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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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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바빌론 유수동안 이방종교의 유혹은 그 매력을 잃어버렸고 마침내 유대교라는 종교가 탄생하였다. 야웨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은 아직 않았다. 새로운 신학은 이성적으로 증명되어서가 아니라 절망을 방지하고 희망을 고취시킬 때 성공을 거두는 법이다. 그들에게 야웨의 실재는 언어와 개념 저편에 놓여있다. 야웨는 그의 백성이 바라는 것처럼 항상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욥기>
욥기의 저자는 질문할 권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이런 막중한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적인 사변보다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같이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탈무드>
예루살렘 함락시 랍비 요하난은 관속에 숨어 예루살렘을 탈출했다. 그는 유대인의 반란에 반대하여 유대인은 국가가 없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그에게 예루살렘 서쪽 야브네에 바리새파자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비슷한 공동체들이 팔레스타인과 바빌론에 세워져서 긴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 공동체는 탄나임이라고 하는 학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랍비 요하난 아키바 이쉬마엘이 있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맞도록 해석한 구전율법을 성문화한 미쉬나를 편찬했다.
<유대교 통사>
유대교는 유대민족의 종교이다. 유대교에는 광의, 협의 두까지 뜻이 있다. 광의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천년에 걸친 유대민족의 종교현상 전부이며 협의로는 기원전 5세기 유대민족이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년간 믿어온 신앙체계이다.
BC1800-아브라함(메소포타미아 갈데아 우르-하란-팔레스틴-이집트)
BC1600-요셉이 에집트로 끌려감
BC1200-모세의 출애급
BC1000-솔로몬왕국(솔로몬이 이집트왕비를 맞아 이집트지혜문학영향으로 지혜문학발달)
BC922-남북조분열
BC587 -바빌로니아 포로유배(바빌론문화와 접촉)
BC538-예루살렘 귀환
BC336-323-알렉산더(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으로 헬레니즘문화와 접촉)
BC167-128마가비아로부터 이스라엘 독립
BC63- 로마가 예루살렘점령
AD73-유대인 대축출(디아스포라)
유대교 재건시대 (기원전 538-기원전 333)
헬라시대 (기원전 332-기원전63)
로마시대(기원전 63-서기 135)
랍비니즘시대(1-18세기)
현대 유대교(1750-현재)
1.모세이전의 히브리종교
기원전 2000년 사막에서 살던 셈족은 돌무더기와 돌기둥에 대한 신앙을 지녔다. 그리고 우물 샘 개울을 성스럽게 생각했고 나무에도 종교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탁월한 힘이나 역동성을 지닌 많은 신적 존재를 공통으로 부르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단수는 엘 엘로아 복수로는 엘림 엘로힘으로 표기되는 것은 초자연적 존재나 신격을 의미했다. (엘이 야훼로 바뀌는 것은 모세에 와서 됨)
사막에 사는 셈족과 신의 관계는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관계였다. 그러나 모든 신이 인간에게 아버지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니며 모든 신이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이같이 히브리인은 처음부터 선택되고 선택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1) 아브라함과 팔레스틴에로의 이주
아브라함의 조상은 사막에서 이동생활을 했다. 하브라함의 부족은 한동안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살았는데 아브라함도 거기서 태어났다. 거기서 하란으로 이동했는데 하란의 사회질서가 혼란상태에 있어서 기기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개인의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유일한 수호신을 신앙했다. 그 신의 이름은 엘-샤다이(El-Shaddai)라고 부르는 하나의 엘이며 그 신이 아브라함을 선택함과 동시에 아브라함이 그 신을 선택했다. 그신이 이삭을 바치라 명령했는데 결국 양을 대신 바쳤지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다 (이는 고대 인신공희 관습이 동물공희로 대체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벗어난 시기는 인도 이란어족의 침이이 시작할 때로 본다. (기원전 1750) 아브라함부족은 다른부족과 함께 비옥한 땅 나일삼각주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힉소스족은 이들에게 유화정책을 썼다. 이때 이집트가 흥기하여 힉소스를 추방하고 동부 지중해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은 추방을 as했다. 150년간 이집트인과 같은 지위를 누리다 그후 라암세스2세가 왕위에 오르고 새도시건설과 사원건립에 노동력이 필요하자 이스라엘인을 노예로 썼다. 이 곤궁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천재지변이나 이스라엘민족의 새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 두 희망이 모세에게서 실현되었다.
19세기 독일의 성서학자들이 구약의 모세오경에는 4가지 상이한 자료가 있다는 것을 판별하는 비판적 방법을 개발했다. 그 자료가 J(야웨), E(엘로힘:Elohim),신명기 기자(D), 제사장파(P )이다. J 기자는 야웨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창조주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인간과 신 사이의 분명한 구분에 대한 J기자의 인식이다. 인간 adam은 그가 섬기는 신과 같은 신성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땅(adamah)에 속한 존재다.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 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중 하나다. 아브라함의 신 엘은 굉장히 부드러운 신으로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찾아오고 심지어 인간의 형체를 취하기도 한다. 현현이란 이런 형태의 신성출현은 고대이교세계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야곱은 엘이 특별한 보호를 해 준다면 그 대가로 엘을 엘로힘(사람에게 신이 의미할수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말)으로 곧 유일하게 섬기는 신으로 모시겠다는 일종의 협상을 벌인 것이다. 신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믿음은 실용적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엘을 신뢰한 것은 엘이 그들을 위해 힘써주었기 때문이다. 엘은 철학적 추상이 아닌 것이다. 고대세계에서 마나는 삶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 마나를 제대로 전할수 있다면 신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셈이었다. 이런 실용주의는 신의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신관념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49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 일컫는 것은 신의 약속이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신은 고대신과 달리 인간의 곤경에 동참하지 않았고 인간들에게 에너지를 주입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대에는 첫아이는 신의 자손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이를 갖게 되면 신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므로 다시 충전시키기 위해 첫아이를 신께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이사악을 원치 않았다.)
<출애급>
출애급의 신은 잔인하고 편파적이고 살인적이며 심하게 편협한 성격이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단적으로 부족적인 신이다. 선택된 백성과 신의 선택의 신화는 신명기기자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편협하고 부족주의적 신학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한편 신명기 기자는 나약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계신 신에 대한 해석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출애급사건은 야훼를 확실히 이스라엘의 신으로 만들었으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웨야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사랑했던 그 엘과 동일한 신이라고 확신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야훼는 나는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의 내가 될 것이다를 주장하는 무조건적 신이다. 그는 자신이 택한 그대로 할 것이며 인간에게 아무런 보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자기백성의 역사에 개입하리라는 것만 약속했다. 출애굽 신화는 가장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질수 있음을 증명하는 신화다.
고대천신이 인간관심사를 돌보기에 멀리있는 듯하기에 바알 마르둑 대지의 여신은 인간과 친근하도록 개념화되었는데 이제 야웨는 다시 인간과 신의 간극을 벌려놓은 것이다.57
2. 모세와 야훼와의 계약
모세가 이스라엘인에게 야웨에 대한 숭배의식을 처음 소개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애급기 6,3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신을 엘샤다이라 불렀고 야웨라는 이름을 몰랐다.
모세는 야웨라는 강력한 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했다. 하지만 이 신은 자연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사실 모세도 야훼의 성격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같다. 다만 그는 체험을 통해 하나의 사명 즉 백성을 원하는 신과 신을 원하는 백성사이에 계약을 맺을 수 있느 장소인 시나이로 가기위해 자기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사명만을 알고 있었다.
모세의 지도력은 이집트에서보다 시나이(호렙)라는 성스런 산아래서 그 절정에 달한다. 즉 그는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간에 계약관계를 맺고자 하는 야웨라는 신과 이스라엘민족간에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인은 이동을 계속하려 했을 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는 야훼를 시나이산에 남겨두고 떠나느냐 어쩌느냐 하는 것보다 야웨와 소통하기 위한 중개수단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동식 신전을 만들로 이를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였다. 이것이 후기 히브리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법궤이다.
모세의 지도력은 이스라엘 종교를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모세 당시나 그 후에도 이스라엘인은 다신론적 신앙에 탐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 관습이 아직 그들몸에 배어 있었으며 한편으로 모세의 유일신 신앙이 단순히 신학상으로만 오직 한 신이 존재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실천에 대한 요구가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지속해서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나이산 아래서 일어난 아론의 배교에 대한 얘기에서도 알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40주야를 시나이산에 올라가 있을 때 그들은 난폭하게 되었다.
<야훼와 모세와 계약>
계약개념이 말해주는 바는 이스라엘인이 아직 유일신만을 섬기는 유일신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어느 신과의 계약이란 다신교적 상황 아래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랑엘인들은 시나이산의 신인 야웨가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 계약을 통해 다른 모든 신을 거부하고 오직 야웨만을 경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모세오경을 통해 유일신론을 말하는 단 한 문장도 찾기 어렵다. 십계명에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는 사람들이 언약에 충실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솔로몬왕은 다윗왕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도시 예루살렘에 야웨를 위해 가나안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성전을 건설했다. 솔로몬왕자신도 대단한 종교혼합주의자였다. 그는 각자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던 이방인 후궁을 거느렸고 이웃 나라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62
야웨종교가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은 언제나 존재했고 특히 기원전 9세기후반에 이런 위험이 급증했다. 기원전 869년 아합이 북이스라엘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은 두로와 시돈왕의 딸로 이교도였고 나라를 바알과 아세라종교로 개종시키기를 원했다. 그녀가 데려온 바알사제는 북왕국 이스라엘인중 추종자들을 얻었다. 아합 통치 말기에 전국에 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 엘리야와 바알사제간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승리자가 아니었다.
63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살육한 것이다. 이와같이 야웨신앙은 다른 종교를 격렬히 탄압하고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64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는 기축시대라고 명명된 시대이다. 문명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했다. 모든 주요문명은 평행을 이루며 발달했는데 이때 상인계급이 출현하여 왕사제 신전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다른 우대한 종교적 성찰과 더불어 상업주의 정신의 시장경제상황아래에 발달된 것이었다.
3. 야웨와 바알(엘리야예언자)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하비루와 공동전선을 펴고 가나안의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전 영토를 지배하게 된 것같다. 중요한 것은 출애급 히브리인들의 영향으로 하비루도 야웨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히브리인은 하비루와 가나안주민과 함께 하나의 국가 관념을 형성할수 있었다. 블레셋의 끊임없는 위협(기원전 1150부터 계속)속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영도아래 블레셋을 내쫓고자 했을 때 위 3부족은 힘을 모았다. 사울은 길보아산전투에서 죽었으나 그의 계승자인 다윗은 블레셋을 참패시켰다. 또 다윗은 기원전 1020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 법궤를 보관할수 있는 사원을 만들기로 계획하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실현도록 했다.216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그것은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과도시생활로 변천하는 과정에서겪어야만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이 사막에서 이주해 왔을 때 선주민들은 이미 발전된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었다. 가나안주민은 농경생활을 영위했기에 성숙한 자연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숭배한 신은 대개 농경신이었다 그 신들을 총칭하여 바알이라 했는데 이는 토지의 소유자를 의미했다. 엘은 바알보다 지위는 높으나 활동을 별로 않으며 바알은 지위는 낮으나 활발한 폭풍신이며 하위신 중 가장 상급자였다. 219
히브리농부들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전쟁에서 그들을 인도해주는 야웨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가나안 주민들과 함께 마을에 있는 고지대로 올라가서 그 지방의 바알에게 첫수확물과 감사제물을 바쳤고 선주민의 축제에도 참가했다. 이같이 야웨신앙이 바알신앙을 포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알 신앙에 야웨신앙이 흡수된 듯했다. 따라서 예언자가 나온 것이다.221
4. 예언자의 항변과 개혁
야웨가 바알신으로 화한다는 것은 자연종교로의 전환 즉 농경문화의 종교로 전환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바알신앙은 신을 물질화시키는 자연종교이다. 이에 반해 진정한 야웨신앙은 역사를 신의 활동영역으로 생각한다.
1) 히브리 예언의 기원
초기 예언자들은 BC1000년 판관기시대에는 느비임이라 불리웠다. 느비임은 신비체험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방언을 했다. 그러나 이들과 성격이 좀 다른 예언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다윗시대의 나단과 솔로몬시대의 아히랴이다.
단순한 자연종교로 타락한 윤리적인 야웨신앙이 엘리야에 와서 비로소 예언자로부터 본격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가르멜산 위에서 바알과 야웨가 힘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종교기록 중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데 여기서 엘리야는 야웨가 진정한 신이고 바알은 거짓된 신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엘리야가 바알 신앙을 영원히 근절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왕실의 반발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백성의 신앙을 전반적으로 뜯어고치기는 어려웠다. 엘리야가 갑자기 죽자 그의 제자 엘리사가 뒤이어 개혁운동을 계속했는데 그는 예후를 통해 정치 종교개혁을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이것이 히브리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사건이었다. 예후는 왕가를 몰살하고 바알 신앙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냈다.
즉 바알신앙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일소되진 않았고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팔레스틴에서 야웨의 우월성이 확립되었다는 결과가 빚어졌다. 그러나 바알숭배의식이 지역에 따라선 허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모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나선 것이다.
2. 부족신에서 보편신에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은 유일신론으로서 유대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자연은 피조물로서 탈성화된다. 하느님이 자연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의 겸허와 숭배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자연의 가치는 하락되고 인간의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연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만나게 된다.
초기 유대교 아브라함의 경우 부족의 신으로서 엘을 받아들인다. 이 신은 유일신이 아니다. 이 부족의 신이 민족 전체의 신이 된 것은 모세에 와서이다. 모세는 민족 전체의 신으로서 야훼를 받아들이고 계약을 맺는다. 이 신은 출애급 사건을 통해서 민족 전체에게 역사를 통해 체험된 신이다. 이스라엘인은 이 원형적 체험에 대한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도 이 야훼는 민족의 신이지 보편적 신이 아니다.
그것은 십계명중 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 신들의 전쟁속에서 야웨신앙은 우월성과 배타성이 강조된다.이스라엘인들이 출애급 이후 가나안 정착을 통해 농경신인 바알신과의 전투에서 야웨신의 우월성을 나타냈다. 이 야훼신의 유일성은 그후 계속된 예언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타난다. 예언자의 활동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보편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기원전 8세기 앗시리아의 팽창과 아모스의 등장에 잘 드러난다. 아모스는 민족신으로만 야훼를 인식하는데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아시리아 힘의 확장은 앗시리아의 신이 야훼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야훼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인들이 계약을 어긴데 대한 대가로 야웨는 비이스라엘인을 도구로 쓰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영역으로만 축소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가르침은 야후가 이스라엘의 민족신이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밝힘과 동시에 그분의 주권은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널리 미치는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는 점에서 히브리 신학사상에 있어 중대한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3.신명기
기원전 7세기 유아에 가장 중요한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모세의 재발견이고 이런 관심의 부흥에 대한 기념비적 문학작품이 있다면 신명기일 것이다. 신명기작가에게 경이감을 준 출애굽사건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지식의 원천이요 계약공동체의 토대요 계약상의 의무를 지켜야 할 의무가 되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르자 야웨 신앙의 부패가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선 두 요인이 작용한 것같다. 하나는 백성들이 겉으로는 야웨를 믿었으나 속으로는 가나안 선주민의 종교를 다시 신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한 요인은 지배층이 정치적 이유에서 앗시리아의 종교를 비호했다는 점이다. 유다는 앗시리아에 공물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다. 따라서 유다의 사원에는 앗시리아의 신가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건물이 세워졌다. 야웨의 제단은 한쪽으로 밀려나고 앗시리아의 태양신상이 사원내의 중앙을 차지했다. 아하즈의 뒤를 이은 히즈키야왕은 이사야의 충고를 따라 야웨사원을 다시 정화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뒤를 이어 므낫세왕의 통치 기간중에 앗시리아의 압력과 백성들의 종교적 타락으로 야웨사원은 다시 부패했다.
이때 므낫세는 아하즈보다 야웨사원을 더 부패시켰으며 바알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 앗시리아의 제사의식을 비호하는 국가정책과 엄격한 윤리적 행위를 싫어하는 백성들의 취향 사이에서 야웨의 신앙은 거의 완전히 쇠퇴해 버린 듯했다.
(므닛세는 앗시리아에 굴복함으로써 야훼신앙을 저버렸다. 므낫세는 야훼성전에서 바빌론의 신을 섬기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야웨신앙과 바알의 자연종교를 혼합시키려 하였다. 아시리아의 쇠태와 동시에 유대는 요시아가 개혁을 준비하였다. )
요시아왕의 개혁은 다음과 같이 행해졌다. 기원전 621년 요시아왕은 대사제에게 사원보수토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야웨의 법전이 발견된 것이다. 요시아왕은 이것을 보고 이것이 진정한 야웨의 법전인지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은 여자예언자 훌다로부터 그것이 진정한 야웨의 법전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자 요시아왕은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새로 발견된 법전의 조항을 마음과 목숨을 다해 지키도록 야웨앞에서 서약시켰다.
따라서 요시아왕의 개혁은 법전조항대로 야웨 이외의 모든 종교의식을 없애버렸다. 이어서 왕은 예루살렘 밖 야웨의 성력에 모든 사제를 모아놓고 사제만이 할수 있는 역할인 희생제의를 주재하도록 했다. 희생제의는 오적 거기서만 행해질수 있게 되었다. 개혁의 마무리는 신명기 법전의 윤리훈령의 이행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완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종교집중화정책을 너무 강조해서 지방도시가 예루살렘에 종속되는 현상을 야기시켰다. 예루살렘의 사제들은 이제 야웨신앙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지방민은 자기지역에 신이 임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해졌다. 즉 야웨와 백성관계는 이전보다 더 멀어져버렸다. 이러한 소원한 관계에 만족할수 없던 대중은 다른 종교의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신명기의 개혁 )
신명기는 유다의 신앙과 예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에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계약신앙의 바탕과 요구를 가르치는 책이다. 신명기가 강조하는 것은 야훼와 맺은 계약을 성실히 지키라는 것이다. 요시아가 신명기를 발견하게 된 것은 성전을 보수하던 중이었다. 이 점은 그가 신명기에 의해 개혁을 시도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신명기는 이전부터 내려온 책도 아니다. 아무튼 신명기 사상은 요시아 개혁의 틀을 전해준다. 신학적으로 신명기신학의 가장 큰 결함은 역사를 통한 야훼의 활동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야훼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치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예언자
*왕국시대(사울 다윗 솔로몬)-엘리야
북이스라엘-BC722년 앗시리아에게 멸망-호세아, 아모스
남유다왕국-BC587년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유배 귀환)-이사야, 에즈라, 느헤미야
*유배이전-북이스라엘의 아모스, 남유다의 제1이사야
*이사야서
제1이사야-BC 8세기 왕국시대
제2이사야-BC6세기 유배시대
제3이사야 BC5-6세기 귀환시대
<유일신사상이 생성되게 된 배경>
-기원전 800-200년의 기축시대에 일어난 사상적 변화
1.<베다종교에서의 변화-외향적 제사의식에서 내향적 요가>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인도대륙의 사화적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베다종교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운명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개념인 카르마사상에 다시 관심을 가져 인간의 무책임한 행위를 신에게 전가하는 것에 대해 망설이게 되었다. 점차 신들은 유일한 초월적 실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종교가 희생제사의식에 집착한 반면 요가에 대해 다시 일기 시작한 관심은 더 이상 외향적인 것에 치중한 종교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68
인도에서 신들보다 더 월등하다고 간주된 종교지도자들로 신들은 대체되었다. 힌두교와 바교는 신존재를 부정치 않았고 사람들이 신들을 경배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대신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신들을 초월하여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추구했다.
베다종교에서 희생제의를 통해 경험하는 신성한 힘을 브라흐만이라 불렀다. 희생제의가 곧 전체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라고 여겼기 때문에 브라흐만은 점차 모든 사물을 지탱하는 힘을 의미하게 되었다. 새겨난 모든 것은 브라흐만의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적인 힘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우리를 유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브라흐만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각 개인안에 있는 영원한 원칙을 아트만이라 불렀다. 전우주가 자신의 자아로서 지니고 있는 이 제일 본질 이것이 바로 실재이며 이것이 곧 자아다. 70
<붓다>
붓다는 인간의 언어가 사고와 이성의 범위 너머에 있는 실재를 다루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곧 선한 삶이다. 만약 선한 삶을 살수 있다면 불교도는 그들이 논리적 방법으로 이 진리를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붓다의 다르마가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제자들은 선한 삶의 실천을 통해 열반을 볼수 있게 될 것이므로 곧 열반이 실재하는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신적 세계가 정적이고 변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신성한 것이 완전히 정적이라는 이미지는 계시의 신과는 전형 공통점이 없을지라도 유대교 기도교인 무슬림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계시의 신은 끊임없이 활동적이고 혁신적이며 성서에선느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면서 대홍수로 인류를 멸절시키도록 마음을 바꾸기도 한 존재이다.78
아리스토텔레스는 위계의 정점에 부동의 동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신과 동일시 했다. 즉 이 신은 순수한 존재이고 영원하고 부동이며 영적인 존재였다. 82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세상을 감독하거나 지도하지 않으며 우리 삶에 아무 변화도 주지 않는다. 즉 플라톤의 형상이라는 순수세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인간삶에 별 영향울 줄수 없었다.
이상에서의 기축시대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초월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일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형성될 당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고자 자신들의 전통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마침내 야웨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예언자들의 신-유일신사상>
1) 아모스
예언의 기록을 남긴 최초의 예언자이며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서 그는 예루살렘 남쪽으 드고아에서 양을 치고 돌무화과를 가꾸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에 새 기원을 열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와 야웨의 관할권에 대한 관념을 구체화 시켰다는 것이다. 야웨는 북쪽으로부터 적을 보내서 이스라엘과 이웃나라를 응징코자 했다. 자연섭리에 대한 야웨의 영향력은 무제한이었다. 그는 추수 석달전부터 비를 내리지 않았고 전염병과 지진을 내렸다. 야웨의 활동무대는 전세계적이었다. 이같이 야웨의 영향력이 우주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야웨 신앙은 복종과 실천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가 우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는 새로운 신의 관념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모스는 세상에서 내가 너희를 골랐다고 함으로써 이 사실을 아는 민족은 이스라엘 뿐이라고 주장했다. 붓다처럼 열반이라는 무아의 소멸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야웨가 아모스의 자아를 점거하고 그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끈 것이었다. 아모스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2) 호세아
아모스가 사회적 악을 공격한 것에 비해 호세아는 이스라엘 종교에 내면성이 결여된 것에 관심을 가졌다. 즉 신에 대한 지식은 헤세드(사랑)와 연관된 것으로 제의를 외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넘어 야웨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98
선지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감정과 경험을 야웨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신을 창조한 셈이 되었다. 왕족의 일원이었던 이사야는 야웨를 왕으로 보았다. 아모스는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민을 야웨에 부여했고 호세아는 아내에게 버림받았으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사랑의 부드러움을 갈급하여 느끼는 남편으로 야웨를 생각했다. 모든 종교는 당연히 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는 신인 동형동성론의 요소를 가지고 시작한다.99
예언자들은 이웃신들의 신을 자주 조롱했다. 이러한 이웃신에 대한 배타성은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종교적 태도였다. 이방종교는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신앙이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신들을 싫어하고 비판할 필요없이 차라리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유대교 경전에서 우상숭배라는 새로운 죄 곧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은 구토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01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 하느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분뿐이시다 너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날 유대인은 여기서의 “우리의 신 야웨는 한분이시고 유일하다”을 유일신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명기 기자는 아직 이러한 유일신론적 견해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인 야웨라는 말은 신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야웨야말로 경배할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신이라는 뜻이었다. 107
3) 이사야
기원전 742년 우찌야 왕의 통치가 끝날 무렵 등장한 자가 이사야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부분을 지적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 이후 황금의 새시대가 도래한다는 부분이다. 그는 북왕국의 시련과 멸망을 직접 보고 따라서 사방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민족이 다시 모여들것이라는 꿈과 환상을 보게 되었다.
이사야는 신과 인간의 차이 즉 철저한 분리 타자성을 의미했다. 시나이산 에 나타난 야웨의 현현은 인간과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간극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오토가 말한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그 누멘적 감정을 경험했다.
야웨와의 경험은 우파니샤드와 달리 한 인격과의 만남이다. 즉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 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에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시키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은 신화나 제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사건들 속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서 자신을 이방신들로부터 구별했다.
야웨는 더 이상 백성들의 축제 신년의식 순례들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이사야의 청중을 경악하게 했다. 중동에선 제의적 축제가 종교의 본질이다 이방종교는 고갈된 에너지를 갱신하기 위해 이런 제사에 의존했고 신들의 위엄은 부분적으로 그들신전의 웅장함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야웨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무의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사야는 제의준수하는 일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야웨는 희생보다 인자함을 더 원한다.
4. 바빌론 유배(597, 587, 582 3차례 바빌로니아 유배)
히브리인들은 여호아킴왕으로 하여금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바치는 조공을 중지하고 이집트 군사원조를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느브갓네살은 이를 알아차리고 유다의 반란을 종식시키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3개월전투에서 여호아킴을 항복했고 모든 유력자, 군인, 은장이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다시 반란이 일어남으로써 기원전 586에 예루살렘은 점령당하고 국가는 파멸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학자들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살아남은 사람을 지칭할 때 히브리인대신 유대인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유대인이 바빌론 근처에 이주하자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집단생활과 전통문화생활에서 방해받지 않을수 있었고 그들이 이주한 땅은 비롯해서 농사짓기가 더 좋았다.
1) 예레미야(기원전 600)
하느님이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정의문제와 연관된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사람은 바빌론의 유배자들이었다. 유배자들은 민족과의 결속이 단절됨을 의식했고 그로서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공동체적 종교관에 대한 재고가 필요했다. 전통적 이스라엘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동체적으로 관계했지 결코 개인별로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벌은 전 이스라엘의 재앙으로 나타난다. 그러던 것이 점자 이스라엘 종교 전통에 개인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예레미야 이후부터였다. 그는 당시의 악을 보면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회의했고 자신의 예언직 때문에 겪는 자기민족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느님은 용서와 무한한 자비가 가능한 분임을 인식하면서 개별적 친교가 가능한 분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레미야는 유다전체 역사중 가장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활동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앗시리아왕국이 쇠퇴하고 스구디아의 약탈자들이 시리아와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이집트까지 침입했을 때였다. 예레미야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신과 대면하게 하고 각자의 행동에 각자 책임을 지도록 했다. 이제 더 이상 야웨가 인간을 집단단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각자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인간과 신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면, 사원에서 희생제물을 바쳐가면서 신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공동의 노력은 필요없게 될 것이며 그런 행위는 더 이상 개인의 종교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원전 604년 느부갓네살왕이 즉위하던 해에 예레미야는 이사야의 우상파괴적 견해를 부활시켰다. 이는 선민이 승리하리라는 교리를 머리가 땅에 처박히게 거꾸로 돌려 놓았다. 즉 신이 이스라엘을 벌주기 위해 바빌로니아를 도구로 쓸 것이며 이제 이스라엘이야말로 징벌을 받을 차례라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70년간 유랑해야 하리라고 예레미야는 예언했다. 이 예언을 들은 여호야킴왕을 그 두루마기를 찢고 불살라 버렸으며 예레미야는 목숨을 잃을까 하여 은둔했다.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신은 예레미야를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야웨를 향해 심오한 매력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을 몰아치는 괴력에 의해 유린됨을 느꼈다. 예언자들의 신은 이스라엘인에게 중도의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스스로를 단절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예레미야의 고뇌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충격과 혼란을 의미했는지 볼수 있다.
야웨는 중개인 없이 야웨를 만난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던 이스라엘인에게 각 세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 신과 만나는 공포에서 생기는 충격을 줄이게 할 것이라고 모세를 통해 말하고 있다. 야웨의 종교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웨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예레미야는 종교의 외양적 장식이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미래에는 신과 이스라엘의 계약이 아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114
2) 에제키겔
에스겔은 야훼에 대한 충격적인 환상을 보았다. 후에 이는 유대교 신비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이 된다. 에스겔에게 야웨의 한 손이 쭉 뻗치며 쥐고 있던 두루마리책을 펼쳐 보였는데 그 안에는 애곡과 재앙의 말들이 가득했다.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책을 먹어 신의 말씀을 소화하고 자신의 일부분으로 만들도록 명령받았다. 115
에스겔의 이상한 경험은 신의 세계가 인간에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에스켈 자신이 이런 이질감의 징표가 되도록 요구받았다. 에스겔 자신은 야웨의 종교가 의미하는 신과 인간과의 극단적 불연속성이 상징이 되었다. 신에 대해선 아무 것도 당연하게 여겨질수 없고 인간의 정산정 반응은 거부되었다. 이와 달리 이교적 비전은 신들과 자연세계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진 연속성을 경배했다. 에스겔은 옛 종교로부터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했으며 그것을 언제나 오물이라 불렸다.
에제키엘 역시 개인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제까지의 통념으로는 유배온 것은 민족전체의 죄과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동체의 죄 때문에 각 개인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하느님의 불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문제가 에제키엘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죄가 의로운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이 그 죄과를 받아야 한다는 개인의 의무를 강조한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했는데 그후 그의 사상은 후기 유대교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웨를 완전히 초월적이고 성스런 존재로 생각함과 동시에 예레미야와 신명기 율법에서 제기된 개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3) 제2이사야
그의 생애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사상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관심은 바빌론 유수기의 유대인이 겪었던 악의 문제였다. 왜 야웨가 유대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을까, 이것이 자신들이 지은 죄때문이라는 답변은 만족치 않다. 왜냐하면 바빌론유대인은 예전보다 더 타락한 생활을 함에도 부유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제 2이사야는 유대인의 시련을 세계사 속에서 이해했다. 그는 유대인의 시련은 야웨계획에 있는 궁극적 세계구원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야웨개념이 넓어져 아웨는 제한 조건없는 유일신이 된다. 야웨의 행동영역은 전세계이며 범우주적임을 말한다.
그는 야웨의 계획은 유대인을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세계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야웨의 뜻에 따라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을 해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고레스왕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정복하고 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게다가 야웨는 한 지역이나 한 민족만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다. 야웨의 목적은 보편적이어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인류를 구원하고자 한다. 이점이 그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이라 하겠다. 이는 그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본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야웨는 자신의 의사를 모든 인류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중계자 즉 종을 필요로 한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종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선택된 민족이다. 그러나 야웨는 유대인예게 무조건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의 담지자로 봉사하라고 선택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를 인식치 못했기에 혹독한 고통을 통해 속죄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통해 유대인은 정화되었고 모든 민족은 고통받는 종의 신음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제 2이사야는 유대인에 대한 야웨의 처사를 정당화시켰다. 그는 야웨의 다음 계획은 유대인을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세계의 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페르시아고레스왕이 예웨의 뜻에 따라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을 해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 유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야웨 이름으로 모든 민족을 통치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제2이사야는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통해 후기 유대교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통받는 종에 대한 예언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줄 이가 언젠가 나타날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중에 초기 기도교인은 나자렛예수가 그 메시야라고 확신한 것이다.
제 2이사야는 어느 예언자보다 가장 장엄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주권을 선언했다. 즉 그는 유일신 사상의 교의를 명백하게 내세운 최초의 히브리 작가이다. 제2이사야에 와서 유대교의 유일신은 신학적 이론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지니기 시작한다. 이시기엔 이스라엘의수호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라고 생각하여 유일신사상이 정립되었고 이에 창세기가 씌여졌으며 이 유일신이 모든 민족과 역사를 다스리며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라는 그들의 초월성과 보편적 사고가 확립됨. 이러한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후에 이스람과 그리스도교에 의해 수용된다. 단 유대민족주의라는 한정을 넘어 보편성을 띠고서.
(유배의 고통속에서 자신들의 고통이 민족의 정화는 물론 나아가 이것을 계기로 만민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적 인과응보사상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에로, 민족적 수호신에서 우주의 창조주로
**유배이후-유대교 성립 및 묵시문학**
1) 유대교의 출현
BC 586년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가 도래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정복자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정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벌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하느님이 정복된 것이다. 오히려 벌내리심으로 증거되었다. 더욱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성스럽고 약속된 땅에서만이 아닌 어디서나 숭앙받을수 있었다. 제물없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인 회당이 생겼다. 안식일 즉 하느님을 위해 안식하고 성결케 하는 제칠일은 이스라엘의 성역이 되었다.
정치적 이유로 페르시아인들이 유대인을 팔레스티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여 많은 유대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언을 통해 고통과 죄값으로 속죄를 하면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리라 기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들의 예고는 역사적 사건으로 확증되었다.
고레스왕은 포로민의 환심도 얻고 또 이집트변경에 완충국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유대인의 귀환은 즉시 이루어졌다. 고레스왕은 느부갓네살이 기원전 586년 약탈해온 사원의 기물을 되돌리고 사원재건자금도 조달했다. 일부는 바빌로니아에 남았으나 수천명은 귀환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황폐한 사원에 제단을 만들고 희생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사원재건사원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것은 돌아온 이들에겐 경제적 혜택이 별로 주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살던이들은 기득권을 소유하고 돌아온 이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바빌론이아에 살던 유대인은 신명기를 통해 예루살렘과 율법을 이상화시켰는데 신명기의 기준으로는 유대에 살던이들은 타락한 생활(타민족과 결혼 등)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으로 사원개건은 15년간 중단되었다.
그후 예언자 하개와 즈가리야가 사원재건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내 사원을 재건했는데 그들이 고대한 상황의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인들이 야웨신앙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느혜미야와 에즈라가 왕에 의해 파견되어 성벽재건과 정신적 개혁을 일으켰다.
기원전 428년을 전후하여 느헤미야에 이어 제관이요 율사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감읍하여 율법을 곧이 곧대로 지키기로 맹세했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 계속 논란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바로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제2성전시대초기(BC 450) 사제이자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바벨론에서 팔레스티나로 돌아오는 길에 율법과 예언과 설화가 적힌 옛 두루마리를 집성한 토라를 갖고 왔다.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국민생활의 기반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변화하는 일상생활에 율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선 正傳으로 인정된 성서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법에 관한 구전전통과 해설과 가르침들 및 성서 주석들이 필요했다. 성문화된 토라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시대가 열렸고 그 후 유대교의 역사는 토라의 해석과 계속되는 시대에 토라가 주는 메시지의 역사가 되었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AD 70년경에 있었던 제2성전의 붕괴였다. 토라의 가르침과 구전된 해석전통의 상속인이자 옛 예언자의 계승자인 랍비들은 유대민족이 하느님께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한번 더 매를 맞을 뿐이며 이스라엘 하느님은 유대민족에 의해 여전히 섬겨질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사건은 유대인의 삶에 중요한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그 개혁은 팔레스티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탈무드는 옛 구전을 기초로 팔레스티나와 바빌로니아의 랍비들이 만든 유대적 율법과 지식과 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마침내 AD 5세기와 6세기에 편집되었다. 모든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킬수 있는 율법의 견지에서 유대인이 됨에 대해 정의했다.
유대인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고 토라를 공부하며 계명을 지키고 인애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길수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드은 필요치 않고 오직 학자들만 필요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절대지배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 낯선 정부의 법에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토라도 실천하며 사는 다른 민족속의 하나의 종교적 민족을 형성했다. 70년 예루살렘성전이 불타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다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제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까지 한다.
2) 랍비의 형성
당시에 히브리어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주로 사용되던 아람어라는 방언 때문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기에 일반백성들은 전문가의 도움없이 경전을 완전히 이해할수 없었다. 따라서 랍비의 경전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 부각되었다. 랍비의 두 번째 역할은 종교의 지방분산화를 촉진하고 기원전 621년 요시아왕의 개혁이후 불가능해졌던 지방에서의 종교생활을 가능하게 한 점이다.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던 예언의 시대는 끝나고 문자화된 경전을 통해 야웨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에서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경전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J E D P전승으로 모세오경을 완성하였다. 사원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은 많은 노래를 만들었고 이는 후에 시편으로 집대성되었다.
<유대교 재건시대의 신관>
유배이전에는 하느님을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유배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초월적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 야웨를 입에 담지 못하고 예웨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그밖에도 하느님 야웨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으니 이름 하늘 전능쉐키나(현존)같은 것들이다.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이스라엘 선민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3)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 성전제도 등모든제도가 없어졌음에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배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유배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풀이했다. 이렇게 해서 미드라쉬 문헌(성경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과 아울러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시대의 특징이다.
2. 헬라시대(기원전 332-기원전 63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점령)
기원전 332: 알렉산드리아왕이 팔레스틴 점령하였다. 기원전 323 왕이 사망후 팔레스틴은 이집트 르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차지가 되었다가 기원전 198년 시리아의 셀류코스왕조의 안티오코스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문화가 도시의 유대인에게 퍼져갔다. 기원전 167 셀류코스왕조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를 어긴 유대인을 박해했다. 이에 하스모네 가문중심의 독립전쟁이 일어나 승리하여 하스모네왕조(기원전 142-63)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하스모네 가문이 정권과 대제관직을 독식하자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었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이에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느파를 만들었다.
1) 헬레니즘영향
바빌론 유배로 인해 이스라엘인들은 여러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알렉산더가 제창한 헬레니즘은 문화융합정책과 종교와 인종간의 관용정책을 특징으로 하였다. 유대인철학자 필로의 저서를 보면 완전히 영적인 의미에서 지고존재와의 만남은 야웨의 힘과 행동의 중재자인 로고스에 의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의 영향임을 알수 있다. 유대교경전은 그리스 영향을 받으면서 70명의 전문학자에 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를 70인역본 셉투아진트라고 함 ) 이작업은 기원전 3세기에서 시작해서 기원전 2세기에 완성되었다 (이 번역본은 히브리경전 중 가장 믿을만한 사본을 이용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
2) 조로아스터교영향
헬레니즘영향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영향보다 지속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헬레니즘은 세속적이고 철학적인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종교적이어서 유대교 기존사상을 보완시킬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탄 천사 내세에 관한 페르시아의 신앙과 메시야 사상이 그것이다. 최고의 심판의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이어진다. 심판,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사상도 발달된다.
3) 유대교 단체의 출현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새로운 유대교의 구심점이었던 성전을 잃은 것은 큰 슬픔이었으나 소아시아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보다더 보수적이던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이런 참극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들이 바로 에세네파와 바리사이파였다.
에세네파들은 성전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하고자 사해 주변에 수도원을 짓고 은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성전은 영의 성전이 될 것이다. 동물을 바치는 전통 제사대신 세례의식과 공동식사를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속죄함을 얻기를 노력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사상 2-랍비적 종교**
페르시아제국이 바빌론왕국을 치면서 예루살렘은 독립을 얻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민족은 자기나라로 돌아간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만 다스리나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2500년간 정치적으로 독립을 못하고 이스라엘민족이나 종교적 집단으로만 존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유다교가 민족적 종교적 집단 즉 율법적 유대교로 성장케 된 계기가 되었다.
율법적 유대교라는 말에서 엿볼수 있듯이 율법은 유대집단의 존속을 유지하는 세속적 틀이 되었고 구원을 상징하는 틀이었다. 이 시기에 근동의 역사적 변화와 사상변화 속에 유대인들은 이런 사상적 변화를 피해갈수 없었고 유대사상에도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런 사상은 그 이전 역사적 변동기에 에언자들에 의해 변모된 유대내부사상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유대내부의 사상변화가 형이상학적 유일신사상의 확립과 개인과 하느님의 관계정립, 죄와 정의 그리고 보상과 구원의 책임소재에 대한 해석 등을 낳았다. 반면 외부의 사상은 천사들에 대한과 관념과 최후 심판의 관념, 부활사상 영혼불멸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유대인 단체들은 외국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개의 단체를 출현시켰다. 먼저 대두된 것이 사두가이파이다. 사두가이파는 보수적인 사제계급과 지주층으로 구성된 기득권층이라 할수 있다. 이들은 토라에 대해선 엄격한 근본주의자들로 자의적 해석을 금했고 글자 그대로 해석을 원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선조의 사상을 그대로 실현코자 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문자 그대로 신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두가이파는 천사에 관한 통속적인 신앙과 새로운 종말사상 그리고 내세에 완전한 의식과 육체를 갖추고 부활한다는 관념에 대해 비난을가했다. 그러나 유대문화의 헬레니즘화는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의 생활방식을 권장했다. 또 유대교제도를 계속 보존키 위해 로마인과 타협하기도 하였다.
둘째 바리사이파이다. 경건주의자들인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보여져 왔으나 랍비 유대교의 토대를 이룩하고 향후 유대교의 방향을 설정해준 사람들이라 할수 있다. 이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세속적 군력을 향유하지 못한 계급이었다. 이들은 토라를 일상에 맞게 활용하기 위해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왔고 따라서 토라에 대한 성서 해석법인 미드라쉬를 발전시켰다.
바리사이파는 토라를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려면 이를 끊임없이 재해석해야 한다는 관용적 태도를 지녔다. 그래서 토라에 나타나 있는 것을 그대로 엄밀히 지키기 위해선 그 전에 미리 토라의 내용을 재해석하고 적용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토라뿐 아니라 구비전승이나 율법학자들의 주석에도 강한 관심을 가졌다. 즈 ㄱ이들은 성경과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바리새파는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심판이라는 새 메시야사상을 옹호했다. 종말이전에 가장 중요한 의무는 율법준수이다. 그들은 마카비파와 내란 끝에 결국 로마의 폼페이장군이 중재에 나서면서 기원전 63년에 유대가 로마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 알렉산드리아 유대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로(기원전 20년-서기 50년)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철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