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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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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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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함마드


코란에서는 모세가 예언자이고 사도임과 같이 무함마드도 예언자이고 사도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은 예언자중 6명을 위대한 예언자로 뽑아 특별한 칭호를 부여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가 그들이다.

이슬람은 필요에 따라 예언자를 세상에 보내시는데 마지막으로 알라신의 유일성을 제대로 가르쳐 주기 위해 무함마드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전의 가르쳐준 계시를 바로잡는데 있었다. 역사적으로 하브라함에게 알려준 계시는 유이신교였다. 그런데 유다교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 혹은 선택된 유다백성의 하느님으로 축소시킴으로서 근본계시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교리를 주장함으로써 다신교적 냄새를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다교의 민족중심의 유일신교와 그리스도교의 예수숭배와 성령교리를 바르게 교정한 것이 무함마드의 사명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최종의 예언자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핵심은 타우히드(하느님의 유일성을 믿음)이며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지 못할 유일한 죄는 쉬르크(하느님 곁에 무언가를 모셔 섬기는 행위)이다. 이슬람이란 신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함을 뜻하며 그렇게 복종을 실천하는 사람이 무슬림이다.


무함마드의 생애는 3으로 구분 (출생-40세, 계시받고 메카에서 핍박 13년간, 622년 메디나천도에서 움마건설(632 사망)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40세에 산에서 명상하다 계시받음.(610) 그는 40세(610)에 계시를 받고 3년간 새로운 계시를 설교해서 30명의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새 종교는 절대 유일신교를 주장하며 재래종교를 우상숭배로 몰아붙였기 때문에 메카의 쿠라이시족의 미움과 분노를 유발시켰다. 그가 계시받은지 5년째 되는 615년에 메카에서 반대파의 박해가 너무 심해 감당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몰래 메디나로 피신했는데 그때가 622년 9월24일로 이 날을 이스람 새종교의 출발원년으로 정했다.


622년 메디나로 옮기면서 결정적 전기를 맞았다. 메카시절의 종교적 이상이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무함마드는 자신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선양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고 누락된 부분이 많음으로써 유대인들이 계시내용을 수정했다는 심증을 굳혔다.


즉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만이 진실에 부합하며 자신이 직접 계시에 의거해서 전하는 신앙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보다 오래된 것이라 결론내렸다. 이슬람은 메카의 성소인 카바성전을 세웠다는 아브라함이 신봉했던 신앙이 자신들의 신앙이라 보고 당초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예배의 방향을 메카쪽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메카정복은 불가피한 과제가 된 것이다. 무함마드는 8년간 메카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무함마드는 결국 메카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직접 카바 신전에 있는 360개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고 알라신의 신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메카에 머물지 않고 다시 메디나로 돌아갔다. 632년 메카순례를 하고 돌아온 후 그는 메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2. 정통 칼리프시대(632-661)


1) 칼리프제의 출현


칼리프제는 정교일치원리로 태동한 이슬람 초기시대부터 이슬람 정치 사상체제의 근간이 되어온 통치체제이다. 킬리프는 후계자 계승자란 뜻이며 칼리프제는 사도를 대신하여 세상의 의를 다루는 이스람의 정교일치적 지도권을 말한다. 이 칭호는 무함마드 사후 움마(이스람공동체)를 영도하고 그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아부 바크르가 선지자를 계승하여 선출됨으로써 그 최초의 어원적 출현을 보게 되었고 이와같은 의미로 쓰여진 이슬람의 政敎통치자의 별칭으로 이맘이 있다.


움마에서의 칼리프지위는 신도로부터 받던 사도의 위치처럼 무슬림의 충성과 복종을 수렴하고 그들 정치 종교일을 관장 영도할 권리를 갖는다. 칼리프의 선출은 움마의선거에 의해 이루어지고 민중의 추대를 받는 방식이 사끼파회의 이해 순니의 정통제도로 채택되어 왔으나 쉬아파들은 알리가계에서만 이맘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주장아래 독자적 세습 이맘제를 실행하게 되어 이후 카와리지 무르지와 무으타질라 등 이슬람 종파간에 칼리프 선출제도를 놓고 각 파의 주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기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 초기시대의 칼리프제야말로 이슬람법의 순수성이 구현된 모범적인 데도의 실철시기였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이때를 정통칼리프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무와이야가 우마이야조를 세운 후 그의 아들 야지드를 다음 칼리프로 책봉하고 이 추대가 이루어짐으로써 칼리프제는 우마이야조로부터 선거제에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었으며 왕권체제유형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2) 싸끼화회의와 정통 칼리프시대의 칼리프선출


632년 무함마드가 후계자 지명없이 떠나자 안사르족이 계승자 선출회의를 하려 했다. 이때 오마르이븐카탑이 아부바크르를 데동하고 가서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가 되었다.


* 샤핀전투(657)

유프라테스강 상류 샤핀지역에서 무와이야군과 알리가 대결하여 평화협정하였으나 알리는 661년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후 우마이야조가 시작되었다.


*알리 추종자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직계자손만이 하법직인 칼리프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슬람의 최고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초기의 정치적 주장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의해 보강되었다. 알라는 알리와 그의 자손을 후원하며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어 언젠가 쉬아파를 승리로 이끌 메시야의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알 리가 지향한 목적을 달성할 메시야가 알리 후손에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확신을 지녔다. 그래서 이들은 아부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칼리프로 선출한 것은 찬탄행위라고 보았다.


3. 우마이야조 (661-750)


무와이야는 알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스람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느 그의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내세워 전통적인 선거제 칼리프를 깨뜨리고 세습왕정을 시작했다. 야지드는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을 살해하고 멕카의 카바신전을 불태움으로서 극악무도한 칼리프가 되었다. 이를 카르빌라의 참극(680)이라 한다. 이는 쉬아파의 발생시초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도 쉬아파는 우마이야조에 반항하여 자하로 잠입해 쉬아파를 형성했다. 후세인의 죽음 순교를 보고 아들로 이어지는 이맘형성을 주장한 것이다. 우마이야조는 10대 히샴이후 내부가 분열되어 쇠퇴했다.


4. 압바시아조


페르시아출신의 마왈리 등을 비롯한 비아랍민족들이 상당수 변혁의 지도층에 서서 종교적 무력혁명의 주체가 되었으므로 순수아람의 지배시대가 종식되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무슬림국가 이스람 제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즉 압바시아조 시대에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촉진되었다.


이는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며 누구나 아랍인이 되는 즉 인종 혹은 민족적 구분이라기 보다 언어적 종교적 구분으로서의 아랍이 되어 공통의 언어와 종교를 갖는 이슬람 동포의 광의의 아랍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슬람 정교일치체제를 지향한 초기시대 칼리프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뒷배경으로 칼리프의 위치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한 몸에 지닌 절대자의 위치가 되어 칼리프는 현세에 비친 신의 그림자라는 반신반인적인 존재의 위치로 승격되고 예언자의 대리인 후계자였던 그 지위가 신의 대리인으로 격상되었다. 즉 칼리프의 권위는 알라로부터 직접 부여되고 칼리프의 칭호도 알만수르(알라의 도움을 입는 자)라는 새로운 별칭이 붙게 되었다.


민중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칼리프들은 항상 이슬람 신학자와 법학자들을 측근에 두어 종교적 경건성을 과시하고 위엄과 절대적 권위를 지켜서 강력한 이슬람 전제체제를 확립하였다.


제7대 마아문(813-833) 은 압바시아조 역대 칼리프 중 가장 학문적 소양이 깊었던 사람으로 간주된다. 특히 이 시대에 그리스 철학에 영향받은 이슬람 신학의 한 학파인 무으타질라파가 전성했다. 우마이야조 말기에 일어난 이 파는 헬레니즘적 신학론으로 이슬람신앙을 해석한 학파로 그들은 예정된 알라의 의지에 대한 인간이성의 행사를 용납지 않은 메디나 학파를 중심으로 한 정통파의 定命觀에 대해 理智者 로서의 인간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장유의지설로 맞서고 정통파가 주장하는 꾸란의 영원성을 부인하고 꾸란은 알라께서 창조한것이라는 창조설의 입장을 취한 학파이다. 무으타질라의 지적 탄력성이 있는 신학론은 비아랍인들에게 크게 환영받고 자신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합지주의사고의 소유자였던 마아문의 지지를 얻게 되어 827년 마아문은 창조된 꾸란설을 공인하고 833년 반대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심문기관인 미후나를 설립했다. 이로부터 무으타질라파는 15년간 공인 종파의 지위를 누리다가 10대 칼리프 무타왁킨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되었다.


5. 압바시아조의 멸망


대 몽고제국에 의해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되어 압바시아조 500년사가 종말을 고했다. 이슬람 세계는 당시 수많은 군소국가로 분열되어 있어서 어느 곳에서도 압바시아조를 위해 원조의 세력을 형성치 못했다. 다만 이집트의 맘룩조만이 팔레스타인에서 몽고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이스람 전통을 보존하고 압바시아 칼리프를 모셔와 이슬람의 정통적 정신적 계승자가 되어 오스만 터어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이스람칼리프제의 대권을 명목상 유지해 간다. 압바시아조의 멸망으로 무슬림 움마의 단일성이 상실되었고 그 이후 이슬람은 터키족의 손에 의해 오스만 터어키로 이어지지만 통일된 아랍이슬람 교국은 소생치 못하고 1차대전을 맞게 된다.


<이슬람 신학체계>



1. 메디나 학파


이슬람 계시된 후 아랍 반도의 수많은 부족을 단합시키고 정복사업과 함께 포교가 이루어졌지만 각 지역의 종교전통과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즉 시리아에선 그리스적인 기독교사상도 그 하나이다. 이런 가운데 주류적 이슬람 신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형성되는 데 공헌한 요소로는 아랍인의 윤리적 우위성을 들 수 있다. 예언자가 아랍인이었고 꾸란이 아랍어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곧 아랍인의 윤리적 우위성을 보장하여 준 것이다.


아랍인의 윤리적 우위성과 주류적 이스람 신학체계의 중심지는 메디나였다. 이 곳은 이스람학의 발생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꾸란의 최종 형태가 완성되었고 하디스(언행록)이 최초로 수집되었으며 이스람 종교자료에 대한 언어학적 역사학적 시학적 고찰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이슬람 여구가들은 메디나로 몰려와 예언자의 자손으로부터 이스람의 순수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형성된 메디나학파는 전 이슬람 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메디나 학파가 우위성을 인정받은 것은 교회나 국가가 하나의 개념이라는 이슬람 정교일치적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메디나 학풍은 이스람의 이단적 요소인 영지적이고 이원적인 색체를 제거하고 박해하는데 적극 참여하여 주류파의 교리를 정리하는데 열의를 보였으나 이런 영지적이고 이원적 요소도 후일 이스람신비주의자들인 수피에 의해 융화되었다.


2. 카와리지


이스람 움마의 최초의 분파로 무함마드 사후 25년이 지난 정통칼리프시대 4대 알리대에 출현했다. 칼리프 오스만이 살해된 후 일어난 알리와 시리아 결명군의 여 ㅇ도자였던 무와이야간에 벌어진 샤핀전투(657)에서 전쟁보다 중재의 제안을 받아들인 칼리프알리에 반항하여 주전파 수천이 “오직 알라만이 중재자일 뿐 인간은 싸워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진영에서 이탈하여 한 분파를 이루었으므로 카와리지(분리자 이탈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쉬아파


이슬람은 크게 순니파와 쉬아파로 나뉜다. 무함마드의 갑작스런 죽음후 그의 친구인 아부바크르가 선출되엇으나 일부 무슬림은 무함마드가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을 후계자로 원했다고 믿었다. 그후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트만의 징치적 권위에 반대한 분열파는 알리에 충성했다. 결국 656년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다. 쉬아파는 그를 최초의 이맘(움마의 지도자)라 불렀다. 이 두파의 분열의 원인은 교리적이라기 보다 정치적인 것으로 이슬람 내에서 신이해 문제를 포함한 정치적 측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실례가 되고 있다. 쉬아 이 알리(알리 신본자)는 소수파로 다수 반대세력에 강한 저항력을 가졌다.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은 알리 사후에 들어선 우마위야조를 거부해서 자신의 소수 지지자와 함께 이라크에 지내다가 우마위야조의 칼리프 야지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와같이 이스람에 있어 신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칼리프직같은 이스람 공동체의 현실상화에 대한 정치적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점차 지도자들이 세속주의에 물들어가자 경건한 무슬림들은 이를 비판했는데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라시둔(최초의 4명의 칼리프)의 이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율법학자들에 내건 것이다. 그것은 토라와 유사한 샤리아법인데 이는 꾸란과 무함마드의 생애와 금언에 근거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기들의 이상인 무함마드가 한 것처럼 말하고 사랑하고 먹고 씻고 예배하던 방법을 모방하고자 했다. 이같이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것에 중심을 둔 자들을 전통주의자라고 한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중개자 없이 직접 신과 교통하고자 했다. 따라서 무슬림의 운명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의무를 신 앞에서 얼마나 충실히 준행하는가에 달려있다.


꾸란은 신의 본질로서의 꾸란과 문자화된 꾸란을 구분했으며 꾸란을 낭송할 때 신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수 있다고 가르쳤다. 꾸란이 지상에서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신의 현현을 구란을 낭송하는 입술을 대해 신이 말하며 그들이 쥔 구란을 대해 신이 살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예수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유사했다.


신의 실체를 성육신한 말씀으로 규정한 기독교인처럼 무슬림도 신이 구체화한 말씀으로서의 꾸란의 속성에 대한 논쟁을 하였다. 예수를 성육신한 로고스 즉 신의 말씀으로 규정한 교리에 대해 한 때 격분했던 기독교인처럼 일부 무스림도 꾸란이 신자체로서의 말씀이라는 꾸란격상의 교리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반발했다.


그러나 쉬아파는 기독교의 성육신교리와 유사한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쉬아파 가운데 일부는 알리와 그후손을 무함마드보다 더 중시하고 거의 신에 가까운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것은 신이 특정가문의 혈통적 원조가 되어 그의 영광을 후손대대로 드러낸다는 고대 페르시아전통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물이 권좌에 있든 없든 그의 지도가 절대 필요하므로 모든 무슬림은 이 인물을 찾아야 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신에게로 이끄는 길 진리 빛으로 섬긴 것처럼 쉬아파는 그들의 이맘을 신에게 이르는 입구, 길로 숭배했다.


순니파는 순나(관습)을 의미한다. 이는 공동체의 관습과 구두전승을 믿는 자들로 정통파이다. 이스람 전체의 80%가 순니파이다. 이에 반해 20%는 쉬아파(분리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쉬아의 정치적 운동이 분열의 기원이 되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 칼리프가 누구인가에 의견이 분분하여 분열되었다.


알리 사후 661년 이스람 정치중심지는 시리아로 옮겨지고 무와이야가 그 대권을 잡아 우마이야조를 열자 알리의 근거지 쿠파의 알리 추종자들은 시리아 아랍 신정부에 반대하여 알리의 후손이 칼리프로 계승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선동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680년 9월 카르빌라에서 후세인이 살해됨으로써 그를 순교자로 보고 그를 살해한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고 지하로 잠입 알리의 후손만이 칼리프위 승계자격이 있다는 장치적 입장을 점차 교리의 바탕으로 마련하여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을 칼리위의 찬탈자로 규탄하였다. 이런 논리는 이슬람 움마의 전통 주류파눈에 노골적 도전으로 보여서 그들은 쉬아 알리 (알리추종자들)즉 쉬아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쉬아는 주류파 교리에 대한 반대라기 보다 아랍 지배층정권 특히 우마이야가에 대한 반대였다. 즉 후세인 살해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무크타르가 쿠파에서 봉기했고 이때 인종차별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비아랍계 무스림들 (마와리)가 참여했다. 이는 실패했으나 쉬아가 비아랍무슬림과 정치적 결탁을 했다는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무크타르의 추종자들은 그후 카이샤니야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들은 알 하나피가 죽지 않고 단지 이 세상에 잠시 숨었기 때문에 언젠가 구세주로 다시 올 것이라는 마흐디사상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후일 12이맘파 쉬아사상의 골격이 된다.


한편 쉬아파는 주류파 순니에서 중요시한 이즈마(합의 일치)rosa을 거부하고 어느 시대에나 알라로부터 자기 종을 올바로 일도할 책임을 부여받은 완벽한 이맘의 존재를 믿으며 모든 신자는 자기 시대에 존재하는 이 이맘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즉 이맘은 곧 예언자의 대권을 이어받았으며 대대로 선택된 인간에게만 내려지는 신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초인간적 자질을 갖는다고 보며 따라서 이맘은 오류절무하며 죄를 범할수 없다는 무결성 이즈마관을 갖게 된다.


즉 순니의 칼리프제관은 무함마드의 후계자로서 세속적 권한을 이어맏는데 반해 쉬아의이맘은 이런 세속통치의 권한 뿐 아니라 법의 벌대적 해석권까지 물려받은 셈이 된다. 이것이 모든 쉬아의 공통된 교리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의 자손중 누구를 이맘으로 추대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여러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중 5이맘, 7이맘, 12이맘파가 중요분파로 남게 된다.



<이슬람 새 보수파>


이 시기에 이슬람교에는 새로운 보수주의가 등장해 과거의 이슬람 신앙을 회복하려 했다. 이러한 보수적 상황에서 신이해의 혁신을 기대함은 무리였다. 14세기 이스람신앙의 보수주의 경향은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인 야우지야에 의해 주도되었다. 타이미야는 샤리야(신성한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칼람(이슬람신학)과 팔사파(이슬람철학) 아쉬아리학파까지 비판했다.


야우지야는 타이미야의 꾸란 중심에 수피즘을 추가했고 꾸란의 문자적 해석을 주창하고 수피들의 제의를 단죄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의 정신과 유사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은 종교생활의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준 진보주의자로 보았다.


15, 16세기에 세 개의 새로운 이슬람 제국이 창건되었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을 자지한 오스만 투르크제국, 이란의 사파비왕조, 인도의 무갈제국이다. 사파비왕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유사한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세 제국의 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정신이 여전히 이슬람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류에 대해 서구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경향과 함께 사파비왕조의 이란에선 새로운 형태의 12이맘파가 국교가 되었고 이것은 쉬아파와 순니파의 전례없는 반목의 불씨를 지폈다. 그때까지만 해도 쉬아파는 그들보다 더 지적이고 신비주의적 순니파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양자는 서로 적대하는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란의 쉬아파>


이슬람 내분쟁은 사파비조의 창건자 샤 이스마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순니파신앙을 부정하고 자신을 그 시대의 이맘이라 주장하면서 전례없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사파비조의 모든 사람에게 쉬아파신앙을 택하도록 강요했다. 개혁된 쉬아파는 그들영토에서 순니파(수피의 신비주의종파)를 폐지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가 수도원을 해체시킨 것을 상기시킨다.


이란의 쉬아파는 수흐라와르디의 신비주의전통과 접목시킨 독자적 팔사파를 발전시켰다. 쉬아파의 팔사파 창시자 미르다마드는 신학자이며 과학자였다. 그는 신적 빛은 무함마드나 이맘같은 인물들의 견성으로 보았으며 수흐라와르디처럼 종교경험의 무의식적이고 심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란의 쉬아파는 신을 체험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순수과학이나 형이상학보다 신비주의를 꼽는다. 몰라 사드라는 ‘신을 본받음’을 철학의 목표이며 어떤 특정신앙원리나 신조에 국한될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범신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다만 신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고 인간의 경험적 실체를 통해 제한적 형태로 신적 빛이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이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통해 빛을 발산하는 태양의 통일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오직 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알수 있는 비객관적 실재이다. 그는 쉬아파 이맘뿐 아니라 순니파 수피 그리스 철학자 모두를 존중해서 이란의 쉬아파가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인도의 무슬림보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더 강조했던 무슬림은 없다.



<쉬아의 분파>


쉬아파는 알리 후손을 통한 신깨달음의 계승을 제각기 다양하게 해석했다.

쉬아파는 후에 분파되었는데 그중 자이드파 이스마일파 12이맘파를 살펴보자.


1. 이맘파 (자이드파)


후세인의 손자인 자이드를 제5대 이맘으로 믿는 파로 740년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자이드는 죽는다. 숨은 이맘을 인정치 않고 타끼야도 허용않는다. 그러므로 매우 순니쪽에 가깝다. 쉬아파 중 순니파와 가장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분파이다. 다른 쉬아파는 무함메드 알바키르를 다섯 번째 이맘으로 추대했지만 이 파는 자이드를 추대했다.


2. 이맘파 (주류)


알리의 12후손을 숭배했는데 939년 마지막 이맘이 운둔하고 인간사회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황금시대를 열 것이라는 메시아적 신앙이 나타났다.


알리-후세인 자으파르-무사 -12번째 이맘로 이어지는데 쉬아파의 대부분은 12이맘파이다. 이 파는 열두번째 이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알 문타자르(기다림이란 뜻)는 878년 바르다드의 강상류에 있는 사마라의 모스크에 있는 동국 속으로 사라졌다. 그 당시 그는 5살이었기에 후손도 남기지 못했지만  12이맘파는 알라가 이로서 이맘의 계보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믿지 않는다. 즉 숨은 이맘은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가 되어 이슬람을 회복하고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믿는 파이다.


3. 이맘파(이스마일파)


6대 이맘이던 자으파르의 아들 이스마일을 7대 이맘으로 믿는 파로 원래 자으파르는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했는데 둘째 아들 무사가 후계자가 됨으로써 이에 반대한 자들이 이스마일리아파를 형성했다.


이스마일파의 신학은 주목할만하다. 그들은 신에 대해 부정어법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신이 존재한다기 보다 비존재하며 현명하기보다 무지하지 않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어법은 다시 부정되어 신은 무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이중부정어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부정 언어사용은 신이 인간언어에 상응하지 않음을 지적해줌으로써 신을 표현하는 언어의 한계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상용한 부정어법은 신의 절대 초월성을 상기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신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신은 인간의 선의 영역을 초월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어법 표현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스스로의 소망과 편견을 담아 신존재를 구성하여 투영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나 부정어법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신에 대한 긍정적 개념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신학과 철학>


쿠란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에서 차지하는 것과 동일한 지위를 이슬람 교리 속에서 차지학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육화개념처럼 말씀이 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쿠란에 대한 이런 극진한 존경도 무함마드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최후의 사자로서 그는 다른 모든 인간 위에 자리잡고 있다.


1.하와리즈파(카와리지)


이들은 그이전의 지도자였던 알리에게 대항한 자들도 알 리가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인간의 술책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행위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는 입장의 윤리지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중죄인은 무슬림이 아니며 지옥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


2. 무르지아파


카와리지와 쉬아가 끊임없이 우마이야조 타도운동을 전개하지만 무르지아들은 그 반대투쟁에 가담치 않고 그들 카와리지 쉬아 선동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훌륭한 무슬림이라는 견해를 갖는다. 무르지와란 최후의 심판일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때까지 판단을 연기하지라는 뜻이다. 압바시아조에 들어와서 칼리프계승문제에 대한 큰 논란이 없어졌을 때에도 그들은 신학적 분야에 매우 안이한 태도를 취했다. 즉 그들은 다른 신자들의 죄에 대한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오로지 용서할수 없는 죄는 하느님께 동반자를 두는 사람들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신앙심 그 자체이고 행동상의 과오로 신자와 비신자를 가르지 않으며 살인 간통같은 사회중범자도 비신자로 파문될수 없고 참회하면 언제나 구원가능.


이들은 하와리즈파와 반대로 사람들의 신앙심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은 행위를 통해 증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의 문제이다. 중죄인일지라도 불신자가 아니며 지옥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 이 파는 압바시아 초기 아부 하니파가 순니의 이라크학파를 창설하고 그 융성기에 들어갈 때 큰 영향을 미쳤다.


3. 무타질라파 (사변신학)


아랍어 무타질라는 ‘분리하다’는 뜻인데 이는 4대 칼리프 알리파와 그 반대파의 논쟁에 있어 어디에도 가답치 안흔 중립의 사람을 가리킨다.


무르지아의 안이한 태도를 개혁하고 보다 적극적 이론으로 종래의 카와리지 쉬아파 교리에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무으타질라파이다. 8세기 초 이스람세계의 무학적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던 바스라에서 당시 최대 신학자 핫싼(하산) 바스라가 강론하던 중 그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와실 이븐아타’가 중죄인은 무슬림인가 비무슬림인가라는 질문에 “중죄인은 신자도 비신자도 아닌 중간적 위치”라고 답해 그의 추종자를 이끌고 핫싼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 핫싼은 와실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한 것에서 -로부터 떠난 사람 분리주의자들즉 무으타질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파는 중죄인은 신자대열에서 제외된다는 광신적 카와리지의 견해와 중죄를 지은 자도 근본적으로 신자에 속한다고 본 무르지아파의 중간적 견해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꾸란의 전통적 해석과 주류파의 교리를 거절하고 계시를 이성을 이용하여 철학적 원리에서 풀이하는 쪽을 택하였다. (종교적 요소보다 철학적 요소가 강한 것)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고 익명의 에정설에 기울어진 무르지아파와 큰 논쟁을 벌이게 된다.

하와리즈파와 무르지아파 사이의 무타질라파(삼가는 사람들 자신을 분리시킨 사람들)이 태어났다. 중죄인의 문제에서 그들은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즉 중죄인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다. 이들은 신학논쟁을 이성에 호소했지만 윤리문제는 인간자유의지와 책임을 인정한 카다리야파를 따랐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원론적 영향으로부터 이슬람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라크 지역에서 심각한 신학적 위협은 이란의 이원론이었다. 마니교의 침투가그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에 대처하기 위해 무타질라파는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을 최대한 분명한 형식으로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에게 타우히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피조물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인동형설에 반대)116


그들은 꾸란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원초부터 존재하였으며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이파는 쿠란은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창조가 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었다. 무으타질라는 신은 몸체나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며 감각으로 느껴 파악될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무으타질라파는 인간노력의 중요성을 배제한 예정설과 그것을 강조한 현실참여설의 두 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입장을 취했다. **


<사변신학의 기본원리>


1. 이성의 강조-신학문제에서 마지막 판단자는 인간의 이성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보수파로부터 주리주의자라 비난 받는다.


2.순수한 유일신교 -의인법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래서 코란에 인간의 모습을 닮은 표현이 나오면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하느님의 속성은 비유적 의미로 설명한다.


3. 코란의 창조- 신의 유일성을 강하게 주장하다보니 코란의 영원성도 부인하게 되었다.


4. 인간의 자유와 책임-인간행동에 대한 이슬람의 전통사상은 예정설인데 사변신학은 자유와 예정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자유의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4. 알 아샤리의 신학


그는 고유한 주장이 없고 전통신학과 사변신학(무으타질라파)사이의 중간노선을 걷는 중도적 교리를 제시함. 그의 신학의 부흥으로 철학적 사변신학은 이단자로 몰려 그들의 저서가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그는 사변신학이 인간 이성을 너무 높이 평가하며 신의 정의를 너무 인간적으로 설명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코란이 비창조물이란 옛주장을 고수했다. 그는 사변신학에 반대하여 신의 속성을 독립된 개념으로 미화시키고 예정설을 주장하면서도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행동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으타질라파였는데 무함마드가 그에게 나타나 하디스를 학습할 것을 명령하는 꿈을 꾼 뒤 전통주의자로 전향했다. 그는 전통주의자로 변신한 후 무으타질라파를 격렬히 비판하여 합리주의 이슬람을 이슬람에 내려진 저주같다고 설교했다.


그후 그는 다시 꿈속에서 무함마드로부터 합지주의적 논증을 포기하지 말라는 꿈을 꾸고 이븐한발의 불가지론적 정신을 보완하기 위해 무으타질라파의 합리주의적 논증을 사용했다.  그는 신의 계시가 비합리적일수 없다는 무으타질라파의 주장에 호응해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 신이해의 불가능을 입증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성이 신을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 변모시킬 위험이 있을 때 꾸란에 나타난 생명력이 넘치는 신의 역동적 본질에 귀를 기울였다. 이처럼 그는 반계몽주의자와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이의 평형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칼람이라는 무슬림 전통을 창시했는데 이는 보통 이슬람 신학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칼람은 신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점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서양에서 기독교신학이 차지하는 것만큼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무으타질라의 신학적 도전에 대해 주류파는 그들의 신조를 구체화하여 주류파신학을 체계화했는데 그 대표적인 선구자가 알 아샤리이다. 그는 처음에는 무트타질라파에서 출발했으나 후일 주류파에 가담하여 대법전을 편집했다.


그는 무타질라파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그는 하느님이 인간적 사고를 통해서 이해될수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에게는 세상사가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법칙처럼 보이나 이는 태초부터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동일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하느님의 관행에 기인할 뿐이라고 주장. 그는 일곱 개의 신의 속성인 모든 삶 모든 지식 힘 의지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 알라의 행위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스스로 보고 듣고 알고 어떤 것을 할수 없으며 모든 일의 원인은 알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코란의 말은 알라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읽히고 낭송되는 종이위에 씌어 있는 글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오랬동안 끌어왔던 코란의 영원성 문제에 대한 이런 해결방안은 대부분의 무슬림의 즉각적 지지를 받았다.  알라는 인간의 이성과는 다른 그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알수도 없고 알고자 하는 오만을 가져서도 안된다.


5. 팔사파


팔사파는 철학으로 번역되며 팔사파에 종사하는 자, 이슬람 철학자는 파일라수프라고 부른다. 그들은 처음 자연과학에 몰두했으나 그후 필연적으로 그리스 형이상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원리를 이슬람 신앙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그리스철학의 유사성을 발견했으나 그리스철학의 신이 성서의 역설적 모습의 신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일라수프는 합리주의 철학이 가장 진보된 종교형태를 나타낸다고 믿었고 성서의 계시의 신보다 더 적절한 신개념을 도출한다고 믿었다. 301


그러나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파일라수프의 신앙은 대부분의 무스림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전통 이슬람신앙과 새로운 그리스 철학의 신개념을 결합시키려 한 파일라수프는 중요한 종교적 진리의 본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즉 칼람 (이슬람 신학)은 역사를 다양한 형태의 신출현으로 봐았으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모든 일이 신존재를 드러내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아샤리파는 보편적 법칙과 탈시간적 원리에 의해 세계가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그러나 파일라수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 형태의 역사이해를 부정하고 아샤리파가 거부한 보편법칙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올바른 종교형태가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무함마드의 보편적 종교관을 꾸란이 보여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합리주의적 신앙을 위해 꾸란에서 무언가를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치 않았다.


하지만 팔사파의 원리나 수피즘의 신화 그리고 쉬아파의 이맘에 관한 이론 곧 이맘론은 궁극적 진리에 대한 합리적이고 상징적 접근방법을 수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난해한 한 것이다.  그리스 기독교인은 소수만이 점유하는 비의 전통을 발전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케리그마를 통해 진리를 해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비의적 진리추구자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박해 말살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비의적 진리추구자들은 박해받지는 않았다.

 


< 쿠란과 그 가르침>


쿠란이란 읽는다 소리내어 외우다라는 뜻으로 거룩한 경전의 낭송을 가리킨다. 알라신의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무슬림신학에선  4단계로 설명한다.


1.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하여 그 근원이 천국에 있다.

2. 하늘의 계시를 가브리엘천사가 지상에 가지고 와서 무함마드에게 전달했다.

3. 천사는 계시의 말마디를 예언자의 귀에 들려주었고 예언자는 이를 하나도 빼지 않고 신자들에게 독송해 주었다는 것이다.

4. 코란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쿠란은 예언자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말씀 그 자체이다. 그래서 쿠란은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생각할수 없는 일이다.


1) 꾸란의 편집과 형성과정


무함마드는 문맹자였으므로 들리는 것을 그대로 뇌이면 그것을 옆에서 기록했다. 무함마드는 20년간 114개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가 죽은 후 그것이 주변가족의 기억에 맡겨졌다. 자이드 이븐 타비트가 쓰는 일을 맡아서 했는데 무함마드가 죽을당시 계시의 책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글을 받아 쓴 동료들이 양피지나 여기저기 적은 것이 꾸란의 원본으로 이것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제 1대 칼리프인 아부바크르가 모아서 묶은 것이다. 즉 무함마드가 죽은 후 후계자 아부바크르는 당시 22세된 자이드 이븐 타비트에게 계시를 모아 코란을 편찬할 책임을 맡겼다.


아부 바크르가 죽기전 그의 후계자인 우마르에게 위임되고 우마르는 그의 딸이며 무함마드의 처인 하프사에게 쿠란 편찬을 검토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 이는 정식경전이 아니었다.


그후 오스만 칼리프시대가 오면서 꾸란이 잘못 읽혀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하우사가 가지고 있던 원본의 복사본을 만들어서 바그다드 이집트 다마스커스로 보냈다. 이것이 오늘날의 꾸란인 오스만본이다. 


그후 당시 칼리프 우트만은 전아랍 세계를 위한 통일된 코란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 자이드로 하여금 다른 쿠라이시족 출신 지도급 인사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재료를다시 수집하고 검토하여 최종의 코란을 쓰게 했다.


드디어 무함마드가 죽은 지 25년 만에 칼리프이름으로 쿠란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쿠란을 모두 없애도록 해서 애석하게도 새로 편성된 코란과 어떻게 다른지 대조해볼수 없다.


2. 이성의 문제


이슬람은 7세기에 시작해서 10세기에 샤리아의 틀이 짜여져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타질라파가 형성되면서 이성이 중시되었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맥에서 알 아샤리파가 생기고 이들이 이스람 신학의 도태를 만들었는데 그 맥을 이어 가잘 리가 나오고 그에 의해 신관이 정리되어 오늘날의 이스람 주류신학이 형성되었다.


3. 이즈티하드


이는 독자적 법판단으로 기본적인 틀은 움직이지 않으나 법적용에 있어 없는 사항은 이즈티하드를 한다. 


2) 코란의 중개자 역할


그리스도교신조에 의하면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중개자는 그리스도인데 반해 이슬람은 코란이다. 그리스도교에선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이슬람교에선 코란을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말씀이라 한다.


3) 경전에 대한 태도


무슬림은 꾸란을 읽는다는 것이 영적 수련을 뜻한다. 꾸란을 올바로 대할 때 그들은 초월의 감각을 그리고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현상 이면에 숨겨진 힘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신의 말씀이란 예수 그리스도로서 신약성서를 기록한 그리스어에는 어떤 거룩성도 없다. 유대인은 토라에 대해 무슬림과 같은 태도를 갖는다. 그들은 경전을 크게 낭송하고 신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하신 것으로 여겨지는 그들의 말을 음미한다.


꾸란은 셈족이 가지고 있던 신의 통일이라는 이념으로 회귀하고 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상상을 거부했다. 천지의 창조자인 알라 외에 어떤 신적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라만이 인간을 구원할수 있으며 인간에 필요한 영적 물질적 양식을 제공할수 있다. 266


<다섯가지 기본의무; 5기둥>


이는 이슬람 종교생활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슬람 신자들은 다섯 종교적 의무를 지켜야 한다.


1) 신앙고백


꾸란은 신이 우주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긍정적 특질의 근원이기에 더 위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99가지의 명칭 또는 속성을 표현한다. 이슬람의 신앙의 기둥 중 첫째는 샤하다 즉 “나는 알라외에 다른 신 없다는 것과 무함마드가 그의 예언자임을 증언한다”고 하는 무슬림으로써의 신앙고백이다. 신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숫자적인 정의가 아니라 오직 알라만이 인간 삶과 사회의 유일한 구심점임을 뜻하는 것이다. 268

첫째 기둥인 신앙고백(샤하다)는 “저는 알라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자임을 증언합니다”라는 것이다. 이 증언은 유일신과 체계의 확립과 무함마드의 인격을 정의한다. 신비신학자 가잘리는 99개의 신의 훌륭한 이름을 알라신에게 적용했다. (이슬람 묵주는 33개로 되어있어 이를 3번 돌리면 알라신의 이름을 모두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메카인의 다신론적 전통을 거부하고 무함마드의 예언자적 임무의 정당성을 증언하는 이 신앙고백은 매우 위험한 시도였다. 신은 하나이며 다른 신들과 그 유일신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죄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인도할 때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느냐 아니면 이미 그의 운명을 결정하였느냐(예정설) 코란의 어느 부분은 자유의지를 어느 부분은 예정론을 찌한다. 이 다양함은 당연하다. 무함마드는 20년 남짓 엑스타시 상태에서 말을 한 예런자이다. 즉 그는 체계적인 신학을 형성하였다기 보다 오히려 그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이슬람이 독자적인 종교라는 사실은 신앙고백의 후반부이다. 즉 하느님의 유일무이성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은 무함마드를 통해서 주어졌다. 무함마드는 예언자 중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며 예언을 완성시킨 마지막 예언자이다. 무함마드가 하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잘 암시해주는 것은 미라즈 또는 예언자의 밤여행에 관한 전승들 하디스이다. (알라는 3가지 방법 즉 무함마드 코란 천사를 통해 자신을 뜻을 밝힌다. 코란은 인류에 대한 알라의 완벽한 마지막 말이다. 전통적인 무슬림들의 입장에 의하면 코란은 잘 보존된 화판, 경전의 모체,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원형으로부터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된 말들이다. 셋째 방법은 천사를 통해서이다. 천사들 중 우두머리가 계시의 천사인 가브리엘인데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암시해주는 용어로 충실한 천사 성스런 천사로 묘사되었다. ) 이외 예배, 구휼세, 라마다중의 단식, 메카로의 순례가 있다.


2)예배(기도)


무함마드는 무슬림에게 예루살렘 대신 메카를 향해 기도할 것을 명했다. 기존의 유대교 기독교와 무관한 메카의 알라신전을 향해 엎드려 기도함으로써 무슬림은 기존의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알라에게만 헌신한다는 것을 무언중에 선언한 것이다.


예배는 하느님께서 예배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으로 어떤 기복을 청하는 기도와 다르다. 다른 모든 것에 선행되는 종교의무로 이스람은 이를 코란을 읽는 공적 예배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배의 방법은 하디스에 근거한다. 하루 다섯차례 예배를 본다.(동틀녁, 정오, 오후3시경, 해질녁 어두어진 후 잠자리에 들 때 기도를 한다.


 예배는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므로 첫째 청결해야 한다. 예배전에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우두를 행해야 하며 신체의 중요한 부분은 가려야 한다. (여자는 얼굴 손 발제외한 모든 부분을 가려야 한다. 남자는 배꼽아래 무릎까지) 얼굴은 메카방향을 향해야 한다.


이스람에는 사제계급도 없고 성직자 계급도 없지만 예배를 인도하고 교리를 해설하고 성원의 관리 및 신자의 지도를 맡아 일종의 사제수행을 하는 사람을 이맘이라 한다.


3)구휼세(자선)-규정된 희사 (성금)-자카트(zakat)


하느님께 헌금하는 것이다. 즉 재물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관념으로 인간은 재화를 잠시 맡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빈자구호금 희사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 궁핍한 자, 빚진 자, 노예, 여행자, 거지에 대한 자발적인 선물이나 여러 자선금을 의미한다. 이는 자카트라고 하는데 무슬림 세계에서 보편적인 의무가 되었다. 현재 무슬림 국가는 개인이나 가족이 1년번 재산의 2.5%를 자카트로 내야 하며 이는 국가가 관장한다. (자신의 수입의 1/40을 바침)


자카트(구휼세)는 자신을 정화시킨다(자신의 잘못을 갚아 구원에 이르는 길)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하느님에게 해 드리는 대부금으로 간주되었다. 그 액수는 율법에 의해 정확히 산정되어 있다. 노예, 감옥수, 빚진 자, 여행하는 자 혹은 모스트 수리 등에 쓰임. 자카트는 잘만 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이념을 막을수 있는 수단처럼 보인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를 받아 가난한 사람을 지원하는데 사용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성금제도는 법률학자의 의견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4) 단식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받은 날짜가 라마단의 마지막 10일에 해당되므로 이 시기동안 단식하고 기도한다. 단식의 의미는 두가지로 하나는 욕심과 쾌락을 눌러 자아통제하는 면과 다른 하나는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여 이를 이웃에 자선함으로써 알라신에게 선물을 드리는 면이 있다. 라마단 한달동안 코란을 30일분으로 나누어 매일 조금씩 읽어 다 마친다 또 라마단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달이므로 자선사업을 위한 헌금도 많이 한다. 라마단 마지막 날에는 단식을 마치는 축제를 벌린다. 이슬람 음력으로 9월에 해당하는 라마단 한달내내 무슬림들은 식음과 끽연 방향류의 음미나 성행위를 낮시간에 할수 없다. 병든 사람이나 아픈 사람 여행자를 제외하고 이 단식은 모든 무슬림이 지켜야 할 의무이다. 목적은 속죄 절제 평등 일치를 위함이다. 아프거나 여행시에는 제외된다. 단 3끼를 먹는다. (해가 진 뒤 자기전 해뜨기전)


5) 성지순례(haji)


모든 무슬림은 가능하면 최소한 평생 한번은 하지(메카순례)를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가장 큰 신심행사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람 종교를 재인식케 하고 아브라함  무함마드가 자닌 신앙을 새롭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즉 순례를 이슬람 신앙의 근본뿌리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슬림이 알라의 실체를 강렬히 체험하며 개별적이며 공동체적인 이슬람교 영성을 뚜렷이 표현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메가의 순례의식은 카바의 순행부터 시작된다. 메카의 회교당 가운데 있는 네모직 건물을 카바라 하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 중심축이 되어 전 세계 모슬렘들의 기도방향이 되고 이스람 지성소가 되고 있다. 다음에 소순례 대순례 대축제로 이어진다. 무슬림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 순례의 목적이다.



<움마>


1.이스람과 공동체 (현세적 특성)


이슬람은 공동체중심의 종교이다. 그러나 종족주의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신앙적 결단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다. 즉 공동체적 결속력이 다른 종교보다 강하다. 이스람은 정치 경제 법률 모두를 하느님의 뜻으로 실현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즉 성속의 구분이 없다. 다시말해 세속화된 종교 혹은 종교화된 세속(정경의 종교화, 종교의 세속화)이라고 할 수 있다. 


2. 샤리아; 이슬람법


* 하느님의 유일성 그리고 하느님이 최종적으로 보낸 예언자로서의 무함마드의 지위에 대한 믿음만 제외한다면 이슬람에서는 종교적 실천이 교리적 가르침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슬람은 정통교리라는 말보다 정통실천이 어울린다. 이런 의미에서 무슬림에게 있어 샤리아는 중요한 의미를 띤다.


공동체 움마의 기본이 되는 것이 곧 샤리아이다. 즉 샤리아는 이스람의 이상이라고 할수 있다. 샤리아의 첫째 기본은 코란이다. 코란은 율법적인 성격이 강하다. 또한 실천적인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인간은 입법자가 될 수 없다. 오직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할 뿐이다. 


즉 샤리아는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계시된 영원하고 초월적인 법으로 하느님이 직접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 법(神政法)으로 고칠수 없다. 이는 법원을 신의 의지에 두는 신성법으로 그 목표는 신에 귀의 복종하는 것이다. 샤리아의 기본규범은 꾸란과 순나(관습 전통 구체적으로 무함마드의 언행을 뜻한다. )이다. 순니는 순나를 쫓는 추종자들로서 쉬아나 다른 이스람 종파에 대해 전통파로 불리워진다. 전 세계무슬림의 90%가 순니이며 순니에는 아무런 분파가 없다. 그러나 샤리아(법)의 해석 및 적용에 있어 견해 차이로 4개의 법학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이스람의 법체계를 휫끼라고 하는데 그 바탕은 꾸란과 하디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사법적인 문제가 야기되면서 쿠란과 순나이외 무언가 더 필요함을 느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법학파의 길이 출현했다. 오직 쿠란과 하디스(예언자의 언행록)에 기초한 길, 유추의 방법을 도입하는 길,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사용 의지하는 길이 그것이다.


3. 하디스


코란이 기본이지만 코란만 가지고는 생활하기 힘들어서 생긴 것이 하디스이다.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으로 계시인 코란 다음으로 중요하다. 원칙적으로는 코란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실제적으로 하디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디스는 예언자의 전승으로 순나라고 하며 일종의 쿠란 해설서이다. 무슬림들은 순나의 외형적인 면을 따르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와같이 일상생활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무함마드를 본받기에 의해 전세계 무슬림 공동체가 상당히 통일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무함마드 자신 또는 메디나에 있었던 그의 동료들에게서 보고 들은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함메드의 사후 2세기가 지나면서 신빙성 있는 전승을 편찬하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평가기준은 순수성 정당성 빈약성이 판단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6개의 서로 다른 전승집이 편찬되었는데 그중 가장 권위있는 것이 알 부크하리의 전승집이다. 그는 이라크 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대단한 분량의 전승을 수집하였고 그가 순수하다고 생각한 7275개의 전승을 편찬햇다. 이 전승집은 코란 다음의 권위를 지닌다. 6개전승집외에도 말리크 이븐 아나스의 무와타, 아마드 이븐 한발의 무스나드도 6개 전승집과 비슷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4.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분명한 말이 없는 문제가 생길 적에 사용하는 방법으로 하디스를 보충하는 것이 공동체의 일치된 의견인 지나(jina)와 유추논리( Qiyas)이다. 지나는 공동체의 합의로 코란과 하디스에 없는 것은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 이에 반해 퀴야스는 유추법으로 비슷한 것으로부터 유추하여 판단하도록 이성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5. 4학파


1) 이맘 아부 하니파(하나피학파, 이라크학파)-자유중용주의


이 학파는 신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법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였다. 이 학파는 아부 하니파에 의해 이라크에서 창시되었으며 그 추종자들은 하니파의 가르침을 아랍어로 기록했다. 그는 코란(하디스는 거의 고려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여 코란의 가르침이 이라크에 어떻게 적용될까에 관심을 가졌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마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할때는 코란을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때는 코란에서 유추하여 이라크의 상황에 적용시켰다. 


2)말리크 이븐 아나스(메디나학파)-전통주의


말리크에 의해 창시되었은데 그는 코란과 하디스에 의해서 법과 의식을 해석했으며 애매할 경우에는 메디아의 합의된 의견에 의존했다. (법체계 구성에 꾸란과 하디스를 절대적으로 적용하였고 메디나사람들의 관행과 습관에 기초를 둔 순나를 그 구성에 포함시킨다.)


말리크는 일생을 메디나에서 하디스 연구에 바치고 법률적 문제를 다룬 <무화타(무왓다)>라는 하디스 모음집을 최초로 완성, 비교적 적은 분량의 하디스 모음집이지만 내용은 권위가 있고 충실하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삽입치 않았다.


3)샤피이학파-보편적 의견일치


알 샤피이는 법의 4가지 근원을 구분했는데 알라의 계시(코란) 예언자의 언행(하디스에 나타난 예언자의 관습과 행위) 특히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그리고 이성에 의한 유추가 그것이다. 그는 코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주어 때로 하디스 중 어떤 것이 더 특수하고 분명할 때는 코란보다 이것을 더 인정했다.


샤피학파는 말리크와 하니파가 주장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개인의 의견과 슬기로운 知者의 의견첨부를 반대한다. 그들은 공동체 의견일치가 법해석의 분명한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다.


샤피이는 휫끼를 학문적 법체계로 완성한 사람으로써 후기 이슬람 법학자들은 샤리아가 샤피이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그의 추종자 중 이븐 한발 리가 있다. 그는 샤피이를 메디나 학파와 이라크학파의 절충자로 보고 개방적인 이라크학파의 이론과 보수적인 메디나학파의 절충적 법이론을 세웠다고 평했다.


4) 아흐마드 이븐 한발: 한발리 학파-엄격주의


한발은 알 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 대해선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이었다. 그는 순수한 전통주의자였으며 쿠란이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말씀인지 여부를 놓고 그가 무타질라파와 벌인 불굴의 투쟁을 벌렸다. 첫째는 코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는 신에 대한 모든 형태의 합리주의적 논의를 거부한 전통주의자였다. 그는 무으타질라파였던 알 카라비시가 제시한 꾸란이 객체화된 형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나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때에 하나의 객체로 창조되었다고 한 타협적인 교리를 거부했다.


* 이슬람은 5가지 행위의 규칙을 샤리아에 의해서 정한다.


1) 의무적 행위 -5기둥은 반드시

2) 반드시는 아니지만 권장할만한 것

3) 허용된 것(이혼)

4) 완전금지된 것

5)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반대할만한 것.


<신비주의>


샤리아를 중심으로 한 사회공동체가 곧 이슬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느님을 명령자, 주인으로서 이해하고 인간은 그 종으로서만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초월성보다 하느님의 내재성 즉 사상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신비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종교 내의 종교로서의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가 생긴 것인데 이것은 율법중심적인 전통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다. 수피즘은 순니의 한 파로서 쉬아파 전통 내에서 배척되고 있지만 이슬람 특징 중 하나이다.


8세기, 9세기의 무의타질라파나 쉬아파처럼 아랍 귀족층의 사치생활을 비판하고 초기이슬람 공동체의 근검생활의 부활을 강조한 금욕주의 이슬람 신앙이 태동하였다. 그들은 메디나의 초기 무슬림의 검소한 생활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했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즐겨 입었다는 거친 모직옷을 입었다. 그결과 그들은 수피라고 불리게 되었다.416


수피(금욕주의자들이 입고 다녔던 양털로 된 누더기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염색되지 않은 거친 털옷을 입은 고행자, 극기하는 자)로 불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