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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의 신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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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종교연구>
------종교의 물상화의 극복을 통한 인격적 관점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종교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서슴없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교단의 명칭을 댄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입니다”라거나 “불교입니다”가 그것이다.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는 종교라는 개념은 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단체 혹은 공동체를 의미하며, 이러한 해석은 묻고 답하는 양자 간의 대화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바로 양자의 대화에 아무런 문제를 야기치 않았던 그 종교라는 개념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종교라는 개념을 스미스의 견해를 통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스미스는 종교라는 개념에 의한 해석에 대해 비판한다. 스미스는 종교라는 말을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보면서 바로 그와 같이 우리가 종교의 정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던져주는 암시는 그 실패가 자료 자체의 성질로부터 기인할지도 모른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종교에 관해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인생과 우주 전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종교가 지니고 있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성질이야말로 종교가 지닌 그 본래의 의미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즉 종교를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와 같이 하나의 명사로서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사적 표현보다 형용사적인 점 즉 종교적이라는 것이 보다 종교에 가깝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종교사 안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통해서 ‘종교’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1)종교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의 역사
문명권밖에서 살아온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체계를 지칭하는 이름을 지닌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다”라고 말할 뿐, 더 이상 자신들의 행위를 별도로 상정하여 이름짓거나 이를 하나의 체계로 보거나 혹은 자신들의 삶과 유리된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즉 하나의 규정된 틀을 지닌 종교-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나 불교와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신앙의 세계를 표현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고전 사전에 종교에 관한 단어를 다루는 항목의 첫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어떤 단어도 영어의 종교나 종교적이라는 말에 정확하게 해당되지 않는다.” 즉 religion이라는 말이 전달하는 일반적 관념을 표현하는 말이 그리스어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에 대해서 생각했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생각했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 관해 알아 보아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 분야의 모든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명확한 단일체가 아니었다”라고 한다. 즉 제도상으로나, 개인의 감정에 있어서나 종교는 어떤 특수한 것으로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종교는 자신들의 삶이나 마음 속에 하나의 별개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이란으로 눈을 돌려도 결과는 같다. 한 현대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란 사람들의 세계에는 종교라는 어떤 추상적 관념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럼 인도전통의 경우를 살펴보자. 인도들은 인간의 행위를 그들이 지닌 세속적 삶의 삼분법에 의해 셋으로 분류한다. 순전히 즐기기 위하여 하는 행위들(kama), 어떤 목적(artha)을 위한 수단이 되는 행위들, 그리고 의무(dharma)로서의 행위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의 다르마는 예의 범절로부터 공법, 사원의 의례로부터 카스트의 의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것이 현대학자들에 의해 힌두인들의 체계적 종교를 뜻하는 단어로 제시되어 온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그러나 ‘다르마’라는 말안에는 힌두교 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면이라 볼수 있는 것들이 빠져 있다고 스미스는 지적한다. 예컨데 다르마를 중요하게 만드는 업의 법칙과 같은 교리가 빠져 있으며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다르마를 넘어서서 해탈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요소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나라들의 종교와 관련된 현상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적 이해는 종교적 생활을 하고 있는 개인 인격체들로부터 이론적으로 추상화될 수 있거나 가시적 형태로 정식화되고 외형화될 수 있는 어떤 일반적인 종교적 진리나 체계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진리나 체계의 필요성이 고대에는 없었는데 점차적으로 이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종교라는 개념의 발생과정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서양에서의 ‘종교’라는 개념의 변천사
종교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여진 것인가? 몇 예를 제외하고는 19세기 이전에는 어떤 종교의 이름도 정식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95) 그러나 17세기부터 유럽인들, 특히 그들 가운데 지성인들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태도, 그리고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발전시키면서 종교를 하나의 개념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라는 명칭을 신앙인들이 개입하고 있거나, 신앙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어떤 체계에 사용했다. 즉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내적 문제들로부터 외적 문제들로 전환되었고 성스런 것에 대한 인간의 개인 인격체적 감각으로부터, 그 결과인 가시적 산물 혹은 역사적 축적물로 관심이 전환된 것이다.
칼빈이 자기저서에서 밝힌 것들 즉 교리체계, 교회의 관습들, 성서와 성찬의 해석은 그 자체가 religio는 아닌 것이다. 칼빈이 말한 religio는 사람들 속에서 예배를 통해 개인 인격체적이고 역동적인 하느님의 인식을 세우고 유발해 주는 것들 혹은 그들을 이런 내면적인 것에 인도해 주거나 가르쳐 준다고 믿었던 것들이었다. 칼빈은 이런 인식에 ‘그리스도적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체적 체험이 아니라 그것으로 이끌도록 칼빈이 밝힌 바들을 종교라 부르고 있었다. 즉 교리와 행위의 체계가 인간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과 사랑을 일깨워 주든 아니든 그 자체로서 종교라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차이는 실로 중대하고 크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이와같이 17세기 후기 계몽주의가 되면서 religio는 관념이나 신조들의 체계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 예로서 스미스는 쳐베리의 허버트경이 자기저서에서 한 종교가 진리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어떤 방법을 고안해 내는 일을 의도적인 자기 임무로 삼고 있는 것을 들고 있다. 스미스는 허버트가 한 종교의 진위를 그 종교의 교리의 진위로 들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사고방식이고, 이런 사고방식이 사물에 대한 주지주의적이고 비인격체적인 도식화를 강조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나타낸 것이다.
17세기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지주의적 시기이자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는 논쟁과 갈등의 시기였다. 종교라는 개념의 주지주의화는 인간지성이 우주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나타나는 시대적 경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이해가 18세기 중엽쯤에는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철학에서도 일어나서 진리의 개념에 있어서 인격체적 정향으로부터 비인격화된 지적 체계로, 그리고 이상적 진리관으로부터 논리적 진리관으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가 종교개념에 새로운 현상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주로 19세기 독일에서이다. 종교개념을 수정하도록 하는 것은 슐라아어마허의 저서에서 관찰된다. 그는 당시의 교양있는 독자들에게 종교를 신조들이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 생각할 것을 호소했다. “나는 그러므로 그대들이 보통 종교라 여기는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내적 감정과 성향에 유의하기를 요청하노라.”
슐라이어마허의 저서와 그것이 대표했던 낭만파운동은 종교라는 말의 의미를 종교적 삶의 내면적이고 비지적인 면으로 전환시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종교개념을 확대함으로써 그 후로는 그것이 하나의 지적 개념으로서 비지적이고 지적인 것을 함께 내용으로 포함하게 되었다. 즉 종교라는 개념은 계몽주의적 의미에서 사람들이 믿었던 여러 체계들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카톨릭적 의미에서의 의례적 실천만을 의미하지도 않았으며, 슐라이어마허의 내면적 감정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가 수세기의 세월을 거쳐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라는 관념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자료들이 지닌 역사적 성격이 학자들에 의해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 중 역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철학자가 헤겔이다. 그는 종교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외에도 종교를 하나의 개념으로서 즉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과정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자존적인 초월적 관념으로서 정립했다. 헤겔은 종교는 그 자체로 실재적인 것, 인간이 생각해야 할 한 위대한 실재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사고가 헤겔이후 서양인들의 사고를 계속 따라다니게 되었다.
헤겔의 제자 중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란 책을 출간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무엇을 본질이라고 했는가가 아니라, 종교일반 그리고 특정한 종교에 본질이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이런 본질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 왔다. 1900년 전후로 해 수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았던 것이 종교의 정의문제이다. 이것은 물상화의 가정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즉 그 이전 세대가 만들어낸 개념들에다 하나의 우주적 정당성과 같은 궁극적이고 본유적인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미스에 의하면 서양에서 계몽주의 이후 특히 유럽에서 종교의 내적 의미보다 외부적인 지성적이고 교리적인 체계들에만 관심이 쏠려 있어 교리를 통하여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종교의 내적인 측면보다 외적인 표피에 관심을 지니게 되고 종교의 형용사적 의미보다는 화석화되어 버린 명사적인 실체에 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미스는 종교사 안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결국 물상화되어 버렸음을 지적함으로써 그런 의미의 종교의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종교는 결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종교는 바로 그 종교적 진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격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1) 신앙의 표현
스미스의 전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들자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이라는 단어는 스미스 사상을 이해하고 해독하는데 열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스미스의 눈을 통해 종교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스미스는 종교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간 안에서 왜곡된 측면을 종교사를 통해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물상화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종교의 물상화로부터 본래의 종교 모습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의 시선을 신앙에로 돌리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스미스는 지금까지 인류가 종교적 삶의 축적된 전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발굴하고 밝히는 작업을 해 왔다면, 다음 단계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전통의 도움을 받아온 사람들의 인격적 신앙을 발견하고 알리는 일이라고 본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인격적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나와 다른 종교전통에 투신한 이들의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설사 그 이해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 타종교인들의 신앙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인격적 신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스미스는 이 작업이 추리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추리를 통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철저한 역사성에 기초한 추리이어야 함을 스미스는 강조한다. 즉 우리는 종교사를 통해 신앙의 자취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신앙이 무엇이어 왔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라고 할 때에는 다분히 추상적인 연구로 그쳐버릴 위험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이고 개념적 차원에서 신앙을 정의하고자 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학문적 연구가 그러했던 것처럼 학자들은 신앙을 어떻게 규정해 보려는 유혹을 느낀다. 무언가 규정치 않고는 그대로 두어선 직성이 풀리지 않는 학자들의 악습은 종교의 생명을 보지 못하게 가리었고 그들의 언어의 틀 속에 종교의 생명을 가두어 버려 신앙인이 지닌 신앙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게 차단시켜 버렸다.
<,이같이 신앙이 개인 인격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신앙은 결코 정의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철학적으로나 인식적인 세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해온 습관에 의해서 신앙을 어떻게든 규정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악습에 의해서 지금까지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 모른다. 이것은 왜곡된 종교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
이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며 특히 종교학자들이 이 측면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지 않는 이상 종교의 생명은 여전히 그들의 언어세계 속에서 죽은 시체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말고, 신앙이 무엇이어 왔는가를 물으라는 스미스의 새로운 물음의 시각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할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무엇이어 왔는가’라고 묻게 되면 종교사 안에서 드러난 신앙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하는 것은 스미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는 결코 신앙을 추상적인 관점에서 숙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럼 스미스는 종교사적 관점에서 신앙의 표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럼 스미스는 종교사 안에서 어떻게 타인의 신앙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보는가? 그는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는 시적 언어나 산문을 통해서 말로 표현되는 것과 의례와 도덕을 통해서 행동양태로, 예술이나 제도, 법률, 공동체, 인격 그리고 그밖의 다른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들고 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을 살펴보자.
먼저 예술에 나타난 신앙의 표현을 고찰해 보자. 스미스는 불자들의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 불상의 手印이 얼마나 중요하며 수피들의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 잘랄 알 딘루미의 시, 어느 힌두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엘로라의 사원건축물이나 춤추는 무왕의 彫像,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바하의 B단조 미사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한다.
스미스는 불상들의 모습 안에서 우리는 그 돌을 불상으로 만든 조각가의 인격체적 신앙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불상이 그의 신앙의 표현으로 우리는 그 불상을 보면서 조각가가 표현하려고 한 이 육화된 진리-자비와 의로움으로 삶의 한복판을 살아감으로써 가장 순수한 평온 속에서 마치 피안에 이른 듯 전적인 기쁨과 평화를 얻은 존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불상을 통해서 이 세상을 넘어선 어떤 것을 보고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불상을 보면서 그 이상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녕 무딘 감각의 소유자들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둘째로 스미스는 공동체에 나타난 신앙의 표현을 고찰하고 있다. 공동체가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은 로마제국에 침투한 그리스도교 교회,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의 움마, 동남아시아로 뻗어나간 불교공동체, 서양 사회내에 존재하는유대교공동체와 같이 종교적 공동체가 다른 사회집단과 별도로 발전된 경우를 말한다. 이같이 공동체는 개인의 인격체적 신앙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뒤르껭은 종교를 사회로부터 도출시킨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종교적 공동체가 신앙의 표현으로 중요하지만, 이것이 종교에 있어 궁극적이거나 원초적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스미스는 다음을 든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공동체를 가장 근본적 개념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등장한 사회적 반항아나 혹은 은둔자나 산림의 수행자, 혹은 예수나 무하마드와 같이 공동체를 발생시킨 개혁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또 우리는 신앙을 추구해 가기는 하나 공동체에는 집착하지 않는 현대인 그리고 한 공동체에 속하기는 하나 자신의 신앙을 그 안에 갇혀진 것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미스는 공동체가 신앙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궁극적이고 원초적인 것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공동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 보거나 사상적으로 보거나 궁극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신앙의 궁극적인 것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개인 인격체적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개인 인격체적 행위이며 그것이 비록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공동체도 개인을 대신해서 해줄수 있는 행위는 아니라는 점을 스미스는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미스가 신앙의 표현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엄격한, 그리고 가장 명백하고 희귀한 것으로 인격을 들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그 다음으로 신앙의 표현으로써 들수 있는 것이 ‘의례와 도덕’이다. 그 예로서 도덕이 의례화되어있는 유대교의 토라와 이슬람의 샤리아를 든다. 토라와 샤리아에서 처럼 종교적 신앙의 상당한 부분은 의례적 실천 속에서 표현되어 왔으며, 도덕적 조문이나 윤리적 노력으로 표현되어 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율법이 그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는데 반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전통이 지닌 율법중심성을 명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윤리는 논리적으로 종속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적인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이 세전통은 모두 올바른 행위를 인격적 신의 의지로 보았다. 그러나 이와같은 윤리관은 불교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궁극적 실재가 법(달마)으로 봄으로써 법에 따라 올바른 행위와 윤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종교간의 의례와 윤리적 표현이 차이는 있지만, 결국 스미스는 윤리나 의례도 그것이 개인 인격체의 신앙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그 공통성을 발견할수 있다고 보고 여기서도 역시 개인 인격체의 신앙이 중시됨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언어 즉 관념과 말을 통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것은 지성인들의 중요한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언어가 제1차적으로 중요한 표현방식이 되었다. 사도신경에서 틸리히의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전통은 다른 어느 전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산문을 통한 신앙의 정식화에 지속적으로 중점을 두어왔다. 이와같은 그리스도교의 경향은 그리스 사상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상은 전형적으로 주지주의적이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어온 전통은 이성에 대한 신앙을 배양해 왔고 이 신앙에 의해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조를 신앙의 하나의 표현이라고 보기보다는 신앙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생기면서 엄청난 혼동을 발생시킨 것이다.
종교언어가 개념화되고 물상화되는 과정에서 진조를 통해서 표현되는 언어적 표현은 신앙과 일치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언어체계 속에서 타종교인에게 ‘너는 무엇을 믿는가’라고 묻는다. 그럴 때 불자들은 당혹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언어의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종교언어적 진술을 통해 우리가 이를 표현한 이의 신앙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미스는 종교적 진술을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즉 종교적 진술이 구성하는 단어와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볼 것이 아니라, 그 단어와 구절이 그것을 얘기한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했고, 그후 신앙의 표현으로 작용해온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해왔는가를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언어적 진술은 그것을 신앙의 표현들로서 산출해낸 사람들의 생동적인 인격체적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로써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도겐의 정법안장을 연구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정법안장이라는 언어세계를 통해 드러난 그의 신앙의 세계에 참입하기 위함이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미스는 예술적, 도덕적, 공동체적, 언어적 표현들이 신앙의 표현양식임을 말하면서 이 표현들에서 그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한 개인인격체의 신앙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신앙적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표현들의 타당성이나 그것이 표현하는 신앙의 타당성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적 표현을 하는 이들의 개인 인격체적 신앙을 만나는 것이 그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스미스가 모든 신앙적 표현에서 강조하고 있는 개인인격체의 신앙에 대해서 좀더 깊이 고찰해보기로 하자.
2) 개인인격체의 신앙
스미스는 개인인격체적이라는 것을 개인주의적인 것과 혼동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개인인격체의 신앙이란 단순히 개인주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여러 다양한 신앙의 표현을 한 사람의 인격 그 자체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매혹적인 성품을 지닌 한 인격을 만났을 때 그가 지닌 신앙은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지니고 내게 전달됨을 체험한다. 필자가 일본에서 만난 도겐선사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할 때 앞서 말한 종교적 표현들이 실제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부차적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만난 그 매혹적인 사람의 신앙이 나의 신앙의 세계에 비추어서 이질적이거나 다른 언어적 진술체계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스미스는 신앙에 있어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난다.
“어떤 두 사람이 같은 종교공동체의 정식구성원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은 신앙이 그의 인격속에 육화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볼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종교전통에 속한 사람들일지라고 그들의 신앙이 같다고 볼수 없다. 나의 신앙이 내 동생의 신앙과 다를수 있고 나의 이웃들 가운데 한사람의 신앙은 또 한사람의 신앙과 다를 수 있다. 또한 어느날 아침의 어떤 한 사람의 신앙은 그 전날 오후의 신앙과도 다를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추리이긴 하지만,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이같이 우리가 신앙을 있는 그대로의 신앙으로 볼수 있는 눈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초월의 세계에 눈을 뜸을 의미한다.
“나의 신앙은 내가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적나라한 모습으로 취하는 행위이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자기 자신 사이에 세워놓고 그 뒤에 자신을 숨길수 있는 그리스도교라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주장했듯이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적 신앙일반, 불교신앙, 힌두교 신앙, 유대교 신앙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신앙, 너의 신앙, 그리고 나의 신도 친구의 신앙과 나의 한 유대인 이웃의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개인 인격체들이다. 물론 우리는 속된 공동체 속에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으며, 이런 저런 속된 집단적 명칭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초월에 관한 한 우리가 그것을 만났다면, 우리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들은 각자 한 개인 인격체이지 유형이 아니다.
하늘에서건 땅에서건 규범적 그리스도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은 각각 개인적이고 특수하고 직접적이고 개별적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뿐이다. ”
이와같은 스미스의 견해는 그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적 중심이라고 비판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신앙에 대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에서 온 것이다. 스미스가 말한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월은 각 종교의 축적적 전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자신이 속한 축적적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왜곡해 온 것은 그 축적된 전통을 물상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스미스는 지금까지 종교사 안에서 축적적 전통을 물상화시켜 바라보던 시각을 벗어나 축적된 전통이 지닌 신앙, 초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했고, 그 초월의 세계에서 모든 종교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초월의 세계를 또다시 학자들은 궁극적인 실재로 규정하고자 한다. 존휙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고 볼수 있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해온 습관대로 규정치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악습을 갖고 있다. 학자들은 명사적인 표현을 좋아한다. 그러나 신앙을 명사적으로 표현하는 그 순간, 이미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을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로 규정하는 그 순간, 이미 신앙은 신앙으로서의 생명을 상실케 된다. 명사적 표현보다 형용사적 표현이 더욱 신앙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즉 신앙이나 초월은 명사보다 형용사적 표현이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이 다만 살아있는 인격체를 통해서만 드러나며 인격체를 떠난 신앙은 있을 수 없다고 한 스미스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앙은 깊은 개인 인격체적인 것이며 역동적이고 궁극적인 것이라고 본 스미스는 신앙이야말로 우리를 고뇌나 탈아적 상태 혹은 지적 양심이나 단순히 일상적인 가사들 속에서, 온 우주의 하느님과 연결시켜 주며 또 우리의 고통받는 이웃과 연결시켜 주는 직접적인 만남의 장이라고 한다. 비록 우리의 이웃이 자신의 제도화된 종교공동체 밖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인격체를 인격체들로서 연결시켜 주는 만남의 장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미스는 신앙을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한다. 즉 호모 릴리지어스로서의 인간은 바로 가장 높고 진실한 의미에서 신앙을 지닐 때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앙을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했을 때 과연 이것은 스미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스미스는 이것을 ‘초월에 대한 자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래 초월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던 존재이며, 바로 그 초월에 눈뜨는 것이 신앙에 눈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초월에 대한 진리에 눈을 뜨고, 무슬림들은 코란을 통해서, 불자들은 三寶를 통해서 각각 초월의 진리를 자각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은 인간이 초월에로 나아가도록 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초월에 대한 자각이 곧 신앙이며 신앙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스미스는 “우리가 신앙을 우리의 중심적 진리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되게 우리 자신으로서 살수 없고 또 서로 간에도 참되게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앙이 바로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인류의 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미스의 가르침의 정점을 만나게 된다. 스미스는 말한다.
“우리가 지녀야만 하는 이상적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보아야 하는 하느님이 존재하고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이웃이 존재할 뿐이다. 이 둘로 족하며 이 둘이 나에게 족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내가 추구해 가야 할 이상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신앙의 이상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며 나의 이웃자신인 것이다. 신앙은 영원의 일부가 아니라 영원에 대한 나의 현재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면 이와같은 스미스의 가르침에 경청하고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다시금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종교연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의 인격주의적 종교연구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메시지는 지금까지의 종교연구 방법론을 다시금 재고해 보고, 참으로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방법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 행해져온 종교의 물상화에 대한 극복이다. 다른 것과는 달리 종교는 신앙이 그 중심에 있다. 바로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타학문들이 해오던 방법론을 종교에도 적용해 온 것이다.
스미스는 바로 이 방법론이 지닌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그것으로부터 종교를 종교답게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신앙에 눈을 뜨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스미스의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중 하나는 신앙과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신앙이라는 단어는 스미스에게 있어서는 믿음(BELIEF)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시 스미스의 신앙과 믿음의 차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3) 믿음과 신앙
faith와 belief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종교철학에서 이 두 개념에 대한 토론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있어서 이 단어들은 거의전문 학술용어가 되다 시피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faith는 신앙으로, belief는 신념으로 번역한다. faith는 대체적으로 신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헌신을 뜻하며(실존론적), belief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긍정을 뜻한다(명제론적)
스미스는 서구 근대에서 믿음의 위기에 대해 가장 통렬한 비판을 했다. 그는 <신념과 역사>라는 저서에서 믿음 혹은 신앙이 어떻게 근대서구에서 신념(belief)으로 변질되고 오염되어 갔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추구하는 종교철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믿음문제에 대한 스미스의 공헌은 그의 역작인 <신앙과 신념>속에 담겨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앙과 신념이 질적으로 틀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인들은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대치해 왔다고 통박했다. 나아가 신앙은 인류에게 고유한 자질임을 역설하면서 보편적 신앙 혹은 신앙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스미스는 인간이 초월을 지향하는 고유한 자질을 믿음이라 규정짓고(faith as human quality) 전 세계 전통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증거된 초월적 믿음을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서구 문화 특히 근대서구문화가 이 고유한 믿음의 자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근대 서구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일방적 관심이 믿음을 교리적 명제적 사변적 신앙 신념으로 변질시켜 놓았다고 질타한다. 전 세계의 문맥에 놓고 볼 때 서구 철학적 전통은 언제부터인가 지식의 구원적 효과를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조명된다. 주로 종교적 신념의 정당성 문제를 다루어 왔던 근 현대 종교철학자들은 결국 엉뚱한 나무를 보고 짖는 결과를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과 믿음에 대해서 혼동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양자를 구별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신앙은 하나의 덕이나 믿음은 그렇지 못하다.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덕스러움이 아니라 믿음은 다만 사람이 믿는 것이 진실과 양립할 때에만 비로소 덕이 된다. 신앙은 지성적으로 포착할수 없다. 신앙은 진리 그 자체가 원초적으로 중요함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이 역사적인 것임을 안다. 그것은 우리를 자의식의 극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한다. 믿음의 새로운 개념은 내적인 확신과 외적인 실재사이의 의존적 관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상징을 통한 신앙의 이해
스미스는 The faith of other Man(1962)의 서론에서 “앞으로 인간의 종교적 삶은 그리고 참으로 삶을 종교적으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인정하는 종교적 다원성안에서 영위될 것이다”고 한다. 17쪽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는 이 새로운 세계사회를 세계 공동체로 바꾸는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듯이 획일적인 계획으로 세계공동체를 이루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공산주의 자들의 계획은 실폐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인문학자들이나 세속적 합리주의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주장이 모든 사람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21쪽. 그들은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거기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이러한 자신들의 견해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협력이 이루어 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주의자들의 견해는 인류의 대부분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생각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획일화된 생각을 가지는데 문제의 해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가 새로운 형태의 인간이 되어야 함에 있다고 스미스는 강조한다. 22 그 방법으로 스미스는 우리가 세계에 퍼져 있는 다양한 공동체들의 교리 제도, 종교적 실천, 상징 및 규범들이 정확히 무엇이었으며 현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이러한 것들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세 수준에서 타종교의 신앙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첫째 역사적 고찰로서 이는 축적적 전통 즉 교리 제도 실천 상징 공동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둘째는 현상학적 고찰로서 종교적인 의미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앙을 알기 위한 해석과 의미의 파악이며, 셋째는 신앙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보편적 인간현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상상적인 공감을 통해서 이루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우리의 관심사가 외형적인 체계보다 내적인 신앙이 있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나는 인류의 대표적인 종교집단들의 체계로부터 각기 한가지씩의 특징적인 항목, 다시 말하자면 그 공동체의 신앙을 어느 정도 가장 잘 드러내 줄수 있는 항목을 선택하여 이 항목이 이것을 신앙의 표현으로서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항목은 하나의 이미지, 곧 像이거나 文句거나 의례 등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스미스는 여기서 그 방법론적으로 각 공동체의 신앙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들을 각각 연구한다. 그가 택한 것은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다섯 개의 주요 집단, 즉 힌두인들, 불자들, 무슬림들, 중국인들 및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에 관한 것이다. 스미스는 한 가지 상징을 통해서 한 집단의 신앙을 살펴보는 것이 부당한 일이 아닌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에 대해 단지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는 한 부분을 다소 깊게 살펴보는 것이 보다 넓은 영역을 피상적으로 훑어보는 것보다 낫다고 개인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스미스는 세계적인 종교전통이 잘못 이해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깊이를 간과하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와같이 스미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신관(신학적 상징), 중국인들의 음양태극도(조화의 상징, 보완적 이원론), 불교에서는 미얀마의 신뷰의식(출가의식), 힌두인들에게서는 궁극진리의 말, 즉 절대진리와 주관적 진리의 일치인 Tat tvam asi라는 3개의 범어단어를 들었다. 이 뜻은 “that thou art”로 “너는 바로 그 실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슬림의 경우는 신앙고백을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 각각을 살펴봄으로써 스미스의 신앙관에 대해서 접근해보기로 하자.
ㄱ) 힌두인들의 신앙
스미스는 힌두인들의 신앙으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상징들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으로 tat tvam asi를 든다. 여기서 tat는 그대를 뜻하며, asi는 동사 to be의 제2인칭 단수형이다. 그러므로 tat tvam asi는 바로 ‘그것이 그대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 구절은 네가 바로 그 실재, 곧 브라흐만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범아일여라는 유명한 교리나 인간의 영혼이 바로 신 즉 궁극적인 실재이다라는 말 또는 개별적인 자아가 바로 세계의 영혼이다라는 말로도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그대’라는 의미는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에 있어서 모든 존재를 포괄하고 있는 전체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이며, 신의 개념보다 선재하고 초월해 있는 브라흐만, 무한하고 절대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대가 그것이다”를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고 이 글귀가 대대로 뛰어난 지식인들과 수행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고 본다. 즉 힌두교인들에게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언설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진리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스미스는 힌두인들에게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세 단어가 그들의 깊은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종교적 체험의 기반이 되어왔음을 강조한다.
스미스는 자신이 이 구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만일 자신이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무언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힌두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 상징을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생각은 우리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도 있음을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종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을 해석하려 할 때마다 이런 오해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진리가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점차로 항상 팽창력을 지닌 채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며 이를 접하게 됨에 따라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지혜의 단면들이 잇달아 나타나고 동시에 앞서 생각지도 않았고 알수 없었던 불확실성의 심오함이 새로이 드러난다는 종교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신비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종교적 상징을 인간의 삶의 네 가지 영역 곧 지적인 영역, 심미적인 영역, 도덕적인 영역, 역사적 발전과 창조성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 네 가지 측면에서 tat tvam asi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지적으로 진리일 수 조건은 주관적인 진실성과 객관적인 타당성이 합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과 자신에게 자기 스스로가 진정으로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만을 말하고 또한 실제로 진실된 것만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달하는 한 지적으로 구원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tat tvam asi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미스의 해석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가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울 때 우리는 기계적으로 그 명제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암기하고 앵무새마냥 반복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 진리를 진정으로 믿지도 않으면서 남이 진리라고 하니까 교과서에 그렇게 씌여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답을 그대로 베껴서 시험답안을 작성함으로써 나자신을 속인 경험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바로 이것은 주관적인 진실성이 결여된 경우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진실성만으로는 지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필요로 한다. 나 혼자만 그것이 진리이고 외부세계의 실제적인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적인 진리에는 주관적인 진실성과 객관적인 타당성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tat tvam asi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지적 진리의 양측면이 일치되는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또 예술적 측면에서도 스미스는 같은 면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밀톤의 실낙원 을 읽어보지도 않고 혹 읽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매우 지루하게 느꼈으면서도 그 작품을 위대한 시라고 떠벌리고 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꼭 밀톤의 실낙원 이 아닐지라도 유명한 작품들이나 음악을 듣거나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나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해도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나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와같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미적인 비진실성에로의 거대한 압력을 받고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는 것을 가치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X는 아름답다”라고 믿도록 강요된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체 X는 아름답다고 믿어버린다. 우리 스스로 X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하고 그것을 깊게 내면적으로 느끼게 하여 진실되이 인격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주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일치될 때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도 않고 속임을 당하지도 않고 실제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진실성과 타당성, 주관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는 주관적으로 감지될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주어진다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입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셋째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미스는 도덕적인 것에서 우리가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좋은 것을 좋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어기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말한다. 그는 이 둘이 합치된 것이 바로 tat tvam asi라고 해석한다.
또한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육화, 타락을 말한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가 바로 신성이고, 경험적인 자아는 환상의 한 부분이며 인간의 눈을 가리워 초월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미혹적이고 환상적인 현상계라고 말한다. 스미스는 이 양종교가 말하는 것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스미스는 이러한 힌두교의 개념을 사도 바울로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와 대비해서 볼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힌두교의 믿음인 tat tvam asi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미스는 tat tvam asi에서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진리의 일치됨을 읽었고 바로 우리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tat tvam asi에서의 “그대가 그것이다”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ㄴ) 佛子들의 신앙
스미스는 버어마의 신뷰의식(소년들이 사춘기에 이르렀을 때 행해지는 가입의례라고 할 수 있는 성년식)이라는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佛子들의 신앙의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이를 하나의 상징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이 의례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 상징 안에서 형체 그 너머에 있는 초월적이고 무한한 진리가 유한한 것 안에서 인간에게 그 무한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스미스는 종교적 상징들은 무한한 것 적어도 인간보다 위대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스미스는 앞서 살펴본 4가지 측면에서 신뷰의식을 해석하고 있다.
신뷰의식이라는 출가신화안에도 사실상 거의 보편적 타당성을 지니는 심리적인 진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부처가 안락한 생활과 보살핌 편안함속에서 살다가 고통스런 현실 안으로 들어감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심리적으로 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뷰의식 속에는 그러한 심리적 진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신뷰의식에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진리도 들어있다고 본다. 지혜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세속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일은 모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것도 신뷰의식이 담고 있는 정신적인 진리와 일치한다고 볼수 있다. 즉 진리와 선을 선택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밖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결단인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신뷰의식을 통해서 읽고 있는 점은 이와같은 심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진리의 측면뿐만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의식은 거기에 참여하는 그들 자신을 행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식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이 길을 걷고 이미 목표에 도달한 부처와 일치시키려는 것이다.
불자들이 진리를 찾아 출가함은 이미 자신들보다 먼저 진리를 발견하였던 부처와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도 부처와 같이 진리를 발견할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출가의 확신을 주는 것은 단지 영원에 대한 예감 때문이 아니라 출가가 실제로 그들을 부처와 같은 궁극적인 목표로 인도해 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도겐 역시 이런 확신을 지녔다)
필자는 스미스가 신뷰의식을 통해서 불교의 출가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보고 이런 점에서 그는 단순히 신뷰의식을 하나의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이 의식을 통해서 불교가 추구하는 그 진리를 읽어내고 그 진리가 지닌 생명을 불자가 아닌 우리 자신들도 가까이 느끼고 경험할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음에 깊이 공감한다.
ㄷ) 무슬림들의 신앙
이슬람 전공인 스미스는 무슬림들의 신앙의 상징으로서 그들의 信經(Creed)인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이다”를 든다. 이 신경은 무슬림에게 있어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예수라는 한 인격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났다고 보는데 반해, 무슬림들은 하느님의 계시가 코란이라는 언어의 형태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 코란의 말씀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이 신경이다. 그럼 스미스는 이 신조를 통해서 무슬림신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우선 이 신경은 하느님의 유일성을 말한다.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는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분은 홀로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그분만을 섬기라는 명령의 성격을 띄고 있다. 신앙은 많은 점에서 믿을 교리(belief)와 다르며 지적인 동의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측면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의 신경이라고 볼수 있다. 이 신경을 통해 무슬림들은 가장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경에 드러난 이슬람의 신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그 분의 권위를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에 자신을 헌신하는 적극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무슬림들의 유일신 신앙은 인간의 모든 전제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로 역사 속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즉 무슬림의 이 유일신 신앙은 다신숭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예배되어야 하며,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삶의 원리로 지키고 어떤 세속적인 힘이나 인물도 다른 사람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거나 이를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스미스는 해석한다.
스미스는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신비가들의 해석을 소개한다. 그것은 이 진술은 단계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은 없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을 진심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먼저 불신앙(unbelief)의 단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전통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그 전통을 통해서 종교 체계가 지닌 형식과 공상의 산물들 허위의 모습들과 알력들을 봄으로써 무신론의 황량함을 체득하고 전통의 무의미성과 그것에 따라오는 두려움을 경험했을 때 비로서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의 괴로움 속에서 신은 없다고 외칠수 있었던 자라야 다음에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하느님 외에....”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이다”는 명제에 대해서 스미스는 이것은 무함마드의 지위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그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 무슬림들이 이 고백을 하는 데에는 하느님은 인류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실 것이 있으며 그 말씀을 전하도록 때때로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즉 영원으로부터 인류에게 무언가 말씀하고자 하는 하느님이라는 확신이 이 신앙고백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란 도덕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하느님이 인류에게 이같은 도덕률을 전해주셨는데 그것이 무함마드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때로 종교를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추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입장은 이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며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예언자 미가가 말했듯이 “인간아, 하느님은 너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라고 고백한다. 종교적 삶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은 ‘추구’가 아니라 ‘응답’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스미스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슬람의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이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이다”라는 신경은 바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도권에 대한 인식을 우리들에게 심어주고 있으며 하느님은 계속해서 인류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올바른 것이며 우리는 이를 믿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수행함은 바로 이 의무가 신으로부터 유래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스미스의 해석을 접하면서 이슬람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에는 그들의 맹종적인 신앙의 행위가 거부감마져 들었지만 그들의 그 철저한 행위가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의 절대성은 바로 인간인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비로소 알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바다를 참 좋아한다. 고향이 바닷가라서 바다를 자주 찾곤 했다. 바다앞에 서면 난 하느님 앞에 선 느낌을 갖는다. 그 광활함앞에 나는 나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미소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성앞에 자신을 맡기고 의탁케 된다.
ㄹ) 중국인들의 신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