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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사회에서 선교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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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정보2013.8월호.hwp (37.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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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사회에서 선교는 가능한가?
최현민(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원장)
가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문(Nostra Aetate)을 발표한지 어언 50어년이 흘렀다. 그런데 과연 이 선언문을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가톨릭 교회는 이 선언문을 통해 여러 종교의 종교 체험을 인정하고 보편적 사랑 안에서 이들과 유대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린 대화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곧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 각 종교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인류 공동선을 위해 상호 협력할 것을 희망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독특한 다종교문화를 지니고 있다. 위의 선언문은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종교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인과 불자의 종교인구가 비슷하다는 점은 한국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도 이웃종교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지금까지 양 종교간에 큰 불협화음없이 잘 지내왔다. 물론 얼마전 봉은사 땅밟기’ 와 같은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데 사실 한국사회가 종교적 평화를 유지해온 것이 이웃종교를 깊이 이해해서라기보다 다른 비종교적 사회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서로 다른 종교인들 간에 평화적 공존이 가능한 것은 쌍방 간에 종교적으로 깊이 이해해서라기보다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지녔을지라도 혈맥 학맥 인맥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문제를 비롯하여 종교적 대화를 할 때 상대를 신앙으로 존중하기보다 비난하기가 쉽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웃종교를 실제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과연 복음선포나 선교는 가능한 것인지도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먼저 이웃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방식들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태도로는 크게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인들 중에 다른 종교를 배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을 지닌 이들이 많다. 그들은 구원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만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타주의적 입장에 서면 종교간 대화는 어렵다. 이러한 배타주의를 극복하고자 나온 입장이 바로 '포괄주의'이다.
포괄주의적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울타리를 넓혀 다른 종교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구원이 가능하다. 그것은 비록 다른 신앙을 갖고 살아 가더라도 이웃종교인들도 넓게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이나 알라신을 모시고 살더라도 그들이 믿어온 실재는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알면 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굳이 개종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칼 라너는 이웃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를 바라보는 신학적 시각에도 변화를 주었다. 즉 포괄주의자들은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만 보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모든 진리가 예수 안에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웃종교의 진리도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 포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도 삶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괄주의에도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건 바로 이웃 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른다는 점때문이다. 이는 이웃종교인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종교 곧 그리스도교의 틀 안으로 집어 넣으려 하는데 있다. 이는 이웃종교인들을 그리스도교 테두리만 넓혀 그 안에 포괄시켜놓고 자기만족을 하려는 것이지, 타자를 있는 그대로 타자로서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따라서 이웃종교인들은 자신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불자들은 자신을 불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괄주의적 입장이 지닌 한계에서 나온 것이 다원주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종교의 다양성과 균등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각자가 지닌 신앙의 길을 가면서도 각자의 믿음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는 바로 이러한 다원주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다원주의적 입장과 그 한계
포괄주의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면, 다원주의는 ‘하느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포괄주의적 입장에서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긴 해도, 궁극적인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틀 속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원주의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괄호 속에 넣고 신중심의 신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God)'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의 실재를 넘어서 이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제3의 궁극적인 실재를 상정한다.
이와 같이 종교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공통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다원주의자들은 인류의 모든 종교가 실재 혹은 신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고 이런 실재를 자신의 문화적 틀에 따라 표현하는 양식이 다를 뿐, 뿌리는 하나라고 본다. 불교에는 유일신사상이 없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세계도 결국 그리스도교적 궁극적 실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서의 궁극적인 실재이라 할 수 있는 ‘공(空)’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존 휙(John Hick)은 ‘그리스도’ 중심인 포괄주의 입장에서 ‘하느님’ 중심인 다원주의로 나아감은 마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감행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종전에 각 종교의 입장이 천동설의 경우처럼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사고해왔는데,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위성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자들은 자종교 중심의 신학에서 궁극적 실재라는 공통분모 중심의 신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 각 종교 전통의 공통근거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일종의 종교적 메타이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궁극적 실재를 하나로 보는 이 전제 (혹은 가설)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또 만일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니고 살아도 끝에 가서 같은 구원에 이른다면, 각자의 신앙만 갖고 살아가면 되지 굳이 다른 종교를 알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볼 때 다원주의는 이웃종교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원주의는 자기 종교의 열정이나 헌신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어느 신앙을 가져도 결국 같은 실재이고 같은 구원이라면 굳이 한 종교에 열성적일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고유성'을 희석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이슬람에서는 ‘코란’과 같이 각 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부분에 신자들이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3. 종교다원사회에서의 복음선포
마크하임(Mark Heim)은 신중심적 다원주의가 지닌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새로운 시각을 펼쳤다. 그는『구원들(Salvations)』이라는 책에서 한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세 가지의 입장을 다 가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의 세 가지를 각 상황에 따라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종교에 헌신할 때는 다원주의적 입장에 서기가 어렵다. 자기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지니지 않고서는 특정 종교의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그리스도신자라면 그에 대한 배타적 헌신이 필요하다. 아울러 상대가 자기 신앙의 진리 안에서 헌신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를 억지로 그리스도신앙을 갖도록 하기보다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종교에 배타적인 헌신을 하듯 상대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웃 종교인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이는 전통적 배타주의와는 다르다.
둘째 포괄주의적 태도는 토착화작업에 필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인이고 동북아시아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종교문화를 이해함이 우리 신앙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준다고 본다. 필자는 불교를 20여년 공부하고 가르쳐오면서 내 자신의 신앙이 넓고 깊어짐을 체험해오고 있다. 불교라는 이웃종교전통을 통해 나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조명하면서 불교를 알기 이전보다 나 자신의 신앙의 폭이 깊고 넓어짐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학문적으로 종교 연구를 할 때에는 다원주의적 입장이 필요하다. 학문적 입장에 서서 종교간 대화를 할 때에는 객관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앙으로 다른 종교의 교의를 바라볼 때 자칫 자기 주관적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객관적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다른 종교를 접할 때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입장을 공유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웃종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건 좋은데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16,15)라는 복음선포와 선교의 의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우리는 자기종교에 대한 배타적 헌신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선교에 대한 입장은 바로 이러한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복음선포를 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신앙의 확신과 헌신적인 삶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확신을 지닌다면 자신이 믿는 바를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자신의 그 자각과 체험을 이웃과 나누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복음선포 전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기신앙의 확고함이며 그 확고함이 이웃 사랑에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확고함과 사랑의 헌신적 실천이 있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 자체가 복음선포가 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복음선포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삶을 살 때 가능하리라 본다. 내가 사랑을 살 때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보고 비로소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우리가 처해있는 상태가 어떠하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웃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이런 맥락에서 복음선포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네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리라 본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그리스도인을 만난다면 상대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선포는 우리네 삶의 자리부터 성찰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고린 5,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