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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연구

본원4-유대교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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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1-05-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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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니즘시대(1-18세기)의 신관


<중세 유대교>


중세가 오면서 유대인의 생활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7장 신비주의자의 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전수받은 인격주의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종교역사상 가장 독특한 형태로 인간을 종교적 삶의 중심에 놓았다.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게 하기 보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인격적 신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종교는 이런 인격적 신개념이 갖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사고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개념을 추구해왔다.


결국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인격적 범주를 초월해 불교의 열반이나 힌두교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 아트만과 유사한 비인격적 범주를 통해 신을 이해하기 위한 신비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유일신론은 역사적으로 신비주의 신앙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는 예언자의 체험과 붓다같은 명상가의 체험의 차이에서 잘 파악된다. 유일신종교는 신의 뜻이 하늘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확신에 근거한 적극적 경건신앙에서 출발했다. 이는 인간과 신의 대면적 접촉을 강조하며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하나의 정언적 명령으로 신을 이해한다. 신비주의신앙은 이성적 신앙보다 신의 현존의식을 끊임없이 고취시켜 一者에 도달하는 길을 제공한다.


1.유대교신비주의


2, 3세기 초기유대신비주의는 신과 인간과의 괴리감을 강조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박해당하고 소외받는 현실에서 참 정의가 실현되는 신적 영역에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교 랍비들과 적대관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보좌신비주의라 불린 그들은 12, 13세기 사이의 새로운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에 귀속될 때까지 유대 랍비전통과 함께 중요한 종교적 요소를 채워주었다.



초기 유대신비주의자의 환상 중 가장 특이하고 논쟁적인 것은 쉬우르코마(최고존재자의 측정)에서 볼 수 있다.


이는 5세기경의 문서로 에스겔이 본 보좌 위의 신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신에 대한 신비적 묘사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소개해 주었다.

첫째는 상상을 통한 것이고 둘째는 형언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모습은 신의 이미지이지만 신비주의자는 그것을 그들의 상승초후의 단계에서 보좌에 앉아있는 것을 본 것이다. 402


초기 유대신비주의 문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5세기경의 세페르예지라(창조의 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세상창조과정을 신이 직접 묘사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대신비주의자는 자신이 쓰는 언어를 점차 극단적 형태로 변형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창조 이야기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언어를 인간의 사고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어 그것을 초월하는 탈언어적 의미를 도출함으로써 인간에 대해 신이 갖고 있는 타자성을 지적하려는 것이 유대인 보좌신비주의자들의 의도였다. 403


**<유대신비주의>-카발라


13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종교가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주장했는데 이는 관념적인 신학체계와 신비적 숫자 사용, 상징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카발라이다.

이는 숨은 지혜와 비의에 새로운 관심을 갖고 단어와 숫자를 신비롭게 배열하여 경전의 깊은 의미를 파헤쳤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숫자로 표시될 수 있으므로 어떤 문장도 숫자 배열로 표현 가능하여 이를 신의 다양한 이름과 속성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조하르>(광채라는 뜻)


카발라의 대표적 책이며 스페인의 모세 드 레온이 쓴 책

조하르는 탈무드만 완전히 신봉하는데 만족치 못하고 또 마이모니데스의 냉정한 합리주의에도 만족치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책에서 모세 드 레온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숨어있는 영적인 힘에 대한 종교적 체험을 강조했다.


카발라는 필로와 영지주의자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신을 무한자로 보았다

빛이 태양에서 나오듯이 신에게서 열 가지 세피로트(문자대로는 열가지 수를 말하나 영적 실체를 의미한다)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유출자가 나온다.


그 중 신의 의지는 지혜(남성)와 지식(여성)을 생성시켰고 이것들이 다시 은총(남성)과 힘(여성)을 생성시켰으며 힘은 은총과 결합해서 미를 생성시켰다.


그들에 의해 자연계가 생성되었다.


이런 관념구조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속성과 우주적 힘을 지닌 소우주이며 적절한 방식과 명칭 상징을 통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메시야 사상>


메시야 자신도 출현하면 신비로운 명칭과 상징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카발라의 이런 영향으로 중부 유럽에 많은 메시야가 나타났으나 이들은 모두 신앙깊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로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던 세파르딤이 새로운 카발라(유대신비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영성신앙은 유럽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인해 빚어진 모멸감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갈릴리의 사페드에 정착해 고향상실이라는 경험 속에서 심오한 의미를 밝혀낸 신비주의 신앙 전통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랑생활이 모든 존재의 근원에서의 이탈을 상징한다고 보았으며 신마저 자신으로부터 이탈했기에 모든 창조물이 더 이상 적절한 처소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479


1. 이삭루리아(1531-1573)


유대신비주의자들은 그들의 신비체험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서술코자 한 사페드 카발리스트의 태도는 모순된 것으로 보였다.

이를 인식한 자가 루리아이다. 그는 글을 남기지 않아 후에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사상을 알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환난은 神性의 생기가 억눌인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부르짖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신적 세계에서 추방된 유랑을 종결지을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그와 동시대인인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협사상과 유사한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은 신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신의 구원사역에 기도나 선행같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 점이 유대인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보다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이다.

이러한 루리아의 낙관적 신개념은 유대인이 죄의식과 분노로 얼룩진 절망에 빠져 유대신앙을 상실할 위험에 처했을 때 기쁨과 희망의 정신을 함양하며 낙관적 인간관을 갖도록 도와 주었다.


2) 메시아니즘- <샤베타이 제비(체비)> (1626-1676)


그는 터키의 스미르나에서 출생하여 야웨를 발설하는 등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탄 벤 엘리사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곧 신비주의 나탄으로부터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로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1664년 자기를 전도했던 가자의 나탄과 더불어 메시아로서은 사명을 선포했다. 비록 그가 위기상황속에서 유대교를 부인하고 이스람을 택했다 해도 그것은 이미 유대인 세계 전체에 그가 벌인 운동이 번진 뒤였다.

유대교의 메시야로 추종받던 자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오스만 제국황제 술탄의 이름 대신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어 기도했다. 그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전 유대인은 샤베타이가 체포되어 감금된 갈리폴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이스탄불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죽음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했다. 그는 이슬람개종을 선택하자마자 즉시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연금을 받으며 충실한 무슬림으로 살다 167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개종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유대교 신앙마저 포기했고 랍비들은 그에 관한 모든 문서를 소각하고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자의 랍비 나탄은 샤베타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주장하는 일에 바쳤다. 그에 따르면 샤베타이는 이스라엘 구원의 사명완수를 위해 어둠과 죄의 나락으로 내려가야만 했으며 그 과정으로 이슬람 개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변론은 유대인에게 지지를 받았다. (나탄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죄다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대교>>


1) <하스칼라>-계몽주의


이는 유대인 해방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유대교의 정의를 다시금 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이 하스칼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17-18세기의 서구 유럽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당시 서구는 중세 1000년동안 잠재왔던 것을 폭발시켜 온 시기이다. 그 시기에서 선두에 선 것이 계몽주의이다.


1789년 프랑스에서 인권선언되면서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 중세때에는 게토라는 곳에 유대인만 살고 있었다. 이같이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이 해방되고 또 모든 젊은이에게 기회의 균등이 부여되면서 유대인의 독특성을 잃어갔다.


이런 서구변모는 세속에 복귀하지 못한 유태인에게 위기감으로 작용했다. 이런 흐름은 유대교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났다. 먼저 외부의 영향은 계몽주의 사고의 영향을 받은 레싱의 주장으로 그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같은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모세스 멘델스존은 이런 계몽주의 유대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모세오경과 탈무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외부에 유대인을 알렸다.


중부와 서부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은 지난 2세기동안 시민 권상의 불평등한 처지로부터 서서히 해방되었는데 이를 ‘세상으로의 복귀’라고 부른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해방의 정당성을 지지했고 실제로 유대인 해방은 18세기와 19세기 불란서와 독일 혁명에 의해 가능했다.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합리주의와 희의주의적 태도는 모든 종교를 하찮은 것으로 여겼고 그래서 문화중심였던 종교와 계급의 장벽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모세 멘델스존(1729-1786)은 베를린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던 여러 제한 조건을 극복하고 베를린의 지식인층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멘델스존의 삶을 통해 가장 중요했던 작업은 유대인들을 게토에서 해방시키고 유대인도 다른 민족과 동등한 자격을 지니고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세속에로의 복귀는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모세스 멘델스존처럼 유대유럽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속에 복귀하자는 입장과 철저히 세속으로 들어가자는 개혁유대교의 입장이다. 


*개혁 유대교


멘델스존과 같은 계몽사상가에 의해 시작되어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필요없는 것은 개혁 이성적인 실천 윤리중시 즉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를 만들자는 기치로 성서와 탈무드에 나오는 계시된 법은 인간이 고칠수 있다고 함.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유대교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회당이 전부 개혁유대교가 되었다.


*정통유대교


이스라엘 국가가 인정하는 것으로 토라와 탈무드의 법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그대로 전승하려 함. 서유럽유대린은 대부분 조상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부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선 하시딤운동이 일어났다.


2) <하시디즘>-하시딤


동유럽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운동으로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이는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순회 신앙 치료가였던 이스라엘리난 사람은 탈무드 주의자들은 율법을 너무 좁게만 연구하기 때문에 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비난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신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신은 자연 인간의 삶 모든 인간의 사고를 포함하여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교란 모든 것에 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이며 신의 내재를 믿고 즐겁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나는 학문이 아니고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평민인 자기추종자들이 2천년전 바빌론 유수이후의 이름을 따서 하시딤 또는 경건한 자들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을 하시디즘이라 불렀다.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유대교 내부의 경건주의운동이다. 외적인 의식과 모세 율법의 지나친 엄수와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 랍비들의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됨으로써 억눌려 온 감정적 종교적 정서가 이 운동으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은 신비주의 운동인 카발라의 영향을 무시할수 없다. 랍비 유대교에서부터 종교적으로 내면적 요구를 지향하는 욕구가 늘 있어왔다. 이것이 신비주의운동으로 일어났고 이는 15-16세기 메시아운동과 습합되었는데 이삭루리아 샤바티안 제비의 메시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유대공동체는 허탈감에 빠진 상태였다. 이후로 유대교는 동부유럽에서 하시딤과 서부유럽의 영향으로 계몽주의(Haskala)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하시딤은 다른 유대교 운동과 달리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서 일어났다. 메시아운동의 실패이후 토라라는 정신적 지주를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은 극도의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하시딤은 이 현재에서 구원의 체험을 얻을수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즉 이들은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파악한 것이다.


<하시딤의 신학과 윤리>


하시딤 지도자들은 설교를 통해서나 교훈적 얘기를 통해 말함으로 그들 고유의 사상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구원관은 민족이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개인적 내면성추구였다. 하시딤의 특징적 면모중 하나는 사디크(의로운 자)에 대한 내용이다. 사티크는 카리스마와 신비적 동인을 가진 지도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시공속에 제한되어 있어 샤바타이의 메시아 사상과는 구별된다. 즉 사디크는 공동체 전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회개를 이끌어 내고 이들 사후엔 이들의 계승자에 의해 이 역할이 수행된다.


하시디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하시디즘은 유대교적 경건주의운동으로 새로운 유대교 종파이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일부 유대인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소리내어 기도하고 몸을 흔들며 찬양하는 무아체험강조의 신앙을 발전시켰다.


당대의 영국 감리교와 18세기 중엽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을 상기시켜 주는 경건주의 운동인 하시디즘에서는 율법의 학습이 아닌 뛰어난 능력의 기도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기적적 행위같은 종교적 카리스마의 중요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에 따라 랍비와 같은 율사들의 지도력에 대한 사람들의 순종도가 약화되었다. 옛것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모임을 만드는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하시디즘은 새로운 사회상황에 적응하려는, 항거하려는 운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 모든 신앙과 비교해볼 때 내용, 가치, 구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토라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는가 하면 다른 한편 짜디크와 그 짜티크의 거룩함에 대한 찬양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을 성취했다. 하시디즘으로 인해 전통적 협동사회 내에 종파가 생겼다. 그 종파 일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따랐으나 어떤 종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교리와 정책으로 학습이 아닌 인격성에 기초를 둔 종교적 사회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옛 공동체 안에다가 새로우면서도 제한적인 집단을 형성시켰다. 그 결과 케힐라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하시디즘의 제창자인 엘리에제르(후에 베쉬트라 불리움)는 36세에 자신이 귀신을 내쫓고 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샤베타이 사건을 통해 신비주의와 메시아주의의 결합이 갖는 위험성을 직시하고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모든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초기 신비주의를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재앙이 되는 신적 광채의 어두운 면보다 신의 현존으로 세상을 가들 채우는 밝은 면을 볼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이삭 루리아의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거부했다. 그것은 그가 루리아와 달리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는 신적 광선을 재결합시켜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시디즘은 실망과 좌절에 빠진 유대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하시디즘에 귀의한 사람중 상당수가 과거에 샤베타이를 메시아로 믿던 자들이었다. 베쉬트는 그의 제자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계율(미츠바)이란 말은 인간과 신을 묶어 주는 하나의 유대적 끈이다. 한 사람이 율법을 준수시 자기와 주변의 존재속의 신적 광채를 재결합함으로써 자신을 신과 합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베쉬트는 계율실천을 요구해온 율법에 신비주의적 수도의 중요성을 결합시켰다. 이들의 구원 실현을 위한 신적 광선보호주장이 기이한 현상을 연출하기도 하나 이는 현실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시도한 종교

적 노력이었다.


베쉬트는 스피노자나 일부 급진적 기독교인과 달리 세계 내 모든 것이 신이라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이 신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신은 만물에 생명과 존재를 부여하는 근원적 힘이었지 만물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는 소수의 지식인만이 이해할수 있는 난해한 비의적 원리를 부정하고 신비주의원리에 대한 문자적 이해도 거부했다. 


하시딤은 독자적인 성육신사상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하시디즘적 랍비인 자딕이 하늘과 땅을 잇고 신적 임재를 대표하는 성육신한 신으로 숭배됨으로써 비롯되었다. 하시드(경건한 자)는 기독교인이 신과 가까워지고자 예수를 모방하듯이 신에게 올라갔던 자딕을 닮고자 노력했다. 하시딤은 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딕의 모범을 따르고자 했다. 587


1780년대 잘만은 신비주의를 합리적 명상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하시디즘을 창시했다. 그것은 신의 세 속성(지혜 지성 지식)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하비드로 알려졌다. 하바드유대인은 신체험을 위한 이성능력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계몽의 사상가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적 명상수도를 강조한 점은 계몽주의자들과 다르다. 잘만은 누구나 신깨달음의 체험을 할수 있다고 믿었다. 하바드(신비주의 훈련)은 신비주의자 엘리트를 우한 것이 아니었다.


**부버**


한편 무슬림과 유대인은 20세기에 맞는 신개념정립을 위해 과거로 눈을 돌렸다. 이스람신학자 아쟈드는 어느 존재와도 견줄 수 없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마르틴 부버는 유대신앙을 원형적 통일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역동적 영적과정으로 해석햇다. 그는 종교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전하는 것과 같이 인격체신을 만나는 것으로 보고 신의 현존을 계시하는 것이 나와 너의 영역이라고 본다. 그는 토라를 신과 나와의 관계의 핵심인 자유와 자발성을 박탈하는 율법강요자일 뿐이라고 본다. 이처럼 부버는 전통 유대교의 가치를 거부하고 율법의 중요성을 무시했기에 기독교인에게 더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아브라함 요슈아헤셀은 부버와 달리 미츠바(계율)가 인간이 아닌 신의 필요를충족시키는 행위를 뜻하므로 유대인이 현대사회의 비인간적 참상에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돕는다고 믿었다. 그는 현대인은 비인간화와 착취로 점철되고 신조차 인간의 욕망을우해 조작 남용되며 종교는 이간삶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따라서 인간삶의 저변구조를 숙고하고 신에 대한 본원적 경외감과 신비감을 회복시켜줄 심층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에 대한 신앙은 이성적 개념과 무관한 직관적 체험에서 솟아나오므로 논리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함은 무의미하며 계율은 신의 현존안에 인간이 거하도록 훈련시키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계율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부버는 신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필적할만한 탄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하면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이라는 말을 정화시킬 수도 없고 교정할수도 없다. 아무리 때가 묻고 흠이 났다 할지라고 우리는 그것을 집어들어 애통의 시간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부버는 다른 합리주의자와 달리 신화를 거부하지  않고 세계 내에 신적 광채가 산재해 있음을 표현한 루리아의 신화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부버가 성서와 하시디즘에서 출발했다면 아브라함 요슈아헤셀은 랍비와 탈무드 정신에서 출발했다.


그는 현대 인간은 비인간화와 착취로 점철되고 신도 인간 욕망을 위해 조작 되는 사물로 전락했으며 종교는 힘을 잃고 인간삶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인간삶의 저변구조를 숙고하고 신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회복시켜줄 심층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에 대한 신앙은 직관적 체험에서 솟아나오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유대인은 비유적으로 경전으로 읽음으로써 거룩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계율은 세속 삶 속에서 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예술 작품처럼 독자적 논리와 리듬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시오니즘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던 산으로 예루살렘을 상징.

다윈의 전화론을 잘못 해석해서 생긴 19세기 극단적 인종차별이론과 19세기 후반 유대인이 거둔 경제와 직업상의 성공 때문에 유럽에선 새로운 반 유대주의가 생겨났다. 그래서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 독일의 혹독한 유대인 배척주의, 프랑스의 드레프스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은 팔레스틴에 자신들의 새 국가를건설하는 것만이 유대인의 안전을 도모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견해의 결정판이 헤르츨이 1896년 출간한 <유대국가>라는 책이었으며 이 자극으로 생긴 시오니즘이라는 유대인 운동이 세계주목을 받게 되었다.


1897년 50년 안에 유대국가가 실현될 것이라 예언하면서 바젤에서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했던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르 헤르츨이었다. 그는 팔레스니나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아래 1897년 바젤에서 1차 시오니즘 세계대회를 열었다.


그는 종교적인 감상이 아닌 현대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그는 종교적 차원을 모두 무시하고 경제적 요인들과 사회적 요인을 강조했다. 현대 반셈족주의는 유대인들의 해방운동에서 싹튼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만 둘수 없었다. 고통은 유대인들의 응집력을 증가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샤바타이운동은 시오니즘 이전의 국제 운동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시오니즘이 실현된 이래 유대인 사회 전체에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운동도 없었다.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인 현대 시오니즘은 서양의 낭만적인 민족주의와 동양 유대인의 신앙심이 겨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운동의 거장들은 서양인들이었으나 그 추종집단은 동양에 있었다.


이 두 운동은 어떤 차이가 있나? 샤바타이 운동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이었다. 거기선 정교한 신학적 언어와 카발라의 용어들로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샤바타이 체비는 메시아였고 신성 그 자체내의 긴장으로 생겨난 형이상학적 드러마 속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시오니즘은 세상적이고 실천적이며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정치적 용어들로 통용되었다. 또 시오니즘에선 유대인의 문제를 새 신비적 메시아를 받아들이고 그를 믿어야 한다든지 혹은 속죄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죄의 문제가 아닌 사회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과 동일시했다. 비로 시오니즘에서 고대 성서의 메시아론이나 유대적 메시아니즘의 사상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헤르츨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었다.


1차 대전 중 발표된 발포아 선언에는 팔레스틴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일을 영국 정부는 찬성하며 이런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에 의해 시오니즘의 정치적 지위가 하루밤 사이에 변경되었다. 수천의 유대인은 그후 20년 동안 팔레스틴으로 이주하여 영국 정부의 보호아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토대를 닦았다. 중부 유럽에서 자행된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과 2차대전으로 인한 유대인 난민문제로 인해 유대인의 독립국가 건설은 더욱 촉진되었다. 국제 연합은 1947년 팔레스틴을 분할하고 유대국가를 승인했는데 이 새국가가 이스라엘이다.


<신관>


스미스는 비서양적 콘텍스트안에서 종교에 대해 말한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힌두교란 힌두문화로 ...정확히 구분지어 놓는 서양문화의 용어들 속에서나 공식화되는 현대서구의 개념이며 동일한 것이 유대교에도 적용될수 있다고 말한다. 또 비서구 사회에서는 종교라는 것은 없고 단지 문화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결론내린다.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유대인문제중 상당수는 이같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성서적 종교로서 기원전 2000년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성서의 종교이다. 다른 하나는 랍비적 종교로 예루살렘이 로마에 침입당한 뒤의 유태교의 종교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컬트를 중심으로 했던 전통이 무너지고 자기들 회당에서 율법과 랍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이다. 여기서 핵심은 탈무드이다.


이스라엘은 고대 중동에 새로운 사상인 유일신 사상을 전개하였다. 이 사상은 기독교 이슬람에도 큰 영향을 준 세계관이다. 이는 자연의 여러 다신교 사상의 페턴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자연 그 자체는 신이 아니며 오직 피조물일 뿐이며 이는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신의 피조물로 탈세속화되었다.


이로서 인간의 위치가 높아졌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제한된 자유로 자연에 책임을 진 존재가 된 것이다. 고대인들은 자연을 신적 우주로 보았으나 이렇게 자연주의적 신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자연은 성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여러 자연의 징후들 번개 천둥 연기 지진 등은 단지 신을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이다.


또한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느님이외에 어떤 신도 부정했다. 더 나아가 야훼란 말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했고 쓰고도 읽지 않았다. 또 절대적인 것을 형상화시켜 제한시키는 것을 절대 금했고 우상타파를 강조했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인습타파 우상타파의 역사였다. 인류 최초의 종교비판이었다. 그래서 거짓신과 참된 신의 논쟁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잘 드러난 것이 바알(농경신)과의 대결이다. 유일신 사상의 비관용성과 독단성이 여기서 나오고 상대적인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자유를 얻는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야훼사상은 민족신 성격을 초월한 보편성을 띠었다.-<민족신을 초월>

출애급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이집트 역사에도 관여하시고 북이스라엘을 붕괴시키는 등 여러 민족 나아가 세계사를 관장하는 분으로 여겼다.

 

<윤리적 초월적 신>-ethical monotheism


 민족신의 성격을 띠면서도 이스라엘 혈통이나 조상의 신이 아니라 윤리를 바탕으로 한 신이다. 이 윤리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아모스 예레미아 등에서의 정의와 사랑이 대표적인 테마이다. 이같이 신의 유일성, 초월성, 초자연성은 자연주의적 다신교전통 속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2. 인간관


이스라엘 종교의 특징은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였고 인식하였느냐 자연을 통해서 신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특징을 지닌다. 즉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체험된 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점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물론 창세기 신화도 있다. 그러나 이를 빼고는 모두 역사적인 신이다. 즉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그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을 인식한 것으로 철학자들의 사변적인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파괴된 성전을 복구하고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엄격한 규율을 따랐다. 이것이 토라이다. 토라는 모세오경을 함께 묶은 것으로 그들은 이를 자기들의 성서로 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비극을 반성하고 결코 야훼의 명의를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것은 에즈라, 느헤미야에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율법을 자기들의 기반으로 삼는데 모세오경을 기초로 한 것이다.


<고전 유대교의 신화의 구조>


유대교의 특징은 무엇으로 표현가능할까? 지적인 신학적 율법적 저서를 제외하면 우리 기준에 잘 맞는 종교적 자료는 예배의식이다. 기도와 그 관련 의례를 통해 전달되는 신화들은 보편적인 것으로 유대교 역사상 어디나 존재했다. 즉 기도문은 유대인의 신화구조를 가장 분명하고 신뢰할만한 증거를 제공한다.


유대인은 하느님을 아침 저녁으로 감사 찬양함으로써 세상의 자연적 질서에 응답한다. 그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은총은 토라를 이해하는 능력과 그것을 공부하려는 의지이다. 토라를 향해 인간의 눈이 뜨이고 계명을 향해 마음이 열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특히 하느님과 유대인과의 관계의 표시이다. 이스라엘은 토라로 인해 하느님께 가까이 있으며 그들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토라를 행하고 토라에 귀기울이겠다는 하느님 편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겠다는 약속인 시나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은 자연계의 사건을 통해 상기되고 사람의 행위 신앙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그들은 태초의 창조사건, 홍해의 구원, 시나이의 계시들이 언제나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신화적 측면에서 세상사를 파악한다.  즉 유대인은 이러한 신화적 구조안에서 살고 따라서 창세로부터 마지막 구원에 이르는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관을 지닌 평범한 자연인이다.


예루살렘


유대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현세의 경험은 BC 586년 첫번째 성전의 파괴와 약 반세기 지난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자기 땅으로 귀환하게 된 일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은 이를 하느님께서 자신을 벌하셨으나 속죄하자 구원하셨다고 믿었다. 그 이래로 유대인들은 죄 심판속죄 화해 회복이라는 범례 안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왔다. 


그들에게 구원은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모세가 갈대 바다를 지나 그 백성을 이끌어냈을 때의 일 제2성전이 세워져 시온으로 귀향하면서의 일 하느님이 다시 시온에 빛을 비추시고 흩어진 백성을 그들 고국으로 불러올 때의 일을 말한다. 고전유대교가 갖고 있던 땅에 대한 신성시 시온을 향한 갈망 예루살렘과 성전의례의 회복에 대한 소망 이 모든 것들은 과거 구원을 미래에 반영하는 상징들이다.


<카르다조>


유대교 신앙의 역사적 부가물을 벗겨내어 오직 경전에만 근거한 순수한 형태의 신앙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영지주의자의 반유대주의적 신개념을 바꿔 해석했다. 그는 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한 신과 보통 사람에게 계시한 신으로 나누었다.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원인이고 전자는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이스라엘을 구원할 신이다. 이 두성격의 신이 어떻게 유기적 관계를 가질수 있는가?


카르다조는 유대교에서 우상숭배로 금지해온 삼위일체론을 신해석에 수용함으로써 유대인에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샤베타이 제비가 메시아였을 뿐 아니라 신의 성육신이라 믿었다. 이 신앙은 서서해 발전해서 그는 구원의 역사가 신성한 자인 샤베타이가 자신을 들어올려 하늘위 본원적 신에게로 복귀함을 상징하는 그의 이슬람 개종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는 샤베타이가 본원적 신의 두 번째 파르주프인 이스라엘의 신이라 말함으로써 그를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성자 예수와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은 카르다조의 이런 삼위일체론적 샤베타이 해석을 발전시켜 이스라엘신이 샤베타이를 통해 성육신했다고 믿기 시작했다.


<야곱프랑크>


그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카발라에 근거한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샤베타이주의자의 삼위일체의 세가지 파르즈핌 각각이 지상에서 다른 메시야로 대표된다고 믿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을 신이 성육신한 존재라고 자부한 그는 유대교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인물로서 자신의 무교육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그는 과거전통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즉 그는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 예수와 샤베타이처럼 죄와악의 심연으로 내려와야 하지만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율법과 관습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다. 즉 그동안 신성시해온 모든 율법을 파괴하는 죄악의 심연을 향한 하강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음 말을 통해 주장했다. 


“구원의 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종교를 파괴하라 그대의 자유를 억압해 구원의 길을 막는 종교를 파괴하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의 어두운 비전과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연결을 느낄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