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모임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컬럼

격변의 시대, 희망의 지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6-05-15 11:07

본문

― 편집서언  (2026.5)

격변의 시대, 희망의 지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도

얼마 전 전쟁 소식 속에서 인공지능이 탑재된 드론과 미사일이 목표를 정확히 찾아내 파괴하는 장면을 보았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목표를 선택하고, 기계가 그것을 실행하는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누군가는 그 정밀함을 인간 문명의 놀라운 성취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떤 지도를 가지고 항해해야 할까.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고 있지만, 그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말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분명 우리가 탄 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건너고 있는 바다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마트폰의 지도는 우리가 갈 곳을 정확히 알려줄지 모르지만, 마음의 지도는 어느새 길을 잃어버린 듯하다. 우리가 겪는 이 혼란은 단순한 개인의 방황이 아니라 시대 전체가 보내는 하나의 신호가 아닐까.

길을 잃은 이에게 지도는 안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좌표가 있었고 경로가 있었으며 노력하면 도착할 수 있는 목적지가 있었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그리고 은퇴로 이어지는 삶의 항로 역시 비교적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바다는 전혀 다르다. 기술은 우리에게 속도를 주었지만 방향을 주지 않았고, 삶은 이미 기존의 경계를 넘어 흘러가 버렸다.

혹자는 우리가 느끼는 불안을 개인의 결함처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조건에서 비롯된 감각에 더 가깝다.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옛 지도가 더 이상 우리의 항해를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완성된 지도를 찾는 일을 잠시 멈추고, 항해의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본다. 좌표 대신 관계를 살피고, 성공의 수치보다 삶의 정합성을 묻는다. 오늘의 선택이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기울어 있는지, 더 생명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방향 감각만은 잃지 않으려는 시도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시대의 지도는 율법의 목록이 아니라 ‘길’의 감각에 가깝다. 예수는 도착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길을 가리켰다. 길은 소유할 수 없고, 걸어야만 드러난다. 그래서 신앙은 정답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매 순간 생명 쪽으로 기울어지는 연습이 된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떤 지도를 펼쳐 보일 수 있을까.

교종 레오 14세께서는 작년 10월 발표하신 교서 「희망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에서 이 질문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시하셨다. 교종께서는 교회가 이미 완성된 답을 제시하는 기관처럼 행동하기보다 희망의 방향을 함께 찾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희망은 이미 완성된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그려 가는 용기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새로운 지도는 교회가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함께 조금씩 그려 가는 모자이크와 같은 지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완전한 지도는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다시 그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 실린 여러 필자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바로 그 모자이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길을 보여준 젊은이들>이라는 권미나 수녀님의 글 속에는 이라크의 청년 사파와 조선 초기 교회의 젊은 신앙인들이 시대를 넘어 신앙 안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안에서 나는 시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신앙의 빛을 보았다.

현재우 님의 글 역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난 진솔한 성찰로 잔잔한 설득력을 전한다. 특히 자신의 성장기와 자녀들의 성장기를 비교하며 들려주는 이야기, 그리고 CLC 평신도 공동체에서 경험한 ‘청년 공간 모락모락’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더 깊은 환대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고백은 점점 척박해져 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환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속한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서울 성북동 영성센터에서 봉사했던 장면도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매주 젊은이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어 나누고 있다. 수녀들이 함께 도시락을 만들고 봉사의 마음을 낸 평신도들이 그것을 청년들의 집까지 배달한다. 그렇게 수도자와 평신도, 그리고 젊은이들이 도시락 나눔을 통해 하나의 환대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 청년 전호연 님의 글을 읽으며, 그가 말한 것처럼 참으로 ‘예쁜 시절’을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겨운 시험 준비 속에서도 자기 안에 수많은 불빛이 있음을 자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렇듯 필자들의 신앙 체험과 삶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방향을 잃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작은 희망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성 헨리 뉴먼은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거대한 권력이나 힘이 아니다.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의 말, 가슴 한켠을 건드리는 따뜻한 미소, 그 작은 몸짓 속에 담긴 사랑이 또 다른 마음으로 전해지며 서서히 세상을 바꾸어 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폭력과 절망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그리고 그 마음에서 솟아나는 사랑과 생명의 힘은 그 누구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나는 처음 던졌던 질문 앞에 선다.

“우리는 지금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는가.”

교종 레오 14세께서는 교서 「희망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 위에 서서 길을 지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걸으며 희망의 지도를 그리는 공동체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바로 그 희망의 지도를 함께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닌가 싶다. 완성된 지도를 손에 쥔 채 세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과 신앙의 이야기를 통해 아직 그려지지 않은 길을 조금씩 밝혀 가는 일 말이다.

희망의 지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도를 함께 그리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 이미 이 시대의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