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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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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건>
어제 경향신문을 읽다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온 다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334쪽, 1940)
이 표현은 ‘역사가란 과거의 사실을 가능한 한 객관적 시각을 갖고 서술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을 부수어버렸다.
벤야민은 역사란 단순한 과거 사실에 대한 체계적 서술이 아니라 순간의 기억을 포착하는 거란다. 그것도 섬광처럼 스치는!
이처럼 역사가에게 번쩍 스쳐가는 그 순간은 분명 위험이나 위기라고 느끼는 때이겠다.
지난해 우리가 경험한 세월호 사건 같이 말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고심했듯이 그 사건을 해결해줄 메시야는 우리가 기대하던 모습으로 오진 않는다.
곧 즉각적으로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진 않는다는 의미겠다.
다시 벤야민에게 귀 기울려 본다. “메시아는 적(敵)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적그리스도는 누구일까?
바로 그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려 하는 이들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 앞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으리라.
요즘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을 강조한다.
그 의미하는 바도 이와 맥을 같이 하리라.
우리가 저지른 치부를 감추고 덮어버리려 하는 우리들의 적 그리스도.
그 적을 청산치 않는다면 제2, 제3의 세월호는 또다시 발생하고 말리라.
문제를 직시하고 공동체가 그 문제를 공감하도록 하려면 역사가의 문제의식은 투철해야 한다.
섬광처럼 스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것을 역사의 흔적으로 남김은 깨어 살지 않으면 불가능하리라.
그러기에 진정한 역사가는 오늘을 깨어 사는 이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