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글엘리아데의 불교사해석 10.10.25
- 다음글<현대종교학담론> 10.10.25
아베마사오연구
페이지 정보

본문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의 대화’의 해석학적 고찰
-아베 마사오(阿部正雄)의 사상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제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는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세계는 국가단위가 아닌 하나가 되었고, 세계 역사 또한 단일 역사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는 일체화되어 가지만 그 안에는 다원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되어감과 다원성을 어떻게 조화시켜나갈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인류사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담당해온 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교는 이제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종교와 만나 그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요청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문제의식 속에서 역동적이고 통일된 조화를 달성키 위해 지난 30년간 세계종교들은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를 해오고 있다. 그 중 특히 세계종교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서로를 향해 각자의 지평을 열어놓고 대화함은 인류해방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토인비가 불교와 기독교 간의 만남에 관하여 말한 다음 글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쯤 뒤의 史家가 우리 세대에 관하여 기술한다면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史上 처음으로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깊이 침투하게 된 일에 훨씬 더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양종교 간의 만남을 통해 참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단순히 대상적으로 비교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서 서로의 신앙의 차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방법으로 타종교에 접근하느냐에 따라 같은 주제를 연구함에도 그 이해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필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만남이 참된 만남이 되려면 오늘날의 종교부정의 입장에 대응하는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反종교의 세력과 맞서 종교의 필요성을 다시금 재인식하는데 양종교의 만남이 절실히 요쳥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에 들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의 만남에 큰 기여를 한 선불교학자 아베 마사오(何部正雄, 1915- )에게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아베 마사오가 양종교 간의 만남을 위해 시도했던 면을 종교 대 반종교의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종교 간의 비교연구의 방법론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겠다. 여기서 필자는 아베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킴에 있어 그의 접근방식이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방법론과 가다머의 해석학적 방법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 고찰하기로 한다.
1. 객관주의적 입장
종교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교현상 자체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종교현상이 지닌 의미를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첫번째 접근방법은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종교심리학적 접근방식이며, 둘째는 종교사학과 종교현상학의 접근방식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각 종교가 지닌 여러 종교 현상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교연구하는 경우로 근세의 역사주의적 입장이 바로 이러한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근세의 역사주의적 입장이란 과거 역사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해 보려는 입장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지닌 모든 특수한 역사적 관점, 주관적 편견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접근 방식으로 종교현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다만 그 종교현상을 ‘설명’할 뿐이다. 이와 같은 설명의 차원에서 타종교를 물리적 대상처럼 순수한 인식 주체인 나로부터 확연히 구별하여 하나의 과학적 인식으로 삼는 방법론을 써서 종교를 연구한다면 종교 간의 만남은 한계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비교, 로고스와 道의 비교, 예수와 마호메트의 비교,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개념을 각각 비교한다고 가정할 때 연구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가능한 각 종교전통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교고찰한다면 이는 다만 각 종교전통에서 말하는 교의나 전통을 설명하는 차원에 머물 것이다. 지금까지 종교 간의 만남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많은 연구논문들은 이와 같은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각 종교를 비교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즉 이는 지금까지 각 종교전통에서 유사성을 찾아서 그것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택한 방법론은 객관주의적 입장에 서서 다분히 이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선상에 머물렀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연구들은 일단 타종교에 대해서 시선을 돌리고 그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종교간의 대화와 만남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에서 종교는 비인격적인 it가 되고 그 결과 여러 종교를 they로 논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둘째 ‘이해’의 관점에 대해서는 스트랭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에 의하면 종교연구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이해방식은 신앙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연구자의 올바른 태도는 연구자 자신이 他신앙인의 정신적, 감정적인 틀 속에 들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종교적 의미가 가능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개념들, 종교행위들, 조직화된 형태들이 문화적인 맥락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인간 실존의 심리적, 사회적, 물리적인 요소들과 연관되어지는지 연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이해의 측면에서 종교연구를 시도한 접근방법 중 하나가 종교현상학적 방법이다.
2. 종교현상학적 입장
하일러는 종교를 4층의 동심원으로 나누어 바깥에서부터 감각적 표상계, 정신적 표상계, 영적 체험계, 신성한 실재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내적 종교세계로 관통해 들어가는 연구로 보았는데 역사주의적 입장에서의 종교연구가 종교의 외적인 면을 다루었다면, 종교현상학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즉 종교현상학은 종교를 단순히 설명하려는 차원을 넘어서서 종교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으로써 이를 위해 종교현상학은 판단중지와 감정이입(형상직관)적 방법을 사용한다.
필자는 여기서 종교현상학적 방법론 중 판단중지가 본고에서 살피고자 한 종교간의 만남에서 문제가 된다고 본다. 종교현상학적 접근방식은 판단중지를 통해 자기 종교전통의 진리를 괄호 속에 넣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타종교를 만나고자 한다. 판단중지라는 방법론을 써서 자기 종교의 진리를 괄호에 넣고 타종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드러난 종교현상(외적 감각적인 부분)들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또한 타종교를 기술할 때 자기의 신앙을 거기에 적용시켜 기술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판단중지는 종교 간의 대화를 하는 출발점에서도 필요한 부분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 간의 대화는 그 만남이 깊이를 더해서 양종교간의 신앙적 차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종교 간의 대화가 수행될 때 진리에 대한 확신이나 대화의 주제가 되어야 할 본질적인 부분을 괄호에 묶어두거나 대화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방법적인 오류일 것이다. 파니카는 이런 관점에서 종교현상학이 지닌 판단중지가 종교 간의 대화에 장애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종교 간의 만남이 단순한 교리적인 토론 이상의 것이 되려면, 곧 종교간의 대화가 인간 존재 자체와의 인격적 만남이라면 판단중지는 심리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본다. 즉 나의 실존의 근거이며 뿌리라고 믿는 진리를 저만치에 접어두고 그 밖의 것들만으로 이루어진 대화가 참된 대화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궁극적인 확신을 -만일 이 확신이 종교적 성격의 것일 경우 그것은 궁극적이다-괄호로 묶어 놓을 수는 없다. 궁극적인 확신을 괄호 속에 넣은 대화는 빈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종교적 신앙의 깊이에서 상대방이 갖고 있는 똑같은 종교적 깊이를 향해 나아갈 때 참된 종교간의 대화는 가능해진다고 본다. 상대방의 신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의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신앙 안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옆으로 제쳐놓는다면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종교현상학적 접근방법, 즉 종교적 현상 그 자체만을 말하고, 종교적 현상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대상(객체) 지향적인 방법론을 비판했다. 스미스에 의하면 종교연구는 종교적 사람과 그들의 신앙에 대한 연구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주체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 기초를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3.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입장
종교현상학적 접근 방법은 종교의 역사성을 무시하게 되며, 같은 신앙을 갖고 있더라도 각자에 따라 다르고 한 개인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다른 개별적인 신앙을 무시하게 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스미스는 지적한다.
종교현상학적 방법론이 지닌 한계를 의식한 스미스는 역사학적 종교연구방법과 인격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여 종교를 연구했다. 그가 사용한 역사적 종교연구방법론은 지금까지 서구 역사가들이 종교를 연구해왔던 것과는 다르다. 지금까지의 역사가들은 초월의 문제를 괄호에 넣어 버리고 역사를 기술해 왔다. 스미스는 종교의 초월의 문제를 배제시킨 채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종교를 이해하게 될 때 종교의 물상화(reification)가 일어난다고 봄으로써 종래의 역사학적 방법론을 비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한 역사적 종교연구는 초월까지도 역사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는 종교를 총체적으로 연구하게 되며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종교적 연구’(religious study of religion)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럼 스미스가 제시한 역사 안에서 초월까지도 포함한 종교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미스에 의하면 종교의 축적된 전통은 인간을 떠나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그 종교를 신앙하는 자가 있을 때 전통 안에서의 종교현상들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사람을 떠나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종교현상인 것은 없다는 말이다. 한 종교현상이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현상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종교현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종교현상이게끔 만드는가? 그 종교현상을 종교현상으로 보는 이의 ‘신앙’이다. 즉 신앙을 가진 이에게 종교현상은 초월의 세계를 드러내는 상징으로써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종교현상학에서는 종교현상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등한시해 왔다. 스미스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신앙의 인격적 측면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즉 스미스에게 있어 신앙은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인간의 자질이고 자신과 이웃, 우주에 대한 인격성의 총체적 응답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측면, 즉 어떤 주어진 형태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자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미스에게 있어 종교연구는 축적된 전통을 통해 그 안에 내재된 신앙인들의 삶의 의미를 읽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스미스의 관점은 타종교와의 만남이 축적된 종교전통의 선상에서가 아니라 축적된 전통을 종교적인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주는 바로 그 전통을 신앙하는 이들의 신앙 그 자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앙을 배제한 전통만의 비교나 만남은 핵심이 빠져버린 빈껍질, 외형적인 만남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차원에서 내면의 깊은 실존적인 만남이 가능해질 때 진정한 대화의 장이 열릴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스미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그로 하여금 인류 종교사를 단일성과 일관성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종교사를 단수인 ‘History of Religion’로 보게 했다. 그에게 있어 지구상의 모든 종교전통은 사실상 다른 전통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되었지 고립되어 존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즉 스미스는 종교를 정적인 조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한정되고 고정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역사적 발전 안에서 종교적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종교학이 종교체험을 무시하고 종교전통만을 강조하고 사람의 내면세계를 무시하는 객관주의를 극복했지만 그 또한 객관주의적 인식론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즉 그는 종교를 주체로 봄으로써 종래의 객관주의를 극복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그 자신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객관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이해를 추구해도 저 사람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의 전통과 자기의 언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인식의 추구는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정직한 시도를 했다고 본다.
4. 가다머의 해석학적 입장
앞서 스미스의 접근방식의 한계는 딜타이의 객관주의적 인식론이 지닌 한계 바로 그것이다. 딜타이의 해석학은 데카르트나 칸트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을 모든 지식의 모델로 간주한 종래의 인식론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객관주의적 인식의 틀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틸타이의 객관주의적 인식모델을 극복하고 나선 이가 가다머이다.
1) 이해에 대한 관점
가다머는 자기 주저인 「진리와 방법」에서 해석학이 어떻게 과학의 객관성 으로부터 해방되어 이해의 역사성에 부응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음으로써 인문과학을 방법론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시도한다. 방법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진리의 실천성과 일상성과 역사성을 발견하는데 있어 가다머는 훗설에게서 ‘현상학적 기술의 솔직성’ 딜타이로부터 ‘역사적 지평의 광활성’ 하이데거로부터 이 양자의 착상을 현존재의 사실성과 연관시켜 전개한 존재론적 이해착상의 주요한 정신사적인 유산으로 받아들인다.
가다머가 하이데거로부터 물려받은 해석학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은 현존재의 해석학으로 그것의 핵심은 인간을 선험적인 주관적 순수의식으로 파악하지 않고 세계내 존재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세계내 존재라고 볼 때 여기서의 세계란 자연환경으로서의 우주이거나 주관적 자아와 대립되어 있는 객관적 실재세계가 아니라 주관이나 객관을 앞서 있는 어떤 것이다. 즉 세계란 우리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의미가 그 안에서 이해되고 생성되는 삶의 그물망이며 이해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삶의 존재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세계를 자기 밖의 단순한 주위환경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 자체가 바로 그 세계에 의해서, 세계 안에서, 세계를 통해 형성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을 세계내 존재로 파악함은 근대철학의 주체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을 철저히 시간성, 역사성, 과정성, 관계성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체로서의 인간 속에 역사가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에 속한 것이다. 즉 역사는 이제 인간 밖에 있는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 자체가 바로 그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다머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가다머에게서 인간의 역사성과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시아인으로서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접하게 된 사람은 자신의 역사와 전통 내에서 서구로부터 들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진리를 접하게 될 때 그 이전에 내 안에 형성되어 있는 그 진리관 안에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그전의 나의 진리가 새로운 변형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됨을 의미한다. 즉 이는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수용한다고 할 때 우리 안의 先판단, 前이해, 선입관의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無전제, 즉 백지상태로부터의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서의 이해란 前체험들이 새로운 진리를 접하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방법에 의해 진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가 스스로 인간의 해석학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진리의 은폐성이 벗어지면서 실재는 투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현존재는 역사적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명제에 따라 사람의 존재방식을 역사성이라는 개념을 갖고서 근본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즉 가다머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 밖에 있는 한 기점을 설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신의 이해가 현재 자신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이해임을 직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써 이해는 주관에 대립하여 있는 이해자의 일반적 구조가 아닌 해석학적 순환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가다머의 시각은 현대가 만들어 낸 하나의 신화이자 우상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재검토를 제안하고 방법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과학적 방법의 통제영역을 넘어서는 지식의 가능성과 정당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 즉 그의 해석학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실재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2) 진리에 대한 이해
진리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과 이해에 드러나는가에 대한 물음은 철학적 해석학에서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서구의 형이상학은 진리의 문제를 존재에까지 파고 들어가 이해하지 않았기에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서구의 인식론적 문제가 지닌 헛점을 직시하고 진리를 존재에 근거지우고 존재로부터 이해하고자 했다.
하이데거의 결정적인 영향 하에 있던 가다머 역시 진리를 존재적 측면으로 파악했다. 즉 가다머는 진리를 더 이상 인식론적 관점에서 관찰하지 않고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관한 존재론적 입장에서 파악한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해석학의 문제는 방법이라는 개념이 현대과학에 부여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번역함은 단순한 과학적 관심이 아니라 분명히 총체적 인간의 세계 경험의 일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가다머에 있어 해석학적 현상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이다. 즉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학은 단순히 텍스트나 전통을 정확히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과 세계와 존재 안에 깃든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인 것이다.
가다머에게 있어 진리이해는 현존재 자체의 구체적 사실성에서 출발한다. 즉 구체적 사실의 실존적 구조는 선험적으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다머는 진리를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가다머는 일단 헤겔이 제시한 역사의 진리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헤겔의 진리 주장의 근거에다 해석학적 변형을 가한다. 그것은 진리가 정신의 역사적 표현에 있다기보다 역사와 현재 사이의 매개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가다머에게 있어 진리란 역사와 현재 사이의 매개를 통한 역사의 현재 관련성 속에서 이해되어야지 헤겔처럼 신의 모습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역사 속에 있으며, 역사성은 진리의 원천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다머에게 있어 진리에 접근하는 길은 사람의 주관의도가 지배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역사와 현재의 나 사이에 묻고 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변증법의 길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변증법적 사고는 헤겔처럼 상호이율배반적인 실체가 의식의 객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지평과 현재지평 사이의 지평융합의 사건을 의미한 것이다. 해석학적 경험의 변증법적 구조는 모든 참된 대화의 질문, 대답과 구조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가다머는 이해에 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을 대화론적 해석학으로 발전시켜 전개했다. 그것은 진리란 사변에 의해서 간단하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담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진리경험은 담화 속에서만 가능하며 담화의 과정은 그 자체가 진리경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가다머의 대화론적 해석학을 종교 간의 만남에 적용시킨다면 자기 종교전통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 간에 변증법적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해의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3) 선입견, 전통, 권위에 대한 가다머의 사상
가다머에게 있어 진리추구는 역사와 전통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가다머에 의하면 선입관을 말한다. 즉 역사는 선입견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래로 선입견이라는 개념은 상황을 결정하는 모든 요소들이 최종적으로 음미되기 전에 주어진 판단, 잠정적 내지 예비적 판단으로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가다머는 이와 대조적으로 선입견에 긍정적이고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선입견은 전제 없는 이성의 상대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유한한 역사적 성격에 관련된 이해의 구성 요소인 것이다. 선입견에 대한 선입견은 권위에 대한 선입견에 뿌리박혀 있다. 계몽주의 이래로 권위와 맹목적 복종 사이에 혼동이 일어났다. 가다머는 맹목적 복종은 권위의 본질이 아니라고 천명한다. 그가 말한 권위란 하버마스가 비판하는 것처럼 ‘명령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진리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바로 전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와 같이 전통이나 권위이기 때문에 모든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통과 권위를 역사적 이성의 이해조건으로 복권시킨다. 가다머는 선입견, 전통과 권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계몽주의가 은폐한 이 세 가지 현상(선입견, 전통, 권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전제로써의 전통과 전승과 권위 속에서 살아가므로 전통은 이해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전통은 우리의 사고 밖에 서 있는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사고하는 사고의 지평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가다머는 그의 해석학에 있어서 전통의 요소에 정당한 원리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여 우리가 늘 전통 중에 있고 전통에 속한다 라는 것을 ‘해석학적인 제약’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해의 조건으로서의 전통개념에서 ‘전제없는 해석은 있을 수 없다’라는 가다머의 해석학적인 원리가 나온다. 즉 우리는 어떤 전제(선입견)도 없이 아무리 이해를 추구해도 저 사람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즉 객관적인 인식추구는 불가능한 것이다.
4.영향사 의식
가다머에 의하면 역사적인 사고는 역사적인 객관이라는 환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영향사’(影響史)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영향사 의식이란 우리의 행위와 사고가 역사적 전승과 그것의 영향에 귀속된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을 말한다. 이는 역사가 한갖 지나간 과거의 사장물(死藏物)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살아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향사 의식은 전통을 향한 개방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영향사적 의식 하에서 종교전통을 연구함은 우리가 타종교전통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적인 작용과 영향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런 해석학적 상황 혹은 체험 즉 대화 속에서의 전통과의 만남을 달리 ‘지평의 융합’이라 부른다. (각주)
“현재의 지평은 과거가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현재의 소외된 지평이 있을 수 없듯이 역사적 지평 또한 그렇다. 이해란 우리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지평들의 융합이다....전통 안에서 이러한 융합의 과정은 항상 계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옛 것과 새 것이 서로를 완전하게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살아있는 가치를 조성하게 위해서 끊임없이 함께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지평은 닫혀 있거나 폐쇄되어 있지 않고 해석자가 움직이는데 따라 움직인다. 나의 지평이라는 것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 고정물이 아니라 항상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나와 대상, 이해의 주체와 객체, 현재의 지평과 과거의 지평이 모두 유동적이고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해는 이상의 것들 사이의 지평융합이 일어날 때 수행된다. 이것이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의 융합이 뜻하는 것이요, 이러한 지평의 융합을 통해서 나와 타자의 특수성을 극복되고 하나의 더 높은 일반성으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이 지평융합 과정은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람이 실망과 좌절을 통해 자기 존재의 유한성을 체험하듯이 자기 종교 안에서 부정적인 면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즉 모든 특수한 상황에서 새롭게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본 가다머의 텍스트 이해에서처럼 타종교를 만나면서 그 안에서 다시 자기 종교에 대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종교를 이해하는 상황이 타종교와의 접점을 통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타종교를 연구자 자신의 반성적 투영 속에 갇혀 놓는 것이 아니라, 그외 구체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타종교를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가다머의 ‘영향사 의식’인 것이다. 이는 지배하기 보다 경청하려는 것이고 타자에 의해 수정되고자 하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이다.
이상에서 본 가다머의 해석학의 지평융합이론은 종교 간의 심층적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류정신사의 창조적 변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해석학으로 생각된다. 이 해석학적 입장에 입각하여 불교와 그리스도 만남의 문제와 관련된 아베 마사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5.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의 해석학적 고찰
1) 아베 마사오의 문제의식
아베에 의하면 오늘날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만남은 단순히 양종교가 전통적 입장에서 만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과의 대결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현대에서의 종교 부정의 입장, 즉 과학주의 및 니힐리즘은 제각기 철학적 기초에 입각하여 종교가 가지고 있는 초월성의 측면을 부정하고 그것을 과학적 합리성이라든가, 역사법칙이라든가, 힘에의 의지라든가 하는 역사에 내재하는 원리 속에 환원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다룰 때 종교자체의 본질, 종교자체의 존재이유에 정면도전하는 종교부정의 입장을 간과할 수 없다고 아베는 말한다. 이와 같이 아베는 양종교 간의 만남의 필요성을 세계의 다원화 현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확고한 철학적 기반 아래 종교의 본질 및 종교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나선 입장에 대한 대응책으로 종교의 존재자체의 당위성을 다시금 숙고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베는 ‘오늘의 문제로서 불교와 기독교’를 단순히 불교 대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대 종교부정의 입장과 결부시켜 종교철학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아베의 연구가 종교대 비종교 간의 대립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적 방법론이 자기자신의 신앙을 건 실존적인 고찰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틸리히는 ‘세계종교들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우리 시대의 유사종교들에 촛점을 맞추었다. 아베는 이러한 틸리히의 입장이 자기 신앙과의 실존적 만남이라기보다 역사문화적 관점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아베는 틸리히를 관찰적 참여자의 입장이라고 보고, 이러한 입장에서는 종교를 실존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베에게 있어 참된 세계 종교들의 만남은 유사종교보다 우리 시대의 반종교적 세력과의 만남에 있기 때문에 관찰적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관찰적 참여자의 입장의 경우 어떤 철학적 기초 위에서 종교의 존재이유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반종교적 세력의 공격에 대한 실존적 차원에서의 종교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베는 자신을 거는 실존적 자기 모험의 참여자가 될 때 오늘날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의 참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베는 불교와 기독교를 대상적으로 비교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 양종교를 비교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아베의 접근방식은 앞서 살펴본 해석학적 방법론을 전제하고 있다. 즉 오늘의 시대적 지평-종교 대 종교부정의 양립현상, 세속화 현상에 대한 종교적 해답-에서 양종교 전통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지평의 융합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만일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종교의 타당성을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당연히 받아들인 것을 전제하고 이루어진다면 현대의 모든 종교들이 직면한 위기의 핵심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아베는 지적한다.
2) 양종교에 대한 아베의 접근방식
아베는 니힐리즘과 과학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에서 2가지 의미를 들고 있다. 그 하나는 하느님의 세계창조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절대성,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초월성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가 無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하느님과는 다른 피조물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다른 현실은 인간과 세계의 허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 속에 내포된 의미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성과 피조물로서의 세계 및 인간의 허무성이라는 것이다.
아베는 이러한 기독교의 신관념은 근대과학의 합리성의 입장이나 신까지도 부정하여 신없는 허무를 견디려 하는 니힐리즘의 주체적인 부정성의 입장 앞에서 심각한 문제를 느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지닌 초월성과 절대성은 피조물인 인간과는 구별되는 절대타자로서 지닌 하느님의 본성이므로 이와같은 하느님 개념으로는 일체를 기계론적으로 파악하려는 근대과학과 능동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베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종교부정의 입장과 대응할 수 있는 것으로 케노시스적 하느님 개념을 제시한다.
아베가 케노시스적 하느님이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절대무로서의 케노시스적 하느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날의 무신론과 니힐리즘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를 갖도록 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기비움 곧 절대무로서 드러난 하느님은 결국 사랑 그자체이신 하느님일 수 밖에 없고 그런 하느님 앞에서 모든 존재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베는 이러한 케노시스적 하느님 개념이 앞서 말한 창조론에서의 하느님의 절대적 하나됨을 극복하고 절대무를 실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고 보고 케노시스적 하느님 개념을 통한 절대무의 실현이야말로 종교부정의 입장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아베는 케노시스적 하느님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실체적인 타자성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은총의 主로서 歸一해야 하는 중심에 위치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참여해야 하는 주변적인 존재로서 양자 간에는 불가역성이 남아있음을 아베는 지적한다. 이러한 하느님과 자기, 초월과 내재의 상호침투 관계가 충분히 자각되기 위해서는 중심으로서의 하느님도 돌파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아베는 그리스도교의 경우처럼 불교 내에서도 종교부정의 입장을 극복한 경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역동적 공’의 입장이다.
아베는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불교의 무분별지의 입장에서는 근대과학이나 니힐리즘의 입장이 아무런 괴리됨없이 이들을 포괄한다고 본다. 즉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을 날카롭게 대립시켜 구별하지 않은 공의 입장에 설 때 일체의 허위성을 주장하는 허무주의적 입장의 논리적 귀결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비유기체적인 물질로 보는 근대과학적 입장도 眞如의 차원인 공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그거소가 결국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근대과학과 허무주의와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眞如 즉 절대무의 입장에서 그것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는 바로 이러한 공의 입장은 그 자체가 지닌 근본적 성격 때문에 인간의 악에로의 부단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자유로운 인격성이나 윤리적 책임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 사회적 행위 등을 어떻게 터닦음할 수 있겠는가 라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됨을 지적한다.
그러나 불교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공의 입장에서는 자연과 구별되어 악을 행할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인격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는 어디서 윤리적 책임성의 기초,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행동의 기초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불교는 선악문제를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보다 선악을 구별하는 분별심의 차원에서 다루므로 정토진종을 제외하고는 윤리적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무분별지적 공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및 윤리적, 역사적 행동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진지하게 이 문제와 싸워왔다. 아베는 이제 불교가 윤리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진여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다시 물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불교는 전통적인 사유의 틀을 깨고 이 문제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수반될 때 오늘날의 반종교적 세력들과의 대결에서 보다 참된 인간해방의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종교부정의 입장을 극복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오늘날의 불교와 기독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아베는 기독교에서의 케노시스적 하느님 즉 자기비움의 하느님에서 기독교의 불가역성이 가역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고, 불교의 역동적인 공의 입장에서 가역성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어 윤리적, 역사적 행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적 중심주의를 배워야 하리라고 본다. 이와 같이 양종교 안에서 자기 종교의 문을 개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아베는 각 종교 내에 있는 ‘악마에 대한 자각’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3) 악마의 자각
앞서 우리는 종교 간의 만남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종교 그 자체에 도전하는 거대한 종교부정의 입장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아베는 바로 허무주의의 근저에 있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것이다. 곧 니체가 ‘일체는 허위’라고 했을 때 그 허위는 바로 ‘악마’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마는 바로 허위의 受肉化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체는 ‘신을 신성한 허위’라고 했다.
니체가 말한 신이 ‘허위를 대체한 신’이라고 한다면 이는 ‘허무를 극복한 신’이라는 주체적 신앙이 붕괴되었을 때 비로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아베는 말한다. 즉 자기 신앙을 고수하며 끝까지 살아가려 하면 할수록 신앙의 탈을 쓴 숨겨진 자아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오게 된 고백이라는 것이다. 아베는 이런 니체의 고벡 앞에서 주체적 신앙은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 아베는 바로 이 면을 ‘악마의 자각’이라고 말하면서 종교가 참된 종교로서 위치하려면 악마의 자각에 의해서 새롭게 탈바꿈해야만 함을 역설한다.
求道의 途上에서 한번 깨달은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 즉 참된 신앙이라고 한 그 신앙에서 선의의 허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활의 현실을 통해 여러번 자각했을 때 우리는 때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망감에 빠져 있지 않고 다시 거듭해서 참된 신앙을 찾아 자기초극을 시도한다. 아베가 여기서 발견한 것은 그 자신이 발견한 하느님에 대한 은총, 사랑이 일종의 의식의 변화가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의식의 근본적 전환은 다른 의식의 향상이나 변화와는 달리 우리의 삶에 하나의 위대한 전환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아베가 볼 때 그것은 아직 존재의 전환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이라는 차원이라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근저에 숨어있던 의식되지 않은 자아의 뿌리가 점차 싹을 키워 신앙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바로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의 뿌리는 이런 차원에서의 신앙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인들이 말하는 신은 ‘허무를 극복한 신’이 아니라 ‘허무와 대치된 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관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기독교의 신을 ‘허무와 대치된 신’으로 본 니힐리즘적 해석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아베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신앙에 대한 자각의 뒷면에 악마의 자각이 있음을 본 것이다. 그럼 아베가 말하고자 한 악마의 자각은 무엇이며, 그 자각을 통해 어떻게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니힐리즘을 극복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아베의 악마의 자각은 본래 니시다의 종교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니시다는 악마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었지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니시다 철학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 악마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중교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악마의 문제는 도덕적인 악의 문제나 종교적 악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은 도덕의 차원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일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 신과의 관계에 들어갈 때 근원악은 비로소 자각된다. 죄의 문제는 도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과의 관계에 들어간 종교의 차원에서 비로소 문제가 된다. 신과의 관계에 들어서면 죄는 구원으로 바뀌게 되는 길이 열린다. 따라서 죄의 자각이깊으면 깊을수록 구원의 자각도 깊어진다. 악마의 문제는 우리가 신과 접하는 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작용에서 신과 접합과 함께 악마와 접한다.” 왜냐하면 악마는 신의 이면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아베가 말하는 악마는 도덕적 차원인 선악의 대립관계에 놓인 악이 아니며, 또한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 신과의 관계에 들어갈 때 신앙과 대립되는 근원악으로서의 죄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베가 말한 악마의 자각은 우리가 신과 접하는 바로 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악마의 자각 위에 양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 아베는 양종교는 악마의 자각을 통해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즉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신의 이면에 숨어있는 악마의 자각을 통하여 가역적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각성의 종교 역시 거기에 숨겨있는 악마적인 성격을 자각하여 가역성에서 불가역성으로의 자기부정을 한다면 가능하리라 본다.
4) 가역성에서 불가역성으로
불교에서의 악마의 자각이란 무엇인가? 아베는 공의 입장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비판이 불교의 깨달음의 뒷면에 놓인 악마의 자각을 말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나타난다. 공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특히 윤리적인 선악의 판단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또한 도대체 장래를 향한 역사의 방향지움이라는 것이 공의 입장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공의 입장이 혹 궁극일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서부터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든가 장래를 향하는 방향지움이라는 것이 가능하기 않다고 한다면 그런 입장은 약한 상대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베는 바로 위의 질문들이 바로 공의 입장 안에 있는 위험성이라고 보았다. 즉 불교의 공에서는 중심이 없기에 공은 완전히 열려 있고 사방으로 관통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의 자각에서는 선악의 가치판단 기준이 결여되어 있고, 역사의 방향설정을 하지 못하는 위험성을 항상 품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의 입장은 늘 惡取空의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베는 공에 사로잡힌 惡取空을 惡取空이라고 자각함은 魔의 자각이라고 불렀다. 아베는 바로 이 악취공에 떨어질 가능성을 부단히 극복해야 한다고 보고 그 일은 바로 공이 공도 끊임없이 비우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魔의 자각의 입장이 극복되어서 佛도 아니고 魔도 아닌 非佛非魔의 입장이 자각될 때 그때야말로 참된 공의 입장이 自覺現前한다고 아베는 본다. 다시 말해 참된 空은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고, 스스로 空하여 나아가 願으로 전환되고 願은 다시 스스로를 空하여 나아감으로써 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願이 되지 않은 空은 참된 空이라고 할 수 없둣이 行이 되지 않는 願은 참된 願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空이 願이 되고 願이 行이 된다는 것은 空의 자기 전개이다. 따라서 願과 行의 근원은 空이다. 즉 空의 입장과 行의 입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가역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行이 배제된 공, 공이 배제된 行은 참된 의미의 空도, 行도 아니다.
공에서 願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고 願에서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아베는 말한다. 空은 스스로를 비워서 願이 되고 願은 스스로를 비워서 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는 거기에 새로운 중심, 無的인 하나가 자각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하느님, 그 자기 부정으로서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이런 공의 부정으로서의 無的인 하나라고 아베는 본다. 따라서 아베는 이 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에서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5) 불가역성에서 가역성에로
불교에서의 악마의 자각이 惡取空에 대한 자각이었다면, 그리스도교에서의 악마의 자각은 신에 대한 집착이라고 아베는 말한다. 아베는 그 자신이 정토진종 신자로서 미타와 자기 사이에 결코 역전할 수 없는 불가역성이 있음을 깊이 신앙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토진종 신앙에서 선불교로 전향한 것은 자신이 염불에 대한 믿음의 명목하에 악마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에게 있어 본원에 대한 믿음이 악마에 대한 자각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 악마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미타와 자기와의 불가역성이 붕괴되고, 모든 것이 가역화되는 중심이 없는 공의 세계가 그에게 열렸다는 것이다.
앞서본 불교의 공의 경우는 모든 의미에서의 중심이 없고 모든 점이 중심이 되며 동시에 원주가 된다는 것이다. 즉 중심과 원주가 전적으로 가역적 관계라는 것이다. 아베는 이러한 불교의 공을 무한대의 원구라고 표현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불교의 공과는 달리 중심있는 무한대의 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중심은 유한인 원의 경우와는 달리 모든 점이 한결같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비대상적인 중심이 바로 하느님이며,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 간에는 불가역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자의 차이는 불교의 경우는 무한대의 원구로서 모든 것이 중심인데 반해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무한대의 원으로서 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무적인 중심-하느님 혹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므로 아직 신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아베의 시각이다. 그래서 아베는 참으로 철저한 해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신에의 집착을 벗어버리고 無的인 중심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아베는 하느님과 자기, 초월과 내재의 상호침투 관계가 충분히 자각되기 위해서는 비대상적인 중심인 하느님까지도 돌파되지 않으면 안되지 않나라고 묻는다. 즉 무한대의 원에서 무한대의 원구로 변용되고, 절대무의 하느님은 절대무의 공까지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아베의 견해이다.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 아베의 양종교에 대한 비교연구는 분명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종교연구의방법론과 가다머의 해석학적 방법론이 지향하는 바임을 알 수 있다.
스미스가 말했듯이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그 진리를 신앙하는 이들에 대한 이해이다. 여기서 타인의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신앙이 나의 신앙과 무관하지 않음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신앙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신앙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자기 신앙 및 타종교에 대한 참된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스미스는 이를 위해서 자신이 인류 전체의 공동체적인 종교적 복합체의 성원이라는 새로운 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역사에서 ‘자의식’의 도래는 하나의 극적인 출현이다. 아베의 양종교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러한 스미스가 말한 신앙의 측면에서 전인류 종교사의 도상에서 바라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아베는 또한 타종교의 지평, 아니 더 나아가서 종교부정의 지평과도 만남으로써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아베의 추구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는 결국 정신적인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다머가 지적했듯이 ‘지평의 융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특히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 점은 다끼자와 가쯔미의 아베에 대한 비판에서 잘 드러나 있으나 여기선 언급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의 연구업적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단순히 양종교 간의 비교연구 차원을 넘어서 종교부정의 이데올로기적 도전에 직면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아베를 통해 살펴본 양종교의 비교연구에서 타종교와의 만남없이는 나의 종교의 진리이해 역시 불완전함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가다머가 말했듯이 종교간에 대화를 한다는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가장 탁월한 종교적 행위”가 된다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참고문헌
Gadamer, 「Method and Truth」, Crossrord, 1982.
Frank Whaling, 「Conthemporary Approaches to the Study of Religion in 1,2 Volumes」, Mouton 1985.
Hee Sung Keel, 「Understanding Shinran」, Asian Humanities Press, 1995.
峰島旭雄, 「東西思惟形態の比較硏究」, 東京書籍, 1977.
阿部正雄, 「大乘禪」 627號, 中央佛敎社, 1976.
瀧澤克己, 「實人生の基盤と宗敎」, 三一書房, 1982.
아베 마사오(변선환 역),「선과 현대신학」, 대원정사, 1996.
--------------------, 「선과 현대철학」, 대원정사, 1996.
--------------------, 「선과 종교철학」, 대원정사, 1996.
김영한,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박영사, 1989.
리차드 E.팔머(최성학 역), 「해석학 강의」, 라브리, 1988.
H. 카워드 (한국종교연구회 역),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1990.
강돈구 외 「해석학과 사회철학의 제문제」, 일월서각, 1990.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4.
에머리히 코레트, 신귀현 역, 「해석학」, 종로서적, 1985.
김승철,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1」, 나단 1993.
한국종교학회, 「종교들의 대화」, 사상사 1992.
길희성, “동양철학연구방법론의 一省察,” 「철학」 1984 봄.
박순영, “해석학” 「철학과 현실」, 1993 여름.
“가다머의 해석학과 정신과학의 방법론”, 「철학」24집, 1985 가을.
김영한,“가다머의 영향사 해석학,”「철학」 1985 가을.
백승군, “해석학의 보편성의 문제”, 「철학」 1985 가을.
황필호 “종교와 종교의 만남은 가능한가” 「철학」17집,1982 봄.
O.F블노오(백승군 역), 「인식의 해석학」, 서광사, 1993.
허정환, “「가톨릭교회교리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신론 비판-해석학적 견 지에서”, 서강대학교대학원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