 가나안의 외교사상을 쳐이긴 전승이다. 예언자들이 받은 소명 역시 모세가 받은 소명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신명기계와 제관계작품들의 편집자들은 뚜렷한 모양으로 소명받은 예언자들이 아니라 성소에서 전수된 경신례 및 율법 전승을 수호하던 사제들이었다. 사제들은 경신례 및 율법 전승이 퇴조하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히 손질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승을 잘 보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관과 계약신학>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지방의 외교적 영향을 받아 야웨를 바알신의 대열로 격하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고 자연의 세력을 위격화 시켜 그 호의를 사려고도 했다. 예언자들은 이런 사상적 유혹에 대항하여 야훼께서 다른 온갖 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천명했다.다시 말해 야훼 홀로 하느님이심을 강력히 역설한 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인적 표현을 탈피하려 노력했다. 야훼를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하여 그위에 들어 높힌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관념은 예언문학과 제관계 문학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신조에서 두 번째 근간은 계약신학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당신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은총의 선물을 베푸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계약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첫째가는 의무였다.
<<성서전승은 그 본질적 내용과 부분은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고정되었다. 구전의 기간이 오래될수록 전승들은 도식화되거나 다양한 시적 요소들을 지니게 되거나 교훈적인 내용으로 발전하는 성향이 있었다. 성서전승들은 하도 다양하므로 하느님백성의 역사와 신앙을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전해준다.
확고한 전승은 모세에 관한 것이다. 모세가 율법의 모든 요소를 창안해낸 것은 아니다. 모세는 셈족의 관습법과 예식에서 빌어온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수정하고 완성하고 자기 권위로 재가하고 거기에다 새로운 정신을 박아준 것이다. 모세사후에도 그 율법은 존속하여 법기능을 다했고 모세가 고정시킨 율법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계승자들은 모세율법을 손상시키지 않고 해석하는 자였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율법은 늘 ‘모세의 율법’으로 남을수 있었다.
성문전승의 수집은 다윗시대에 이미 부분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솔로몬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업으로서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932년 나라가 분열된 후 그 작업은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같이 계속되었다. 두 개의 전승편집은 천지 창조부터 모세죽음에 이르는 역사의 초석을 이루었다. 그 편집은 여러 차레 거듭된 것같고 그 이전에 있던 자료들도 흡스하였다. 우리는 그 자료를 야훼스트(J) 와 엘로히스트(E)라고 부른다. 야훼스트계 사료는 유다왕국의 궁중문학에서 나왔고 그 정신은 군주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엘레히스트계 사료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나왔지만 반군주제도의 입장을 보인다.
<국가의 비운>
솔로몬으로부터 유다이즘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비운이 두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하느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신것ㅊ럼 보였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현세적 야망이 무너져감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좌절속에서 새롭고도 깊은 종교적 차원의 소명에 눈뜨게 되었고 구원의 은총을 약속받았다.
솔로몬이 죽고나자 국가가 양분되었다. 북은 이스라엘, 남은 유다로 국호를 정했다. 이 두왕국은 쇠퇴해 갔는데 이때부터 예언자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유다왕국은 요시아왕때 개혁을 했으나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1. 예레미야(기원전 600)
전통적 이스라엘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동체적으로 관계했지 결코 개인별로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벌은 전 이스라엘의 재앙으로 나타난다. 그러던 것이 점자 이스라엘 종교 전통에 개인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예레미야 이후부터였다. 그는 바빌론 유배 당시의 악을 보면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회의했고 자신의 예언직 때문에 겪는 자기민족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느님은 용서와 무한한 자비가 가능한 분임을 인식하면서 개별적 친교가 가능한 분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레미야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신과 대면하게 하고 각자의 행동에 각자 책임을 지도록 했다. 이제 더 이상 야웨가 인간을 집단단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각자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와같이 야웨의 종교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웨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예레미야는 종교의 외양적 장식이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레미야의 개인이 각자 신과의 관계맺음을 중시하게 된 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종교의 외적측면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것의 상징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적 주관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힌두교의 범아일려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았다.
2)에제키엘
에제키엘 역시 개인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제까지의 통념으로는 유배온 것은 민족전체의 죄과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공동체의 죄 때문에 각 개인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하느님의 불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문제가 에제키엘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죄가 의로운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이 그 죄과를 받아야 한다는 개인의 의무를 강조한다.
**유배이후-유대교 성립 및 묵시문학**
538년 키로스의 해방칙령이 선포되자 유대갔던 유대인들에게 예수살렘에로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 후 성전재건이 시작되었는데 이 성전은 비록 솔로몬시대성전보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 종교적 정열만은 왕성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약속해온 예언이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예루살렘이 세계종교의 중심지가 되리라 느꼈다.
그러나 이 꿈은 주변상황의 악조건으로 곧 깨어졌다. 백성들의 악습도 근절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와 에즈라는 율법에 따라 공동체의 내적 쇄신을 시키기 위해 힘썼다. 이때 이후 유대인은 율법공동체즉 유다이즘으로 발전했고 사방에 흩어져 살아도 율법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이즘은 기존의 모든 전승과 성서를 이어받았고 위대한 교리의 주제들도 물려받았다.
1. 모세오경의 고정
유배생활이 시작된 초기에는 문헌들이 두덩어리로 모아져 있었다. 하나는 신명기계사료이고 다른 하나는 제관계 사료이다. 키로스의 칙령이 반포된 후 (538) 이 두 개가 팔레스티나땅에 다시 정착했다.
실제 효력을 발생한 법은 신명기였고 후에 유기적 종합의 시기가 온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율법과 전승이 단일체제로 통합된 것이다. 이를 토라라 부르는데 이는 다섯(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나뉜다. 여기에 모세오경이란 칭호가 붙은 것은 바로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주도한 것은 모세의 인품이라는 사실이다.
<유다이즘의 기초인 율법>
유배이전에도 완고한 백성들을 위해 법률적 제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윱후 이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율법의 텍스트를 고정시키고 이를 당면문제와 직접 연관시킨 에즈라의 개혁활동을 보아도 그 관심사를 알수 있다. 이런 법률적 체제가 유다이즘이 이방세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는 담구실을 했다. 이런 율법에 열렬히 집착치 않았다면 유다이즘이 잔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지 까지 이스라엘의 엄한 가정교사구실을 했다. 그러나 율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애매함과 그 해악을 피할수 없었다.
<종말론적 대망과 메시아니즘>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 큰 실망도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대망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배이후의 예언자들은 이 약속이 지연되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고 더 큰 정열을 불러일으키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충분한 회개를 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 때부터 전진적인 종말론적 대망이 율법에 대한 충실과 함께 유대영성의 지배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대망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들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징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이 절박한 감정에 매달렸다. 이런 대망은 그 열기를 식히지 않고 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3) 제2이사야
제2이사야는 어느 예언자보다 가장 장엄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주권을 선언했다. 즉 그는 유일신 사상의 교의를 명백하게 내세운 최초의 히브리 작가이다. 제2이사야에 와서 유대교의 유일신은 신학적 이론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지니기 시작한다. 제 2이사야는 유대인의 시련을 세계사 속에서 이해했다. 그는 유대인의 시련은 야웨계획에 있는 궁극적 세계구원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야웨개념이 넓어져 아웨는 제한 조건없는 유일신이 된다. 야웨의 행동영역은 전세계이며 범우주적임을 말한다.
야웨는 한 지역이나 한 민족만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다. 야웨의 목적은 보편적이어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인류를 구원하고자 한다. 이 점이 그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이라 하겠다. 이는 그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본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야웨는 자신의 의사를 모든 인류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중계자 즉 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유대인은 선택된 민족이다. 그러나 야웨는 유대인에게 무조건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의 담지자로 봉사하라고 선택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를 인식치 못했기에 혹독한 고통을 통해 속죄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통해 유대인은 정화되었고 모든 민족은 고통받는 종의 신음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제 2이사야는 유대인에 대한 야웨의 처사를 정당화시켰다. 그는 야웨의 다음 계획은 유대인을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세계의 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상 페르시아고레스왕이 예웨의 뜻에 따라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을 해방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때 유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야웨 이름으로 모든 민족을 통치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제2이사야의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후기 유대교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통받는 종에 대한 예언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줄 이가 언젠가 나타날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중에 초기 기독교인은 나자렛 예수가 그 메시야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 시기엔 이스라엘의 수호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유일신사상이 정립되었고 이에 창세기가 씌여졌으며 이 유일신이 모든 민족과 역사를 다스리며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라는 그들의 초월성과 보편적 사고가 확립됨. 이러한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후에 이스람과 그리스도교에 의해 수용된다. 단 유대민족주의라는 한정을 넘어 보편성을 띠고서. (유배의 고통속에서 자신들의 고통이 민족의 정화는 물론 나아가 이것을 계기로 만민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적 인과응보사상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에로, 민족적 수호신에서 우주의 창조주로
1) 유대교의 출현
고레스왕은 포로민의 환심도 얻고 또 이집트변경에 완충국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유대인의 귀환은 즉시 이루어졌다. 고레스왕은 느부갓네살이 기원전 586년 약탈해온 사원의 기물을 되돌리고 사원재건자금도 조달했다. 일부는 바빌로니아에 남았으나 수천명은 귀환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황폐한 사원에 제단을 만들고 희생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사원재건사업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기존의 유대땅의 유대인과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들간의 갈등으로 사원개건은 15년간 중단되었다.
그후 예언자 하개와 즈가리야가 사원재건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내 사원을 재건했는데 그들이 고대한 상황의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인들이 야웨신앙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느혜미야와 에즈라가 왕에 의해 파견되어 성벽재건과 정신적 개혁을 일으켰다.
기원전 428년을 전후하여 느헤미야에 이어 제관이요 율사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에즈라는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국민생활의 기반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바로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일상생활에 율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선 正傳으로 인정된 성서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법에 관한 구전전통과 해설과 가르침들 및 성서 주석들이 필요했다. 성문화된 토라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시대가 열렸고 그 후 유대교의 역사는 토라의 해석과 함께 계속되는 시대였다.
<유대교 재건시대의 신관>
유배이전에는 하느님을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유배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초월적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 야웨를 입에 담지 못하고 예웨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그밖에도 하느님 야웨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으니 이름 하늘 전능쉐키나(현존)같은 것들이다.
2. 헬라시대
(기원전 332알렉산드리아왕이 팔레스틴 점령-기원전 63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점령)
1) 헬레니즘영향
유대인은 아직 본격적 철학적 사색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기원전 4세기 그리스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에 살던 유대인은 헬레니즘 문화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70인역본을 만들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이스라엘신을 알게 되었고 제우스와 함께 야웨를 경배하기도 했다.
유대인은 참된 지혜는 그리스적 영민함이 아니라 야웨를 경외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지혜문학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철학적 성찰보다는 참되게 사는 법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지혜문학은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잠언의 저자는 지혜야말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고안한 총체적 계획이며 신의 첫 번째 창조물이라 주장했다. 이 개념은 초기 기독교인에게 중요하게 등장할 것이다. 잠언의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독립된 하나의 인격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혜는 특별히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분명히 묘사된 점이다. 야웨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지혜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의 활동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초월신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즉 너무 지고한 신관념을 정립했기 때문에) 야웨가 직접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과 연관이 있다. 즉 P기자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수 있는 신과 그에 대한 경험을 신의 실재와 분리하고자 했다.
물론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성경의 신개념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거의 관심갖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과는 다르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발견될수 있는 반면, 성경의 신은 오로지 계시를 통해서만 자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그러나 신의 실재(초월적 신)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간에 공통점을 볼수 있다. 이러한 양자의 공통점에서 두 전통 사이의 신관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이 조화를 시도한 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원인으로부터 영원히 우주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신으로부터 능력이 유출된다고 보았는데 그 중 두가지 즉 하나는 우주의 질서를 통해 신을 드러내는 왕적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인간에게 수여하는 축복을 통해 드러나는 창조적 능력이다. 왕적 능력과 창조적 능력이라는 두 능력을 수반했던 신 그 자신이라 말했다. 필론은 인간이 신의 본질 그 자체에 접근할수 없다는 사실과 우리가 획득할수 있는 최상의 진리란 바로 신이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신비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필론은 파악불가능한 신의 본질과 신의 능력 또는 에너지 즉 세상에서의 신의 활동과의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세움으로써 설명했다. 이것도 P문서와 지혜문학의 저자들의 해결과 비슷한 것으로 우리는 신을 결코 그 자체로 알수 없다는 것이다.
필론은 그리스철학과 유대교의 만남을 시도한다. 즉 플라톤은 제일원인에서 우주가 유출되나 유대교는 신에서 능력(왕적 창조적 능력)이 유출된다.
이상에서 본 대로 P문서 지혜서 필론의 공통점은 신의 본질은 접근할수 없다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랍비시대에 와서 변화함(랍비는 야훼를 인간의 가장 사소한 분야에도 임재하는 존재로 만듬)
**바빌론유배이후 하느님의 의인화에서부터 하느님의 초월성이 감소되었다. 이러한 하느님의 초월성이 너무 강조됨은 하느님과 인간간의 간극을 말한다.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잠언저자는 지혜를 다시 하느님의 의인화로 본 것이다. 즉 지혜를 사람에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신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점은 지혜는 하느님의 창조물이지 신의 실재 그 자체와 구별되었다는 점이다. (후에 기독교에서 예수의 위상을 지혜에 비유한 점에서 유대교-유대교는 지혜를 하느님의 창조물로 봄-와 차이를 이룬다)
Q 그럼 이러한 지혜서와 그리스 사상과는 어떻게 되나
*아리스토텔레스-하느님이 자기창조세계에 무관심, 이성을 강조(이성으로 신과 인간을 가깝게 만들 수 있다고 봄)
*유대교-------하느님이 자기창조세계에 관심, 계시강조
Q 그럼 유대인들이 지닌 초월적 신관은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유대인은 지고한 신관념을 정립했기 때문에 야웨가 직접 인간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p기자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우리가 알수 있는 신과 그에 대한 경험을 신의 실재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했다. 소피아(지혜)는 인간에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신 곧 인간이 인식한 신으로 언제나 인간의 인식을 거부하는 신의 충만한 실재와 신비적으로 분리된다고 본다.
2) 조로아스터교영향
헬레니즘영향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영향보다 지속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헬레니즘은 세속적이고 철학적인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종교적이어서 유대교 기존사상을 보완시킬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탄 천사 내세에 관한 페르시아의 신앙과 메시야 사상이 그것이다. 최고의 심판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이어진다. 심판,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사상도 발달된다.
3) 유대교 단체의 출현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유대인 단체들은 외국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개의 단체를 출현시켰다. 먼저 대두된 것이 사두가이파이다. 사두가이파는 보수적인 사제계급과 지주층으로 구성된 기득권층이라 할수 있다. 이들은 토라에 대해선 엄격한 근본주의자들로 자의적 해석을 금했고 글자 그대로 해석을 원했다.
둘째 바리사이파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세속적 권력을 향유하지 못한 계급이었다. 이들은 토라를 일상에 맞게 활용하기 위해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토라에 대한 성서 해석법인 미드라쉬를 발전시켰다. 또한 바리새파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인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심판이라는 새 메시야사상을 옹호했다. 종말이전에 가장 중요한 의무는 율법준수이다. 그들은 마카비파와 내란 끝에 결국 로마의 폼페이장군이 중재에 나서면서 기원전 63년에 유대가 로마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에세네파들은 성전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하고자 사해 주변에 수도원을 짓고 은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성전은 영의 성전이 될 것이다. 동물을 바치는 전통 제사대신 세례의식과 공동식사를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속죄함을 얻기를 노력했다.
3. 로마통치시대(기원전 63-서기 135)
1)메시아사상-조로아스터교영향
로마가 팔레스틴에 침입한 후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유대인은 어려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 출현에 대한 희망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야웨가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데 있다. 야웨는 그의 메시야를 통해 죽은 이와 산 이 중 정의롭게 산 이를 모아 영원한 축복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선한 자이건 악한 자이건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을 수용하여, 모든 영혼이 메시야의 보좌 앞에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구분될 것이라고 보았다.
2) 새로운 유대인 집단
에세네파는 메시야 출현에 대비하기 위해 타락한 문명사회에서 도피하여 금욕생활을 했다. 단식과 기도, 자주 목욕 재계를 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으며 비폭력을 주장했다. 이들의 집단은 사해의 서에서 알수 있듯이 사해 서쪽 해안 절벽아래 쿰란근처에서 살았다. 그들은 완전히 초세속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자신을 빛의 자식이라 부르고 어둠의 자식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이 승리하여 다윗계통 메시아와 사독게통 메시야가 이스라엘 열두부족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다. 이는 히브리적 관념이라기보다 조로아스터교관념의 영향이었다.
엔센느파와 열혈당원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가 상반되었는데 전자는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고 은둔과 고행속에서 생활하였고, 후자는 역사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자들로 칼로서 무력봉기를 획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마 행정관이 계속 교체되면서 팔레스틴의 무질서는 절정에 달했고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네로의 아들 디도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대인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결코 항복치 않았다. 이로 인해 도시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사제들과 희생제의, 사두개파, 젤롯당 에세네파 헤롯당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랍비집단인 바리새파와 기독교인만이 남았다.
3) 유대인의 분산
앞서본 유대단체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성전의 붕괴로 해체되었다. 또한 수천년을 종교와 민족 그리고 국가센터로서 기능해온 예루살렘의 붕괴로 유대교 분산(디아스포라)을 이루었다. 기원후 70년 이후 유대인은 민족적인 대이주를 시작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 가운데에는 로마의 힘이 미치지 않는 바빌로니아나 아라비아 사막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 의한 바빌론 유수부터 이루어졌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해온 종교적 기능을 대신할 곳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바빌론 유수이후 시작된 시나고그로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이 이동되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대신 현실과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 디아스포라는 19세기 유대교 해방이 있기까지 유대교를 존속해온 틀이다.
4)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함과 아울러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혈당파와 자객당파 상급 제관들과 대지주들과 귀족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의 에쎄느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 건재하게 남았다
유대인은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와 문화의 결속을 유지해 나갔다. 디도가 69년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요하난이라는 랍비는 야브네로 피신했다. 70-80년 요하난 벤 자카이율사는 바리사이파 율사들을 이끌고 야브네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요하난의 주위에 몰려든 학생과 학자들은 함께 경전과 전승을 연구하고 해석했다. 야브네 학자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가르침과 영감의 원천이며 시나고그에서 낭송되는 유대교의 경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일이었다. 결국 90년경에 유대교의 경전이 확정되었다.
4. 랍비니즘 시대 (1-18세기)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랍비 요하난은 관속에 숨어 불타는 도시 예루살렘을 탈출했다. 로마인은 그에게 예루살렘 서쪽야브네에 바리새파 자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공동체는 탄나임학자들을 배출했는데 그들이 모세율법을 그시대에 맞도록 해석한 구전율법을 성문화한 미쉬나를 편찬했다.
그 다음 아모라임이라는 학자들이 미쉬나에 대한 주석을 시작하여 그것을 집대성하여 탈무드라고 알려진 논설집을 발표했다. 실제로 두 종류의 탈무드가 편찬되었다. 하나는 예루살렘탈무드로 4세기말에 완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바빌론 탈무드로 더 권위있는 것이라고 여겨졌고 5세기말이 되서야 완성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연이어 탈무드에 대한 해석에 대한 주석을 덧붙이며 해석의 전승을 계속되었다. 율법과 계명은 신의 말씀과 새로운 지성소에 대한 끝없는 명상이었다.
야웨는 언제나 저 높이 저 밖에서 인간을 감독하는 초월적 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이제 랍비들은 야웨를 인간속에 인생의 가장 사소한 분야에도 임재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성전을 잃은 뒤에 그리고 다시 유배경험 속에서 유대인은 삶속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을 원했다. 139
랍비들은 신에 관한 정식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만지고 느낄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들의 영성은 “일상적 신비주의”라고 표현되었다.
신의 임재를 느끼는 랍비들의 주관적 확신이 분명하여 공식적 객관적 교리는 별 쓸모가 없었다. 신은 각자의 이해력에 걸맞게 스스로를 맞추신 것이다. 어느 랍비가 말했듯이 신은 강제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고 그를 받아들일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걸맞게 찾아오신다. 이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신이 결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경험할수 있는 어떤 공식적 교리로 묘사될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신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다. 각 기인은 신의 실재를 자신의 독특한 기질의 필요에 부응해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성격이 신을 파악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선지자들도 각기 다르게 신을 경험했다고 랍비들은 주장했다.
어떤 공식적 교리도 신의 본질적 신비를 제한할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랍비들은 신이 절대적으로 이해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유대인은 신의이름을 발음하는것조차 금지했다. 신의 이름은 성서에 YHWH라고 씌어 있지만 성서를 읽을 때 발음할수 없다. 140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초월적이고 이해불가능한 존재가 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랍비들은 이에 관한 그들의 감각을 “신은 이 세계의 장소이지만 이 세계는 그의 장소가 아니다” 라는 역설로써 표현하였다. 실제로 신은 이 세상을 감싸고 있지만 신은 피조물처럼 세상에 거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마치 영혼이 육체에 거하듯 세계에 거한다. 즉 신은 세계에 생명을 주는 동시에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랍비들이 애용한 신의 동의어 중 하나는 쉐키나인데 이 말은 ‘-와 함께 거하다’ 또는 ‘자신의 천막을 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샤칸’에서 나왔다. 이제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동행했던 신에 대한 이미지가 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시사하게 되었다. 일부 랍비는 지상의 사람들과 함께 거했던 쉐키나는 성전이 파괴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신전의 산에 거한다고 주장했다. 141
다른 랍비들은 성전의 파괴가 오히려 쉐키나를 예루살렘으로부터 해방시켜 전 세계에 거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쉐키나는 신의 영광이나 성령과 마찬가지로 별개의 다른 신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의 현현으로 이해되었다. 랍비들은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쉐키나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임했음을 발견했다. 142
이스라엘과 신과의 연결은 너무 강하여 신이 과거에 그들을 구원했을 때 이스라엘인은 신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랍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유대적 방식으로 힌두교인이 아트만이라고 칭하는 자아와 동일화된 신개념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스라엘인은 랍비들로부터 자신들을 한 몸과 한 영혼으로 뭉쳐진 공동체로 생각하도록 가르침 받았다. 그들 공동체는 내재하는 신을 모시는 새로운 성전이었다. 그들이 시나고그에 들어와 완벽한 일치감 속에서 한목소리로 쉐마를 낭송할 때 신은 그들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유배동안 유대인은 주위 세상이 가혹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신이 함께 한다는 생각은 그들이 선한 신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유대인은 계율을 행하는 것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143
그들이 새 율법을 편찬한 일은 신의 활동인 동시에 자신들 스스로의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 세상에서 토라의 내용을 증가시킴으로 그들은 신의 임재를 확장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랍비들 자신도 율법의 화신으로 존경받기에 이르렀다. 율법에 대한 전문적 지식으로 인해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욱 신과 닮은 존재가 된 것이다. 내재적 신이라는 관념은 유대인에게 인류를 성스러운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랍비 아키바는 네 자신으로 네이웃을 사랑할지라는 계명을 율법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이라고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신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재창출하는 일이며 신을 닮는 행위다. 146
이스라엘의 신은 가장 거룩하지 않고 가장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일을 권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긴 세월을 통해 야웨는 이스라엘이 동료인간에 대한 자비심과 존경심을 배양할수 있도록 권면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아갔다.이런 자비심과 동정심이야말로 기축시대 종교의 공통된 특성이다. 랍비들이 지녔던 종교적 이상은 유일신 종교전통의 하나인 기독교에 근접해 있었다.
<중세유럽의 유다이즘>
1. 모세 마이모니데스(1135-1204)
그는 중세 초기 유대사상의 방향을 가름할 수 있는 봉우리이다. 그의 사상적 과제는 탈무드와 철학의 융합에 있었으며 이 점이 그의 업적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미슈나에 대한 주석서>, <미슈네 토라(두번째 토라)>, <회의론자를 위한 안내서>가 있다. 그의 목적은 종교와 과학, 신앙과 이성, 유대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분명히 계시에 의한 것이나, 이성을 통해서도 진리는 파악될수 있다는 것이다.
2. 유대신비주의
13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운동이 일어났다. 종교가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주장했는데 이는 관념적인 신학체계와 신비적 숫자사용, 상징주의를 주요특징으로 하는 카발라이다. 이는 숨은 지혜와 비의에 새로운 관심을 갖고 단어와 숫자를 신비롭게 배열하여 경전의 깊은 의미를 파헤쳤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숫자로 표시될수 있으므로 어떤 문장도 숫자배열로 표현가능하여 이를 신의 다양한 이름과 속성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카발라의 대표적 책이며 스페인의 모세 드 레온이 쓴 조하르(광채라는 뜻)는 탈무드만 완전히 신봉하는데 만족치 못하고 또 마이모니데스의 냉정한 합리주의에도 만족치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카발라는 필로와 영지주의자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신을 무한자로 보았다. 빛이 태양에서 나오듯이 신에게서 열가지 세피로트(문자대로는 열가지 수를 말하나 영적 실체를 의미한다)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유출자가 나온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로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던 세파르딤이 새로운 카발라(유대신비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영성신앙은 유럽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인해 빚어진 모멸감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갈릴리의 사페드에 정착해 고향상실이라는 경험속에서 심오한 의미를 밝혀낸 신비주의 신앙전통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랑생활이 모든 존재의 근원에서의 이탈을 상징한다고 보았으며 신마저 자신으로부터 이탈했기에 모든 창조물이 더 이상 적절한 처소를 가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삭루리아(1531-1573)
신은 구원과정에서 인간을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아담의 타락으로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아담의 영혼에 담긴 신적 광선이 흩어졌다. 그래서 신은 협력자로 이스라엘을 택해서 특별사명을 주신 것이다. 이같이 신적 광선을 회복하고 세계를 구원키 위해 토라준수와 경건한 기도생활을 함으로써 신적 광선의 분리로 불완전한 처지에 놓인 신을 듭고 있다. 즉 유대인은 신이 인간구원을 위해 은총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의존하며 신에 대해 새롭게 창조함으로 생각했다.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쉐키나는 욕기가 파괴도었을 때 다른 세피로트는 함께 흩어졌다는 것이다. 루리아는 유대인이 계율을 지킴으로써 신적 세계에서 추방된 쉐키나의 유랑을 종결지을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루리아는 재통합을 위한 유대인의 사명을 신비주의적 명상측면에서 이해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환난은 神性의 생기가 억눌인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부르짖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신적 세계에서 추방된 유랑을 종결지을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그와 동시대인인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은 신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신의 구원사역에 기도나 선행같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 점이 유대인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보다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이다.
이러한 루리아의 낙관적 신개념은 유대인이 죄의식과 분노로 얼룩진 절망에 빠져 유대신앙을 상실할 위험에 처했을 때 기쁨과 희망의 정신을 함양하며 낙관적 인간관을 갖도록 도와 주었다.
Q 유대교신비주의와 하시딤의 차이?
루리아는 계율을 중시했다. 물론 하시딤의 창시자인 베쉬트도 그의 제자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부버는 계율을 무시함
3. 메시아니즘- <샤베타이 제비(체비)> (1626-1676)
유대교의 메시야로 추종받던 자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오스만 제국황제 술탄의 이름 대신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어 기도했다. 그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전 유대인은 샤베타이가 체포되어 감금된 갈리폴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이스탄불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죽음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했다. 그는 이슬람개종을 선택하자마자 즉시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연금을 받으며 충실한 무슬림으로 살다 1676년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가 위기상황속에서 유대교를 부인하고 이스람을 택했다 해도 그것은 이미 유대인 세계 전체에 그가 벌인 운동이 번진 뒤였다.
그가 개종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유대교 신앙마저 포기했고 랍비들은 그에 관한 모든 문서를 소각하고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자의 랍비 나탄은 샤베타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주장하는 일에 바쳤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대교>>
1) <하스칼라>-계몽주의
하스칼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17-18세기의 서구 유럽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당시 서구는 중세 1000년동안 잠재되어 왔던 것을 폭발시켜 온 시기이다. 그 시기에서 선두에 선 것이 계몽주의이다. 이런 서구변모는 세속에 복귀하지 못한 유태인에게 위기감으로 작용했다. 이런 흐름은 유대교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났다. 먼저 외부의 영향은 계몽주의 사고의 영향을 받은 레싱의 주장으로 그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같은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모세스 멘델스존은 이런 계몽주의 유대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모세오경과 탈무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외부에 유대인을 알렸다.
모세 멘델스존(1729-1786)은 베를린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던 여러 제한 조건을 극복하고 베를린의 지식인층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멘델스존의 삶을 통해 가장 중요했던 작업은 유대인들을 게토에서 해방시키고 유대인도 다른 민족과 동등한 자격을 지니고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합리주의와 희의주의적 태도는 모든 종교를 하찮은 것으로 여김에 따라 문화중심였던 종교와 계급의 장벽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중부와 서부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은 지난 2세기동안 시민권의 불평등한 처지로부터 서서히 해방되었는데 이를 ‘세상으로의 복귀’라고 부른다. 세속에로의 복귀는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모세스 멘델스존처럼 유대유럽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속에 복귀하자는 입장과 철저히 세속으로 들어가자는 개혁유대교의 입장이다.
2) <하시디즘>-하시딤
하시딤은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유대교 내부의 경건주의운동으로 외적인 의식과 모세 율법의 지나친 엄수와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 랍비들의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됨으로써 억눌려 온 감정적 종교적 정서가 이 운동으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은 신비주의 운동인 카발라의 영향을 무시할수 없다. 랍비 유대교에서부터 종교적으로 내면적 요구를 지향하는 욕구가 늘 있어왔다. 이것이 신비주의운동으로 일어났고 이는 15-16세기 메시아운동과 습합되었는데 이삭루리아 샤바티안 제비의 메시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유대공동체는 허탈감에 빠진 상태였다. 그 이후 유대교는 동부유럽에서 하시딤과 서부유럽의 영향으로 계몽주의(Haskala)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동유럽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운동으로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이는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순회 신앙 치료가였던 이스라엘 리난 사람은 탈무드 주의자들은 율법을 너무 좁게만 연구하기 때문에 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비난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신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신은 자연 인간의 삶 모든 인간의 사고를 포함하여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교란 모든 것에 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이며 신의 내재를 믿고 즐겁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나는 학문이 아니고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평민인 자기추종자들이 2천년전 바빌론 유수이후의 이름을 따서 하시딤 또는 경건한 자들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을 하시디즘이라 불렀다.
하시딤은 다른 유대교 운동과 달리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서 일어났다. 메시아운동의 실패이후 토라라는 정신적 지주를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은 극도의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하시딤은 이 현재에서 구원의 체험을 얻을수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즉 이들은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파악한 것이다.
<하시딤의 신학과 윤리>
하시딤 지도자들은 설교나 교훈적 얘기를 통해 말하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사상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구원관은 민족이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개인적 내면성추구였다. 하시딤의 특징적 면모중 하나는 사디크(의로운 자)에 대한 내용이다. 사티크는 카리스마와 신비적 동인을 가진 지도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시공속에 제한되어 있어 샤바타이의 메시아 사상과는 구별된다. 즉 사디크는 공동체 전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 이들이 죽은 후엔 이들의 계승자에 의해 이 역할이 수행된다.
하시디즘은 율법의 학습이 아닌 뛰어난 능력의 기도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기적적 행위같은 종교적 카리스마의 중요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에 따라 랍비와 같은 율사들의 지도력에 대한 사람들의 순종도가 약화되었다. 옛것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모임을 만드는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하시디즘은 새로운 사회상황에 적응하려는, 항거하려는 운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시딤은 이전 모든 신앙과 비교해볼 때 내용, 가치, 구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토라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는가 하면 다른 한편 짜디크와 그 짜티크의 거룩함에 대한 찬양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을 성취했다. 하시디즘으로 인해 전통적 협동사회 내에 종파가 생겼다. 그 종파 일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따랐으나 어떤 종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교리와 정책으로 학습이 아닌 인격성에 기초를 둔 종교적 사회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옛 공동체 안에다가 새로우면서도 제한적인 집단을 형성시켰다. 그 결과 케힐라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하시디즘의 제창자인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후에 베쉬트라 불리움)는 샤베타이 사건을 통해 신비주의와 메시아주의의 결합이 갖는 위험성을 직시하고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모든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초기 신비주의를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재앙이 되는 신적 광채의 어두운 면보다 신의 현존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밝은 면을 볼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이삭 루리아의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거부했다. 그는 루리아와 달리 자기 주변에 있는 아내와 하인 가구 음식 등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는 신적 광선을 재결합시켜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베쉬트는 그의 제자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계율(미츠바)이란 말은 인간과 신을 묶어 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