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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연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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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人의 주술적 종교행위
1.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 불의 사용.
인간은 서게 되면서부터 공간개념 즉 위 아래 중심축으로부터 뻗어나간 사방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런 공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무한하고 미지의 공간, 위협적인 공간 가운데 던져졌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중심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경험은 영토나 거주지의 전형적인 분할과 그들의 우주적 상징주의의 중요성을 설명해 준다. 원시인의 실존형태가 동물과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도구의 사용이다. 원숭이도 도구를 사용했고 어떤 경우는 그것을 만들기도 했지만 원시인은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를 생산해냈다. 그들은 원숭이처럼 특별한 상황이나 자기 몸의 연장으로 도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할 (ex,자르기 위해서) 목적으로 도구를 사용했다.
또한 생산, 보존, 수송을 가능케 해준 불을 사용함으로써 舊人은 동물의 조상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었다. 불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BC 60만년경으로 되어 있으나 아마 시기적으로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여러 곳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러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미 지성과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서 행동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시인의 무의식적 행동-꿈, 환상, 비전-은 그 강도나 영역에 있어 현대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원시인들은 수렵을 하면서 性에 따라 일을 분할했고 이로써 그러한 구분이 없는 동물세계로부터 인간화가 강화되었다.
2. 선사시대자료의 불확실성
舊人을 완전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들도 어떤 믿음체계와 제의를 실천했음을 뜻한다. 선사시대 사람의 종교성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면 아마 비종교성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舊人의 무종교성에 대한 이론은 진화론 전성기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잘못된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관심을 가졌던 舊人의 해부학적 골격구조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舊人이 종교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舊人생활에 대해 증명할만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지만 모호하고 종류도 그리 다양하지 않다. (ex 인간의 두개골, 석기, 색소들, 바위그림, 돌조각상) 무덤, 예술작품에는 최소한 종교적 의도가 확실히 있지만, BC 3만년전 자료의 대부분은 이용할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자료의 불확실성은 그들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모든 자료들은 (오늘날의 것까지도) 하나의 의미체계 안에서 통합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면 그 모두가 영적으로 불확실한 것이다. 선사시대의 것이나 현대의 것이나 하나의 도구에는 다만 기술적인 의도만 드러날 뿐, 그것의 생산자, 소유자의 사상, 느낌, 꿈, 희망은 우리에게 감춰져 있다. 그러나 우린 최소한 선사시대 도구 안에 숨겨진 가치들에 대해 상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모호성은 우리에게 문화사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된 개념을 갖게 한다.)
원시 수렵인들은 초자연적 힘이외에는 동물들이 사람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람이 동물로 바뀔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의 영혼이 동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봄으로써 인간과 동물 간의 신비적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수렵인의 종교안에 수렵인을 보호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뼈들 특히 두개골은 의례적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아마 그것 안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과 야생짐승신이 그 골격에 새로운 육체를 부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은 희생된 동물의 영혼을 그의 영혼의 집으로 보내기도 하고, 최고신에게 죽은 동물의 일부를 드리기도 하며 그 피를 벽에 바르기도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대자료들에 이런 믿음과 의례와 동일한 것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가 갖고있는 것의 대부분은 두개골과 긴 뼈들이다. 우리의 빈약한 자료로 인해 이것을 증명하기 힘들다고 해서 수렵인의 종교사상의 풍부함과 복잡함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종종 말해왔듯이 믿음과 사상은 화석화시킬 수 없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舊人들의 사상과 믿음들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급진적인 방법론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수렵문화의 비교과정을 통해 이것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우린 역사 속에 사라진 사람들이 지녀온 종교적 믿음과 실천을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것들을 조명해 보기 위해서 최소한 어떤 유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3. 무덤의 상징적 의미
우리는 무덤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들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태양의 일련의 과정과 영혼의 운명을 연결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세계에 다시 태어남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리첼 돌마토프는 코기(Kogi)인디언의 무덤에 대해 연구했는데, 코기인들은 우주적 어머니의 자궁인 세계를 각 마을, 각 집, 각 무덤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덤을 세계와 동일시함으로써 장례의례는 우주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기인은 먹는 행위가 성적 행위를 상징하므로 고인을 위한 음식은 성적인 의미를 지닌다. 복족류 껍질은 죽은 소녀의 남편을 상징하는데 만일 이것이 무덤내에 없다면 그 소녀가 타계에 가서 남편을 요구할 때 그 부족의 젊은이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징성을 舊人들의 매장에 관한 것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접근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의 한계성과 빈약한 고대사료의 양식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자료의 빈약함과 모호함에 직면할 때마다 늘 기억해야 한다.
4. 뼈퇴적물과 관련된 논쟁
원시시대의 뼈퇴적물들이 동굴에 일정장소에 모아져 있음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뼈퇴적물들은 어떤 의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이를 파악하고자 했다. A.Gohs는 이것을 북극인들이 최고신께 첫 제물을 바치는 것과 비교했다. 즉 수렵인은 사냥한 짐승의 가장 좋은 부분인 두개골과 골수를 신께 바쳤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를 보관한 것은 야생짐승의 신이 다음해에 이를 소생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보존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두 해석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구석기시대 전기에는 공물에 대한 자료가 없고 중기에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아직은 종교적 성격이 없으며 후기에는 비교적 확실성을 갖고 공물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학자들은 당시 자료들의 결함 혹은 확실한 권위를 지닌 자료의 모호성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舊人의 영적인 행위에 관해 조각난 흔적들만 접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현대북극의 수렵인과 비교해 볼 때 뼈퇴적물은 하나의 주술적 종교의 의도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 행동의 특별한 의미에 관해서 많은 사회에 전달된 정보를 통해서만 접근하게 된다.
또한 뼈퇴적물은 신이 다음해에 그 뼈들에 새로운 육체를 덮어줄 희망을 갖고 보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그 동물은 야생동물신에 의해 다시 태어나거나 그 뼈 안에 살아있는 영혼의 덕에 의해서, 혹은 수렵인이 뼈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어 준 덕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늘 사료의 주술적 종교의도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고대인의 종교사상은 후대에도 이 사상이 지속될 수 있을 때 그 중요성이 확보된다. 동물이 그 뼈로부터 다시 태어날수 있다는 믿음은 많은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믿음때문에 살을 먹은 동물뼈를 부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수렵인들의 문화에 적합한 이런 사상들은 보다 더 복잡한 종교들과 신화들에도 남아있다.
5. 바위의 그림들
학자들은 인간이 늘 꿈을 갖고 있거나 영혼이 초월을 향해 여행한다고 해석해 왔다. 문화나 종교가 다른 형태로 바뀐다는 것은 이러한 신비체험에 대한 해석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석기인들의 영적인 우주관은 주로 인간과 동물간의 신비적인 관계를 말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신비체험을 신성시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동물의 골격과 내부기관을 잘 볼 수 있도록 그려진 X-ray식 그림은 일종의 샤마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수렵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며 거기에 담긴 종교사상은 샤마니즘으로 가득차 있다. 즉 수렵문화에서 발견되는 동굴벽화같은 그림들에서 우리는 당시의 샤마니즘적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샤만은 초자연적 비젼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의 골격을 볼 수 있고 심지어 동물, 식물까지도 투시해 볼 수 있다고 당시인들은 믿었던 것이다.
6.여성의 출현
여성의 특별한 존재양상과 관련된 신비는 많은 종교들(원시종교나 역사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레로이 구한은 구석기 예술의 모든 것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주요기능을 연구해 왔다. 그는 정밀사진분석과 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象들(figures,형태들)과 기호들(signs)은 상호교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들소는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말은 남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상징적인 빛 안에서 해석된 것들을 통해 원시인의 동굴은 여러 의미들로 구성된 세계임이 증명된다. 그러나 레로이 구한의 학설은 여러 점들-그의 형상들과 기호들에 대한 그의 해독에 모순이 있다는 점, 동굴 내에서 실시된 의례와 맞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구한은 구석기시대 예술에 대한 사상적 통합을 했다는 점, 남성과 여성이라는 signs下에 서 감추어진 종교적 가치의 상보성을 비추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두 성과 우주적 원리의 상보성을 지닌 체계들은 원시사회안에도 풍부히 나타나며 고대종교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보성의 원리는 세계를 비추어보는데 그리고 주기적인 창조와 재생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7. 구석기 수렵인의 의례, 사상, 상상.
마르샥은 동굴벽화나 조각들을 연구하면서 그 디자인들에는 하나의 연속성이 나타나며 어떤 의도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비록 그 의미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런 분석들은 구석기시대의 어떤 기호들이나 그림이 지닌 의례적 기능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런 이미지나 상징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증거가 있는데 예를 들어, 계절과 관련된 사건들이나 당시인들의 습관, 성, 죽음, 초자연적 존재가 지닌 신비적 힘 등이다. 우리는 이런 구석기시대의 표현들이 이미지들의 상징적 가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암호라고 본다.
우리는 하늘의 신성성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대해서 주지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체험자체는 초월성을 드러내는 경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샤만의 신비적 상승체험, 몸으로부터 벗어나 높이 상승하는 체험들은 초인간적 존재-신들, 영혼들-가 사는 우주적 공간을 구체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밤과 어두움 그리고 사냥행위, 가족들의 죽음, 우주적 재해도 이와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이다.
주술종교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언어의 역할이다. 주술종교에서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의례행위에서 얻어진 결과를 보증해 줄수 있다는 확실성을 갖게 한다. 이상에서 본 몇가지 기본적인 사상이 공통적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석기시대의 종교적 유산도 이미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 유러피안족의 종교-베다신들-
296014 최 현 민
1. 인도-유러피안인들의 原史시대
인도유러피안인들은 역사 내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파괴의 역사를 가져왔다. BC 2300-1900년 사이에 그리이스와 소아시아내 많은 도시들이 약탈당하고 불탔다. 사료들은 히티테스, 루위안스, 미타니족들이 그 침략자로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 중 아리안어를 말하는 종족도 있음이 증명되었다. 약 BC 1200년경에 아리안인들은 인도 갠지스 평원으로 들어왔고 이란인들이 페르시아와 그리이스를 차지하면서 그 지역이 인도유러피안화되었다.
1세기 이상 학자들은 인도 유러피안인의 근원지 및 그들의 원역사, 이주과정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북,중앙유럽, 러시아평원,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등에서 그 근원지를 찾았는데 일반적으로 오늘날 인도 유러피안인의 근원지는 흑해 북쪽(카르퍼타안산맥과 코커사스산맥 사이)에 위치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BC 5-3천년경 이 지역에는 투물리문화가 발전했고 BC 4000-3500년에는 서쪽 티스주까지, BC 3500-3000년에는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북이란까지 확장되었다. 이 투물리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이 原인도유러피안들이었다. 인도 유러피안문화의 기원은 신석기시대 나아가 중석기시대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 확실하다.
목가적 유목생활, 가족의 족장구조, 침략자적인 기질, 정복을 하기 위해 구성된 군사조직은 인도유러피안사회의 특징이다. 우리의 연구목적을 위해 이런 존재형태가 특별한 종교적 가치들의 출현을 촉진시켰는지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확실히 농업사회의 종교적인 면은 목축사회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인도유러피안인들의 이주와 정복들은 계속 정착농업인들을 예속시키고 동화시켜 왔다. 다시 말해 인도유럽인의 초기역사는 서로 다른-심지어 상반되는 종교적 측면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만들어진 영적인 노력이었다.
62.첫 만신전과 공통종교적 어휘
공통 인도유러피안종교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한데 우선 종교적 어휘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예들이 있다. 이미 초기연구에서 인도유러피안어에 뿌리를 둔 deiwos 즉 ‘하늘’은 신의 의미로 쓰이거나 신의 이름(댜우스, 제우스, 쥬피터)으로 인식되었다. 이 신의 개념은 우주적 신성 즉 빛, 초월(상승)이나 더 나아가서 주권과 창조, 직접적인 의미로는 우주발생이나 父權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주적이고 대기적인 성현(hierophany)이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많은 신들이 ‘천둥’의 이름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인도유러피안시기에 세계와 우주창조자로서의 최고신인 天神은 이미 천둥신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는 종교사에서 비교적 빈번히 일어난 현상이다.
불은 우주의 기원으로 간주되어왔다. 불의 의례는 인도 유러피안종교들의 특징적 요소이다. (베다신인 아그니의 이름은 라틴어 ignis, 리투아니아어 ugnis, 고대슬라브어 ogni로 나타난다.) 대지는 하늘과 반대되는 생명에너지로 간주되어 왔으나, 지모신은 인도유러피안인에게 비교적 최근의 종교적 개념이며 또 한정된 지역에서만 보인다.
인도유러피안인들은 특별한 신화와 신학을 지녔다. 그들은 희생제사를 지내고 말과 찬가의 주술종교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착지를 우주화하고, 공간을 구체화할 개념들과 의례들을 갖고 있었다. 인도유러피안인들은 성소를 짓지 않고 바로 하늘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다.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전통은 문자사용이 금지된 채 구전으로 전수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기동안 초기인도-유러피안 이주인들(히티테스, 인도이란인, 그리이스인)을 후기 인도유러피안인들(독일 발트-슬라브인)과 분리시켜서 생각해온 것처럼 공통유산이 늘 역사시기의 어휘나 신학, 신화 안에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주하는 동안에 겪게 된 다른 문화와의 접촉도 고려해야 하며 또한 어떤 종교전통도 새로운 영적인 창조나 차용, 공생(symbiosis) 혹은 삭제에 의해서 생겨난 변화없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어휘는 심지어 원역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 분화와 개혁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예는 공통인도-유러피안어에는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라틴어, 그리이스어에는 2용어가 사용된다(라틴어 sacer/sanctus, 그리이스어 hieros/hagios). 이런 쌍을 이룬 용어의 각각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양면적인 개념을 상상하도록 이끌어준다. 즉 긍정적으로는 ‘신의 현존으로 변화되어진 것’과 부정적으로는 ‘인간이 타부시해 왔던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공통원역사로부터 다른 인도 유러피안인들은 그들의 종교전통을 계속 재해석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런 과정은 이주과정동안 강렬하게 나타났다.
63.인도유러피안인의 3형태의 이데올로기
인도 유러피안신화들의 구성요소들인 찬가, 의례서, 서사시, 전설들은 여러 시기에, 여러 문헌들로부터 온 것들이다. 인도유러피안신화와 종교들에 대한 두메질(Georges Dumezil)의 비교연구에 따르면 인도유러피안사회의 기본구조를 3계급(사제, 군인, 농부)으로 나누는 것은 종교사상의 3가지 기능에 해당한다. 첫째 주술적 사법적 주권의 기능, 둘째 용맹한 힘을 지닌 신들의 기능, 셋째 풍요와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는 신의 기능이 그것이다. 첫번째 기능인 주술적 주권과 사법적 주권의 2개로 분리되는 것은 바루나와 미트라에 의해서 분명히 설명된다. 고대인도인들에게 있어 미트라는 이성적이고 질서있고 고요하고 은혜롭고 사제적 측면을 지닌 신이며, 바루나는 공격적이고 격렬하고 두렵고 전쟁을 좋아하는 면을 지닌 신이다.
형태상으로 가장 다양한 것은 3번째 기능인 풍요, 평화와 관련된 종교적 표현들로써 그것은 각각의 지리, 경제, 역사적 상황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기능인 물리적 힘 특히 전투에서의 힘의 사용에 대해서 두메질은 인도와 로마, 독일 사이에 많은 상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초기시련은 세 머리를 한 괴물이나 세 적에 대항하여 싸운 젊은 전사의 투쟁으로 되어 있다. 사실 그런 시나리오는 세 쿠리아티와 호라티우스의 싸움에서 세 형제들에 대항하여 승리한 아일랜드영웅 쿠추라인의 전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신화-의례적 주제가 공통 인도유러피안시기에 나타난 전사의 신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도와 아일랜드와 같은 두 극단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3형태의 이데올로기는 일정하면서도 유동적인 체계로 되어 있으며 많은 신의 형태와 종교적 사상과 실행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64.인도의 아리안들
베다인도인들은 농사를 짓긴 했으나 그들의 주된 경제는 목축을 통해서였다. 아리안들은 도시가 없었고 문자로 된 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리안들은 음악,춤, 술을 좋아했고 주사위놀이가 대중화되었다. 리그베다의 많은 찬가는 여러 아리안족간의 투쟁을 말해준다 (바라타스족이 수다스왕下에서 승리하여 10부족을 통합시킴). 그러나 리그베다에 의해 제공되는 역사적 자료는 극히 드물다.
베다시기후 5-6세기에 형성된 마하바라타는 쿠루스와 그의 사촌 판다바스간의 전쟁을 그렸다. 푸라나스(Puranas)에 의해 보존된 전통에 따르면 이 전쟁은 마다데사에서 1400 BC에 일어났다고 한다. 사타파타 브라흐마가 형성된 BC 1000-800년에 코살라와 비데하지역이 아리안화되었다. 라마야나는 아리안이 남쪽으로 그 영향력을 뻗쳤음을 보여준다. 아리안의 적들은 악마와 마법사로 신화화되었고, 영토정복은 브리트라와 다른 악마에 대항하는 인드라신의 전쟁으로 동화되어 나타났다. 새로운 영토점유는 아그니신께 공물을 바치는 제단을 세움으로써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아그니신께 바친 제단설립은 단순히 창조의 의례적 모방이다. 즉 영토점유는 혼돈에서 질서에로의 전환이며 의례를 통해 그것은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실재가 된다.
우리가 살펴볼 인도정신의 창의력은 특히 인도의 아리안화와 그 후의 힌두이즘화를 가져온 공생, 동화, 가치전향(revalorization)의 과정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수천년이 걸린 이 과정은 베다계시(Sruti)에 기초한 브라흐만들에 의해서 발전된 종교체계와의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 인도의 종교적, 문화적 통일성은 오랜 합성과정의 결과이고 베다시기의 시인, 철학자,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65.바루나; 데바들과 아수라들.
인도 유럽의 하늘의 신(디아우스)는 이미 베다의례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하늘 혹은 낮으로 표현된다. 이와같이 신성의 인격화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바뀌는 현상은 우주신들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난다. 즉 그들은 ‘사라진 신(dii otiosi)’이 된 것이다. 사라져간 디아우스의 자리는 곧 최고신인 바루나가 차지했다.
베다경전은 신(데바)들이 가장 오래된 신들인 아수라에 대항하는 투쟁을 그리고 있다. 신들의 승리는 아그니가 인드라 초대시 희생제물을 지니지 않았던 아수라를 떠났을 때(abandon)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바로 뒤에 데바는 아수라로부터 희생제사의 말(vac)를 받았다. 그 때 인드라는 바루나를 그의 왕국으로 초대했다. 아수라에 대한 데바의 승리는 다시우스(Dasyus)에 대한 인드라의 승리로 동화되었다.
이런 신화적 투쟁은 초기의 신들에 대항하는 젊은 신들의 전쟁을 반영하고 있다. 베다에서는 아수라가 모든 신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아수라는 세계가 조직화 되기 전에 있던 초기상태에 속하는 특별한 성스런 힘들을 말한다. 젊은 신인 데바들은 이런 성스러운 힘들을 전수받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아수라라는 별칭을 즐겨쓰는 이유이다.
“아수라들의 시간”은 데바가 지배하는 현시대를 앞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도에선 다른 많은 고대 전통적 종교들처럼 초기시대에서부터 현시대까지의 과정이 우주적 의미 안에서 설명된다. 우린 브리트라에 대한 인드라의 신화적 전투에서 이 우주발생적 근거를 본다. 초기신 즉 뚜렷한 아수라인 바루나를 브리트라와 동일화시키는 과정은 신의 이중적(Biunity) 신비에 대한 일련의 내밀한 숙고를 가능케 한다.
66.바루나, 우주적 왕과 주술가; 르타와 마야
베다문헌은 바루나를 세계, 신들, 인간들을 지배하는 최고신이라 표현하고 있다. 우주창조자인 바루나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전능하며 천개의 눈을 지녀 모든 것을 보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을 노예처럼 느낀다. 이와 같이 바루나는 구속하는 마력을 지녔으므로 많은 찬가와 의례는 이런 바루나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루나신앙은 베다시기에 이미 줄어들기 시작했고 대신 그는 르타와 마야라는 두 종교적 관념과 연결되었다. 르타는 세계질서-우주적, 전례적, 윤리적 질서-를 가리킨다. 르타에 대한 찬가는 없지만 리그베다에서 300번 이상 이 용어가 사용된다. 창조가 르타와 일치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은 신들이 르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 즉 르타는 우주적 리듬과 도덕적 행위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와 동일시된 르타는 바루나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오직 우주창조신인 바루나만이 죄나 잘못, 무지에 의해 손상된 질서를 재건할 수 있다. 죄인은 희생제물을 통해 손상된 질서가 회복되길 바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바루나는 점차 ‘사라진 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주적 질서와 그의 연관성을 볼 때 그가 인도영성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르타는 마야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관련성은 우리가 바루나의 우주적 창조성에 주술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설명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마야는 may라는 ‘변화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마야에는 좋은 마야와 나쁜 마야가 있으며 좋은 마야에도 2종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마야로 인드라가 악마의 도전을 받았을 때 사용했던 마야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신의 특권인 형태나 존재를 창조하는 마야로, 이 우주적 마야는 르타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리그베다에서 마야는 ‘의도적인 변화’ 즉 창조나 파괴의 교체를 의미했다. ‘우주적 환상, 비실재, 비존재’의 의미를 지닌 철학적 개념인 마야가 한때는 우주적인 개념의 ‘변화’ 즉 바루나의 주술 혹은 악마적 변화 그리고 창조력으로 사용되었고 바루나가 마야에 의해 우주질서를 재건립한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왜 마야가 ‘우주적 환상’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즉 시초부터 그 개념은 우주질서의 악마적 변화 뿐 아니라 신적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애매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베단타에선 우주 그 자체는 ‘환상적 변형’(illusory transformation) 즉 실재가 결여된 변화의 체계가 될 것이다.
67.악마들과 신들. 미트라, 아리아만, 아디티.
바루나의 애매성과 양의성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의성과 상반성은 바루나에게만 있는 독특한 면이 아니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는 “악마들의 지식이 베다”라고 말한다. 즉 이는 신에 대한 교의가 역설적으로 악마적 성격을 지닌 지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신들과 악마들의 同化적 사상은 우파니샤드에까지 연장되었다. 미트라의 역할 중 바루나와 분리된 그의 역할은 이차적인 것이다. 찬가 중 미트라에 대해서만 바친 찬가는 하나뿐이다. 즉 미트라의 종교적 활동과 사상은 바루나와 함께 언급될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미트라-바루나는 쌍이 되어 초기부터 최고신의 역할을 해왔다. 그 후에 이 쌍은 모든 대립되는 쌍들의 예증으로 사용되곤 했다. 미트라-바루나처럼 아리아만과 바가도 쌍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도 미트라-바루나처럼 여신 아디티의 아들들로 되어 있다.
68. 인드라, 전사와 창조주
리그베다에서 인드라는 가장 보편적인 신이다. 인드라는 대적할 자 없는 영웅이며 전사의 예증적 모델이면서 동시에 창조신이고 풍요신으로, 생명의 풍요를 인격화한 것이고 우주와 생물학적 에너지의 인격화이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인드라신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드라가 산의 계곡에서 물을 막는 거대한 용인 브리트라에 대항하여 승리한 전쟁이다. 신들이 괴물 뱀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축제이다.(Re와 아포피스, 마르둑과 티아맛, 제우스와 티폰) 이러한 신화의 보편적 특징은 신이 먼저 패배한다는 것이다. 인드라도 브리트라를 처음 보자마자 가능한 멀리 도망갔다. 브리트라에 대한 인드라의 승리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와 같다. 그러나 이 신화구조는 우주발생적이다. 리그베다에 의하면 그의 승리로 신은 태양, 하늘, 새벽을 창조했다. 찬가에 의하면 인드라는 태어나자마자 대지로부터 하늘을 분리시켰다고 한다.
어떤 전통에 따르면 신들의 창조자인 트바스트르(Tvastr)는 스스로 집을 짓고 일종의 지붕, 벽으로 브리트라를 창조했다. 그 거주지 안은 브리트라로 둘러싸였고 하늘, 대지, 물이 있었다. 인드라는 이 거주지인 브리트라를 쳐부숨으로써 이 원초적 존재를 터뜨렸다. 다시 말해 세상과 생명은 무정형적 존재를 죽이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드라 그 자체 안에서 우리는 다시 신들에 의한 푸루사의 해체, 프라자파티의 자기 희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신화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의 우주발생적 의미와 함께 국가적, 역사적 유의성(誘意性)이 있다. 즉 인드라 전투는 아리안이 다시우스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의 모델이다. 인드라와 브리트라 투쟁은 아마 초기에 신년축제의 신화, 의례적 시나리오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사유는 이 신화를 신의 이중성(biunity)를 설명하는데 즉 궁극적 실재의 베일을 벗기고자 하는 해석학적 시도의 예로 사용할 것이다.
69. 아그니, 신들의 祭官
베다에서 아그니는 불의 신으로 표현되나 우주적 의례적인 성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는 하늘에서 태어나 하늘로부터 빛의 형태로 내려왔지만 그는 또한 물 속에도 나무, 식물 속에도 있으며 태양과도 같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의 使者이며 그를 통해서 공물이 신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아그니는 사제보다 훨씬 근원적인 존재로서 祭官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매번 새로운 불로 되살아나기 때문에 영원히 젊다. 아그니는 家主의 수호신으로서 어둠과 악마를 몰아내고 뱀과 마법을 막아준다. 이것 때문에 아그니신은 다른 신보다 사람에게 더 친밀하다. 한편 아그니는 태초의 물로 스며들어가 물에 생식력을 가져다 준다. 즉 불의 요소(불 그자체, 열, 빛)과 물의 원리(소마)의 결합에 의한 창조라는 고대우주적 개념을 내포한다.
찬가들은 아그니의 영적 능력을 강조한다. 후기 철학적 사유에서 우리는 다시 불과 관련된 초기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창조작업인 릴라는 불꽃놀이에 기초하여 설명했다. 이와 같이 불-빛-지성의 동화는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도종교와 영성에서 아그니의 중요성을 잘 볼 수 있다. 그는 무한한 우주 생물학적 명상과 사유를 불러 일으켰다. 물론 아그니가 인도신 중 이런 상상이나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신은 아니지만 이 점에선 다른 신보다 앞선다. 초기 베다시기에 그는 이미 격렬한 에너지, 빛, 효험, 위엄, 초자연적 힘과 일치되었다.
내면의 에너지를 증가시키고자 하는 금욕주의에서 아그니는 금욕적 에너지의 전환이나 요가수행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70.소마신과 불멸의 술
120개의 찬가가 바쳐진 소마는 베다의 신들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신이다. 리그베다의 전9책이 소마에게 바쳐졌다. 소마는 아그니보다 의례적 실재들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리그베다시기부터 소마희생제사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다. 소마는 인도-이란에서 불멸의 음료이다. 소마는 황홀경험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유명한 찬가에서 “우리가 소마를 마시면 우리는 불멸하게 된다.
빛에 도달하여 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소마는 생각을 자극하고 전사의 용기를 북돋아주며 정력을 증진시키고 병을 낫게 한다. 사제나 신들이 이것을 마시면 그것은 대지가 하늘에 더 가깝게 되도록 하며 생명을 강화 연장시킨다. 사실 그 황홀체험은 생명의 충만함이나 무한한 자유감을 주며 거의 분명한 육체적 정신적 힘들의 소유를 드러낸다. 이것으로부터 신들과의 공동체의식이 나오며 나아가 신의 세계에 소속감을 준다.
그러나 후기에 가면 소마신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중시된 우주발생적이고 희생제사적인 원리에 대한 관심이 그 이후에는 신학자들이나 형이상학자들의 관심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71.베다시기의 두 최고신, 쉬바와 비쉬누
베다문헌의 신들 중 많은 것이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결국은 사라지나 쉬바와 비쉬누와 같이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베다문헌에는 이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점차 최고신이 되어간다. 리그베다에서 비쉬누는 브리트라와 인드라의 투쟁에서 인드라를 도와줌으로써 인드라의 친구로 사람에게 친절한 신으로 나타난다. 비쉬누는 무한한 공간, 삶을 격상시키는 전능한 힘, 세계를 안정화시키는 우주적 축으로 상징화 된다. 브라흐마나스는 프라자파티와 그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시기에 와서 비쉬누는 유일신적 구조에서 최고신으로서 추앙되었다.
형태론적으로 루드라는 반대형태의 신으로 나타난다. 즉 그는 신들 중 어떤 친구도 없고 인간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지닌 악마적 마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병고와 재난들에 의해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는 많은 악마적 존재들과 연합되어 있다.
베다와 브라흐마나에 의하면 루드라-쉬바는 악마적 힘들로 나타난다. 그는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징화한다. 그는 두려움을 야기시키지만 그의 신비적 마력은 또한 축복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루드라-쉬바는 다른 신들처럼 많은 대중종교성의 요소들(아리안이건, 비아리안들의 것이건 간에)을 흡수하였다. 한편 이것은 베다문헌이 우리에게 루드라-쉬바의 본래구조를 알려주리라고 믿을 위험이 있다. 우리는 항상 베다찬가와 브라흐마나가 엘리트, 귀족들, 사제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아리안 사회의 종교생활의 상당부분이 무시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쉬바가 힌두교의 최고신으로 부상한 것을 그의 기원에 의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도종교의 변천과정을 분석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는 계속적인 재해석 및 신화나 의례, 신적 형태의 가치전향이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마니즘과 힌두이즘
296014 최 현 민
135. 一切皆苦
‘一切皆苦 諸行無常’이라는 말은 붓다가 공표했는데 이것은 모든 후기 우파니샤드 시대의 인도적 고찰의 중심내용이다. 인간의 경험은 무엇이든지 고통을 발생시킨다. 가장 초기의 상키야 경전의 저자인 이슈바라크리쉬나는 세 가지 고통 즉 天災, 지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상키야 철학의 근본 원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고통이 우리를 염세주의로 몰고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도철학이나 종교도 그 종국이 절망적인 끝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실존의 법칙으로서의 고통의 계시는 오히려 해방을 위한 필요불가결의 조건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보편적인 고통은 적극적이고 고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이 인도의 철인과 수도자들에게 자유와 지복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이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것, 소유와 욕망으로부터 이탈하는 것, 완전히 자신을 고립시킴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인간만이 고통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하나의 우주적 숙명이요, 시간 안에 살아간다는 이 단순한 사실자체가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나 신들이나 그 밖의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도의 모든 철학과 신비사상이 가지고 있는 확신은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으로 결코 절망이나 염세로 나아가지 않는다. 확실히 고통의 현상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안다면 그 고통은 결정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136. 깨달음을 얻는 방법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인도철학과 명상기술의 목적이다. 어떤 지식도 그것이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구원은 인간조건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인간조건의 초월, 자유, 해방을 표현하는 것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베일을 찢는다’(눈가리개를 벗긴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챤도가 우파니샤드는 눈이 가려진 사람이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버려진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 사람은 “난 눈이 가려진 채 여기에 버려졌다”라고 외쳤다. 어떤 사람이 그의 눈가리개를 벗기고 그에게 도시쪽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는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물어서 결국 집에 가는데 성공한다. 이 경전은 영적 스승을 가진 그가 무지의 눈가리개를 벗기고 결국 해탈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15세기후 상카라는 챤도가에 나오는 이 우화를 주석했는데 이는 단지 우화의 본래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한 것이다. 즉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가 참된 존재(아트만-브라흐만)을 의식한 그 순간에야 비로소 해방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 속에 갇힌 죄수였던 그는 자신의 참된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무지에서 생긴 환상의 눈가리개를 벗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카라에 의해서 주석된 그 우화에서 보여주듯이 인간은 무지의 결과로 고통을 당한다. 우파니샤드이후 인도종교사상은 처음부터 존재해왔던 이 상황을 의식함 즉 이 상황으로부터 깨어남을 구원이라고 보았다. 자신에 대한 무지는 바로 참된 자아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구원은 가능해진다.
137. 관념의 역사와 경전의 연대기.
초기 우파니샤드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인도종교 철학책은 붓다설법 후에 구성된 것으로 당시 붓다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인도철학경전은 경전형성시보다 앞선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철학책내에 새로운 해석이 생길 때 이것은 훨씬 전에 인식되었던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브라흐만 전통에 속하는 종교적, 철학적인 기록들이 붓다이후 몇 세기동안에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것이 붓다시기에 퍼져 있던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타마도 수행시에 여러 철학학파를 만났다.
따라서 인도철학관념의 역사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우파니샤드시기 후 모든 방법과 구원론에 하나의 공통범주-- 일련의 無明-업-삼매과정, 고통이라는 공통실존, 잠, 꿈, 도취, 현혹으로서의 무지에 대한 해석--가 생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브라흐마니즘의 세 철학인 베단타, 상키야,요가는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138 체계화 이전의 베단타
베단타학파의 철학적 체계에 대한 초기역사는 잘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브라흐마경>도 사실은 최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를 저술한 바다라야나는 그보다 앞선 많은 작가의 이름과 사상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브라흐마경>을 구성하는 555경구는 주석없이는 이해하기 힘든데 초기주석들도 소실되어 그나마도 알기가 힘들게 되었다. (A.D800년경 상카라에 의해서 쓰여진 것만이 남아있음) 그러나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에서 우리는 상키야 이전의 베단타사상과 관련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 중 마야교의는 가장 중요하다.
마야는 처음에는 브라흐만의 주술적 힘에 의한 우주창조적 힘의 개념이었으나 그후 ‘無明’이나 ‘꿈’이라는 개념으로 동화되었다. 외부세계의 여러 형태의 실재들은 꿈들의 내용만큼이나 환상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존재가 영원한 단일체(unity)라면 사물(우주)의 다원성뿐 아니라 정신의 다원성도 모두 환상(maya)일 것이다. 상카라이전의 베단타학자인 가우다파다는 아트만의 다원성은 마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사실 유일한 존재인 브라흐만만이 존재할 뿐이며 요가행자는 요가명상을 통해 자신의 아트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영원한 현존의 축복과 빛 속에 깨어나게 된다.
범아일여는 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간주되었으나, 불교학자에 의해 발전된 비판적 사상이후에 베단타학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존재론에 대해서 체계적인 기초를 세워야만 했다. 베단타는 다른 철학견해와 달리 베단타경전들과 그들의 첫 주석의 시기에 그의 창조성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키야와 요가의 철학적 체계의 핵심적인 면이 4-8세기에 이루어졌다면, 베단타는 상카라로부터 그 참된 꽃을 피운다.
139.상키야-요가에 따른 정신
상키야나 요가학파에선 베단타학파와는 달리 이 세계가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우주의 무한한 형태는 자아 그 자체가 무지한 한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즉 자아가 자주성을 회복한 그 순간, 모든 창조행위는 시초의 본질(primodial substance) 속으로 재흡수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아트만과 같이 푸루샤는 言表가 불가능하다. 그 자아는 (보이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요, 獨存하는 자요, 무관심한 자요, 자신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방관자이다. 자율성과 無情은 정신이 갖는 전통적인 통칭이다. 푸루샤는 지성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정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영원히 자유롭다. 따라서 심정적인 생명의 흐름인 의식의 상태는 정신과 무관하다.
우리는 이런 푸루샤의 개념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이 정신이 영원히 순수하고 무감각하고 자율적이고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자체에 심정적인 경험이 동반될 수 있나? 상키야-요가에서는 이 역설적인 국면, 푸루샤와 푸르사파티의 기이한 관계에 대한 기원이나 원인을 문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상키야 요가학파에서는 이 문제가 사람의 이해의 능력을 넘어선 것으므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인간은 지성(buddhi)을 수단으로 하여 알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지성은 그 자체가 시원적인 질료-극도로 정제된 물질-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지성은 하나의 자연 산물인 현상물이므로 다른 현상들하고만 인지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붓디는 어떤 경우에도 영원히 초월해 있는 순수자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순수자아와 생명 사이의 이와 같은 역설적인 교섭의 원인과 기원은 오직 붓디 이외의 결코 물질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 어떤 지식의 매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은 보통의 인간성이라는 현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
140. 창조의 의미: 정신의 해탈에 있어서의 도움
프라크르티는 푸루샤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이고 영속적이다. 그러나 정신과 달리 물질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다. 프라크르티 그 자체는 균질적이지만 구라라고 불리우는 세가지의 존재양식을 갖고 있다; 사트바(知와 빛의 양식), 라자스(동력과 정신적 활동의 양식), 타마스(무력하고 정적인 양식). 프라크르티는 자신의 완벽한 평형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적론적 본능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특별한 성향을 드러낸다.
프라크르티는 다시 마핫(mahat)의 상태에서 아함카라의 상태로 나아간다. 이러한 일련의 진화과정은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객관적인 현상세계로 나아가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현상세계로 발전한다. 이 두 세계는 상호 간에 전기적 상관성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의 몸 뿐 아니라 심리적 기능 감각 의식상태 심지어 그의 지성도 모두 하나의 같은 물질로 창조된 것이다. 즉 객관적인 자연현상과 심리-생리학적인 자연현상은 하나의 공통된 모체를 가지는데 이 양자가 다른 점은 단지 구나의 구조식의 차이에 있다는 것 즉 심리현상에서는 사트바가 우세하고, 심리-생리학적인 현상에서는 라자스가 우세하며, 물질적인 현상에서는 타마스가 강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리학적인 근거에서 보면 우리는 왜 상키야-요가가 모든 심정적인 경험을 단순히 하나의 물질적인 과정으로 간주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선함과 같은 윤리적인 것도 하나의 정신적 특성이 아니라 의식으로 대표되는 미묘한 물질의 정화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이 우주와 인간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모든 개개의 복합체는 다른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예를 들면 하나의 침대는 여러 부분으로 만들어진 복합체이나 사람을 예상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상키야에서는 이와 같은 창조의 목적론적 성격을 끄집어낸다. 정신에 기여하지 않는 창조는 불합리하고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로는 브라만에서 아래로는 풀잎에 이르기까지 최고 완전지를 획득할 때까지 모든 창조는 오직 영혼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우린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141.해탈의 의미
아득한 옛날부터 순수정신은 심정적인 경험과 환상적인 관계 속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무지때문이며 무지를 고집하는 한 현존이 있게 되고 더불어 고통도 있게 되는 것이다. 착각 혹은 무지는 영원불변한 푸루샤와 심리적인 생명의 유전을 혼동하는 데에 있다. 나는 괴롭다, 나는 원한다, 나는 싫다, 나는 알고 있다라는 말에서 나를 순수자아 또는 순수정신과 동일하게 보는 한, 언제나 착각 속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키야가 보는 생존의 법칙이다. 人間苦는 순수자아와 인간의 인격성을 동등하게 간주하는 경험의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련은 착각이므로 쉽게 철폐될 수 있다. 푸루샤가 알려질 때 제반 가치들은 폐기된다. 苦는 더 이상 苦도, 非苦도 아닌 다만 가치나 의미가 없는 하나의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된다.
지혜는 순수정신 순수자아의 본질에 대한 눈뜸이다. 지식은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그것은 즉시 궁극적 실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해탈은 어떻게 프라크리티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나? 상키야에서는 목적론에 입각해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프라크르티은 푸루샤의 해방을 예상해서 본능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프라크리티의 가장 완전한 출현인 지성(붓디)은 계시의 예비단계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해탈의 과정을 돕는 능력을 가진다.
자아계시가 실현되자마자 푸루샤의 속성으로 오인받아 온 지성과 그 외의 모든 물질적 심리적 요소들은 철수하고 순수정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물질 그 원형인 프라크리티로 흡수되고 만다. 이 프라크리티는 지극히 민감하여 나는 들켰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자마자 더 이상 순수정신앞에 자신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이 지상의 생명현상에서 해탈된 사람의 상태이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소멸되어야 할 그의 업이 잔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도공의 물레가 비록 항아리를 완성하였지만 이미 획득된 속력으로 인해서 계속 회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죽는 순간 육신을 벗어버릴 때 순수자아는 완전히 해탈되는 것이다.
142. 요가; 단일 객체에 대한 집중
파탄잘리는 요가를 ‘심의식의 지멸’(心意識의 止滅)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의식들은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대개 다음 3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1)과오와 착각 (꿈, 환영, 지각상의 잘못, 혼돈) 2)정상적인 심리적 경험들(요가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느낌과 인식과 사고들) 3)요가 기술에 의해서 발생된 초심리적인 경험들. 파탄잘리의 요가의 목적은 첫번째와 두번째 범주의 경험을 철폐하고 그 대신 초감각적이고 초합리적인 체험으로 바꾸어 놓는 데 있다.
인간내의 여러 심적 상태의 존재론적 원인은 ‘무지’에 있다. 그러나 상키야와는 달리 요가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무지의 제거만으로는 의식의 상태 전부를 파기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고 선언한다. 그 이유는 어떤 주어진 순간에 존재하는 심적 소용돌이가 제거될 때조차 잠재의식 속에 잠복하고 있는 광대한 저장물로부터 솟아나오는 다른 요소들이 즉각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잠복물을 지칭하는 바사나라는 개념은 요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해탈로 가는 경로에서 이와 같은 잠복세력이 일으키는 장애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한편으로 바사나들은 심적상태의 무한한 연속인 의식의 흐름을 쉼없이 양육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포착하기가 어려운 고도의 회피성 속에 잠복해 있어 통제 및 정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가 수행자는 계속적으로 요가수행을 했을지라도 이 바사나에 의해서 응결된 심적 소용돌이의 강력한 흐름 속에 빠져버리는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는 것이다.
요가명상의 출발점은 단 하나의 대상을 향한 의식의 집중이다. 그 대상이 물리적인 것이든 추상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심적 유동성의 두 개의 발생인인 감각활동과 잠재의식의 활동을 제어하는 것이 에카그라타의 실습이다. 에카그라타는 실습을 통해서만이 달성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실습에 있어서는 생리학적인 요소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만약 육신이 피곤하거나 불안하면 또는 호흡이 산란하면 에카그라타를 획득할 수 없다. 이것이 요가기술이 심리생리학적 수행과 정신적 수행(angas라 부르는)를 포함하는 이유이다. <요가경>에서 말하는 다음 것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 야마(禁制), 니야마(勸制), 아사나(坐法), 프라나야마(調息), 프라티야하라(制感), 다라나(執持), 디야나(靜慮), 사마디(三昧).
143. 요가의 기술
처음의 두 단계인 야마와 니야마는 확실히 모든 금욕 형태의 필수 준비행위이다. 아사나는 잘 알려진 요가적 자세를 지칭하는 말로 ‘안정되고 유쾌한’이라고 정의한다. 아사나는 인도적인 금욕행의 독특한 기법 중의 하나이다. 아사나는 인간 실존의 독특한 양식을 포기함에 있어 채택된 첫번째 과정이다. 아사나는 일종의 에카그라타이다. 에카그라타가 의식의 동요와 분산을 막아주듯이, 아사나는 가능한 한 움직임이 없는 자세로 환원함으로써 육체의 유동성과 소모성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 목적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에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거나 폐지하고자 함이다.
일반 사람의 호흡은 환경이나 자신의 심정적 긴장에 따라 변화한다. 이 불규칙성은 심리적 유동성 및 불안정성과 분산을 일으킨다. 사람은 노력을 통해 주의력이 깊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노력을 거부한다. 그래서 프라나야마(調息)에서는 호흡의 노력을 억제하는 것이다. 보쟈는 호흡과 마음의 상태 사이에는 늘 연관이 있다고 본다. 호흡과 의식상태의 연관성은 고대로부터 요가 행자들이 관찰하고 경험하여 온 것이다. 호흡을 리드미컬하게 또한 점차로 완만하게 함으로써 요가 행자는 완전히 깨어 있는 조건에서는 도달하기가 불가능한 어떤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수면 중의 호흡 리듬은 깨어있을 때의 그것보다 느리다. 호흡단련을 통해서 이와같은 수면 중의 호흡 리듬에 도달함으로써 요가 행자는 일종의 수면중의 의식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아사나, 프라나야마, 에카그라타는 각각의 실습이 지속하는 동안 인간적인 조건을 폐지하는데 성공한다. 미동도 없는 정지, 리드미켤한 호흡, 시선과 주의의 집중을 통해서 요가행자는 자신안에 통일을 이루게 된다. 프라티야하라(制感)는 보통 ‘감각의 철회’로 번역되나 외부세계의 지배로부터 감각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능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외적 대상의 지배로부터 이와같은 감각활동의 철수는 정신 생리학적 금욕주의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요가행자는 더 이상 감각이나 감각적 활동, 기억 등에 의해서 산만해지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다라나(집중, 이 말의 어근은 dhr로서 ‘단단히 붙잡는다’라는 뜻으로 ‘한 점에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요기명상인 디야나를 파탄잘지는 ‘하나의 통일된 생각의 흐름’이라고 정의한다. 디야나는 의식을 사물 속에 침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의식이 사물의 본질 속을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설명하기 힘들다.
144. 요가에서의 신의 역할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 상키야학파와는 달리 요가철학에서는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물론 이슈바라는 창조주가 아니다. 그러나 이슈바라는 해탈과정을 촉진시켜줄 수 있다. 요가를 선택한 사람만이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파탄잘리에 의하면 신적인 도움은 갈망이나 느낌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이슈바라와 푸루샤간의 형이상학적 교감, 즉 이 양자의 구조적인 일치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교감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슈바라는 영원히 자유롭고 결코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하나의 푸루샤이다.
이슈바라는 외부로부터 요가철학으로 들어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프라크르티 그 자체가 현존의 환상적인 함정에 빠져 있는 수많은 個我의 해방의 떠맡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 신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탄잘리는 이슈바라가 경험적 실재(experiential reality)이므로 구원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 신을 도입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어떤 요기들은 이슈바라에 헌신함을 통해서 삼매를 얻었다.
파탄잘리는 고전적인 전통에 의해서 확정되어 온 모든 요가적 기법의 효능을 집대성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 이슈바라에 관한 집중과정에 의해서만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 모든 일련의 경험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순전히 수행자의 의지와 힘에 의존하는 주술적인 요가의 전통과 더불어 또 다른 하나의 ‘신비한’ 전통이 있었고 이 신비한 전통에서 요가 수련은 적어도 신에의 전념이라는 방법에 의해 보다 수월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슈바라는 요가 행자의 원형 즉 요가학파의 보호자인 거대한 요가행자인 것이다. 파탄질리는 이슈바라를 태고적 성인들의 구루였다고 본다.
145. 삼매와 초능력
집중(다라나)에서 명상(디야나)에 이르는 길에는 어떤 새로운 기법의 적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일단 요가 행자가 집중과 명상에 성공하면 삼매를 실현하는 데도 새삼 필요한 것은 없다. 삼매는 대상을 개념이나 상상력의 도움 없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관조상태를 뜻한다. 그 대상의 본래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태, 마치 ‘저절로 텅빈 것’처럼 드러나는 상태이다. 삼매에선 ‘대상에 관한 인식’과 ‘인식의 대상’사이에 하나의 진정한 일치성을 갖는다.
공간 안에서 혹은 어떤 상념에 관한 일점에 자신의 생각을 집중 고정시킴에 의해서 삼매가 성취될 때 이것을 有想三昧라 부른다. 한편 어떤 관계와도 분리된 즉 타자의 개입이 없는 존재에 관한 완전무결한 포용인 하나의 합일을 얻을 때 無想三昧가 실현된다. 유상삼매는 그것이 진실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케 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의미에서 해방의 한 수단이지만, 무상삼매에서는 전생의 모든 심적 기능의 印象이 소멸되며, 또한 과거의 행위에 의해서 이미 작동된 업력이 정지된다는 것이다. 삼매 안에는 인도가 추구하는 ‘지식’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역설적 과정인 ‘국면의 파멸’(rupture of plane)이 있다. 요기가 초능력을 얻는 것은 바로 이 상태에 도달했을 때이다. 즉 집중과 명상과 삼매에 의해서 요기는 어떤 초능력을 얻는다.
인도인의 관점은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에 적극적인 가치를 둔다. 왜냐하면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그가 얻은 힘은 그가 포기한 쾌락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이다. 금욕적인 고행을 함으로써 얻는 힘은 인간이나 악마 혹은 신들까지 나아가 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