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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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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Socialization process of Sinhala Buddhism
-The relationship between Sangha and the laity -
Choi Hyun Min (A visiting professor in Religious Studies of the Sogang University)
<요약문>
본 논문에서는 스리랑카불교를 전통불교 개혁불교 도시 불교로 나누어 각 시대별로 승가와 재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승가는 자체 유지를 위해 왕의 보호와 후원을 요청하면서 대신 왕의 권력에 성스러움 내지는 합리성을 부여해줌으로써 상호공생관계를 이루어왔다.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는 복전(福田)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복전사상은 물질적 원조가 필요한 승가의 요청과 개인적 행복을 획득하려는 재가신도들의 요청이 만난 것으로 민중불교 교리의 중심 기둥이 되어왔다.
그러나 스리랑카가 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불교 내부에도 개혁 바람이 불어 개혁불교가 태동하였다. 개혁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는 재가자들에게 세간적 금욕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도시엘리트 불자들에게는 영향을 주었으나 많은 재가자들이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제도적 개혁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즉 개혁불교는 대중들의 신앙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개혁불교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도시 불교이다.
도시 불교는 전통불교와 개혁불교의 윤리관에 대한 대응책으로 정령신앙을 수용하여 점차 되시 빈민가에 자리를 굳혀갔다. 도시빈민층에 의해 변형된 정령신앙이 사찰 내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스리랑카 승가는 특별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정령신앙의 대상인 신들의 지위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전통적인 만신적의 신들을 대신하여 카타라가마신이 주요신으로 등장했고 1965년 이후가 되면서 후니얌신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상좌불교 내 정령신앙이 뿌리를 내려감은 전통불교 내에 대중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줄 요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불교는 정령신앙을 사찰 내 수용함으로써 대중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주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불교가 정령신앙을 수용했지만 이는 여전히 주변적인 위치에 자리한다. 그들 신앙의 중심에는 역시 붓다가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경전과 승려가 중심인 출세간적인 면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 역시 출가자와 재가자의 이중구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불교의 구원론이 지닌 교의적 특성 안에서 볼 때, 승려와 재가자 간의 이원론적 구조는 극복되기 힘들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불교가 민족불교로서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통성을 유지해 온 승가 내에 변형된 재가자들의 신앙형태를 관대하게 수용하려는 자세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이는 재가자들의 신앙체계를 사찰 내에 흡수함으로써 승가와 재가자 간의 괴리감을 좁히고자 한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이며 세속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현상에 대한 평가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가능하겠지만 이를 한국불교의 사찰내 민중신앙 수용과 비교함은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작업은 한국불교의 사회화 과정을 성찰하고 촉구하는 밑거름이 되리라 본다. 산중불교에서 생활불교, 대중불교로 거듭나 신도들과 소통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기 위해서 한국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한국불교는 현대 사회 정치 경제의 변화에 따른 대중들의 종교성에 얼마나 귀기울이며 응답하고 있는지, 산중불교, 수행자 위주의 불교로서 이로 인해 생겨난 일반대중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점들이 바로 그것이다.
주제어: 스리랑카불교의 사회화, 승가와 재가자들의 공생관계, 개혁불교, 도시 불교, 사찰의 정령신앙, 신들의 권위구조의 변화.
Ⅰ. 문제제기
초세간적 구원관을 강조하는 종교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을 내세적인 측면에서 찾기에 현세에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불교도 처음부터 출세간적 종교로 출발하여 승려들의 종교,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인식해 왔기에 사회나 정치, 경제와는 거리를 둔 종교로 여겨 왔다. 물론 붓다의 가르침에도 사회적 메시지가 있었고 재가자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본래 붓다가 지향한 것은 사회개혁보다 출세간적이었다.1) 즉 그는 인도사회를 개혁하고자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노예제도를 없애려 하기보다 출세간적 승가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제도의 실질적인 이익을 말한 바 있다.2) 이는 붓다의 궁극적 관심이 사회개혁보다 개인해탈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불교가 자기해탈의 구원관을 지녔다는 것은 불교가 출가자 중심이며, 승가 중심의 종교임을 의미한다. 붓다의 정법을 이어받은 상좌불교는 대표적인 승가 중심의 불교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동남아시아 특히 스리랑카 불교는 재가자들의 정령신앙을 대폭 수용한 종교로 탈바꿈해 왔다. 무슨 연유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본고는 이를 문제삼아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 접근방법을 통해서 스리랑카 사회 안에서의 불교가 변천해온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스리랑카 불교를 전통불교, 개혁불교, 도시 불교로 나누어 각 시대별로 승가와 재가자와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학적 측면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전통불교
1. 정법(正法)과 승가의 관계
상좌불교에서 승가는 붓다의 교법에 따라 수행하는 출가자 중심의 집단으로서 붓다의 교의를 지켜왔다. 즉 승가는 정법의 수호자로서 기능을 해온 것이다. 이와 같이 승가는 지계(持戒)의 수행자 집단이며 정법과 정률(正律)의 계승자로서 불교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보존되어 왔으므로 무엇보다 정법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승가의 청정성이 요구되었다. 이런 점에서 승가의 청정성 상실은 곧 정법(正法)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승가의 청정성이 상실되는 경우 역사적인 불교탄압으로 인해 구족계를 지닌 승려들이 사라짐으로써 올 수도 있고, 승가의 성원이 재계를 소홀히 함으로써 생길 수도 있다. 스리랑카 불교는 이 양 측면을 모두 경험했다. 먼저 역사적 승가탄압은 불멸후(佛滅後) 1100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5세기동안 스리랑카가 인도 타밀족의 침입을 받아 내정이 혼란해지면서 불교에도 큰 영향을 주어 오랜 기간 침체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때 구족계를 할 다섯 승려조차 없어 비구니의 구족계가 스리랑카에서 사라지자 비자야바후 1세(在位1059-1113)는 버마의 아누라타왕에게 사자를 보내서 상좌부 승려를 모셔오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버마로 전래되었던 상좌부 법통이 다시 스리랑카로 되돌아오게 됨으로써 스리랑카의 승가는 재건될 수 있었다.3) 이와 같이 법등(法燈)의 근원인 스리랑카의 승가가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쇠퇴되었을 때 미얀마로부터 청정한 승가를 이입받아 정법의 부활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정법이 승가에 의해 보존, 전승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승가가 정법의 수호자요, 보존자라는 믿음은 불교를 사회적 측면에서 고찰함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스리랑카 불교는 승가의 성원이 지계(持戒)를 소홀히 하여 승가의 청정성이 상실될 뻔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 승가는 왕에게 출가자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리적 조건을 부여하기를 요청했다. 그래서 국왕은 승가의 청정성을 유지할 의무를 받아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를 축출하여 승가의 청정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국왕이 승가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초세간적 해탈을 추구하는 승가가 어떻게 국왕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2. 승가와 국가(왕)의 관계
외적으로 볼 때 승가는 출가자 중심의 비생산적 집단이다. 생산수단이 없는 승가는 제도적으로 세속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기에 승가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재가자의 물질적 후원이 필요했다. 승가에 물질적 후원을 해준 가장 큰 후원자가 바로 국왕인 것이다. 그는 승가를 지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정법의 존속에 공헌해온 것이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실제 대도시와 궁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설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행처를 짓기 위해 부와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승려들은 승가를 유지하고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 국왕의 물질적 후원을 필요로 한 것이다.
또한 승가는 세속으로부터 물질적 후원 외에 승가의 질서유지를 위해 세속의 질서를 필요로 했다. 세속의 질서가 무너지면 도를 닦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승가 안의 질서유지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승가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질서를 지켜주는 것 또한 국가권력인 것이다. 이와 같이 승가는 공동체 내 질서 유지를 위해 정치적 권위인 왕권에 의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승가가 범죄자들을 추방하는 결정을 내린다 해도 승가 안에는 그것을 실행할만한 힘이 부족했다. 이 때 국가권위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승가가 국가의 후원을 받지 못했을 때 점차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다.4) 이렇게 볼 때 승가의 흥망성쇠 여부는 경제적 요인보다 정치적 후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마하밤사5)에는 승가와 국가 간의 공생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승가 후원이나 승가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분쟁해결, 승가의 이단문제가 생길 때 승가 내의 개혁에 대한 왕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다.6) 예를 들면 비르마다이왕은 파계승을 승가로부터 추방하는 정화를 실시했고, 교리시험 등의 제도화에 의해 출가자에게 세속적으로 자격을 부여하기도 했던 기록이 그것이다.7) 또 파가카마바후 1세(1153-1185 在位)는 국가승가로서 단일 권위구조를 세워서 왕이 승가를 통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구족례도 수도에서 일 년에 한번 실시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불교부흥을 저해하는 각 종파 간의 대립 기미를 유감으로 여기고 단호한 숙정(肅正)을 감행하기로 했다.8) 즉 출가자를 엄선하기 위해 생활이 문란하고 평판이 나쁜 비구를 환속시킨 것이다. 또한 새로 통일된 승가의 수련자를 만들기 위해서 승려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뽑아 다시 계를 주는 과정을 실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마하카사파의 충고에 따라 승가의 청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카티카바타(수도원 원칙에 관한 왕의 칙령)를 반포하기도 했다.9)
이상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역사 안에서 승가는 세속권력인 국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왕이 승가의 최고 보시자(布施者)로서 사원과 불탑을 세워 승가를 옹호한 것은 단순히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차원이 아니었다. 왕으로부터 재물보시를 받은 승가는 그대신 왕에게 세속적 권위와 정치적 지배의 정당성을 줄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주는 법시(法施)를 했다. 이렇게 볼 때 왕과 승가의 관계는 상호공생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이를 해석한다면, 승가는 그 자체 유지를 위해 왕의 보호와 후원을 요청하는 한편, 대신 왕의 권력을 한 차원 높여 전륜성왕이신 붓다의 권위가 왕에게로 내려왔다고 봄으로써 왕의 권력에 성스러움 내지 합리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10) 이러한 승가와 국왕의 관계는 정법과 국왕의 관계규명을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3. 정법과 국왕과의 관계
초기불교는 붓다의 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붓다의 삶을 통해 인식해온 의미들을 더 풍성하게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전륜성왕에 관한 것이다. 마하바단트 수타에는 비파신이라 불리는 과거불을 서술하면서 붓다의 이력을 전륜성왕의 이력에 직접 관련시키는 신화적 모티프로 묘사했다. 즉 신체상의 32상, 그리고 붓다가 깨닫고 설교한 것을 전륜성왕의 특권인 법륜돌림(轉法輪)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를 전륜성왕과 연관지어 해석한 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붓다에 대한 재가자들의 이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붓다는 처음에는 전륜성왕과 무관한 수행자의 신분이었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불자들 사이에 붓다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오면서 붓다를 전륜성왕과 연관지어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붓다와 전륜성왕의 상관관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국왕들은 붓다를 전륜성왕으로 봄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붓다에게 소급시켜서 거기로부터 자신의 권위가 나온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적인 왕으로 아쇼카왕(BC 268-232 在位)을 꼽는다. 아쇼카왕은 처음부터 선한 왕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그는 9년 동안이나 영토 확장을 위해 무고한 타국민(他國民)을 살상하고 비극의 씨앗을 뿌리면서 잔인한 파괴력을 자랑하던 정복자였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악한 행위를 뉘우치고 참회하여 불법(佛法)에 귀의함으로써 20여 년간의 치세(治世) 동안 자비희사(慈悲喜捨)를 가르친 이상적인 왕으로 변모한 것이다. 사서 편집자들이 아쇼카왕을 후세에 올 왕들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은 그가 처음부터 이상적인 왕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한 경험이 있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까닭이다. 즉 사서 편집자들은 악한 행위를 한 아쇼카왕이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다르마에 복종함으로써 이상적인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후세 왕들에게 들려줌으로써, 백성들을 착취할 가능성을 지닌 왕들도 아쇼카왕처럼 다르마에 복종하기를 촉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승가는 붓다를 전륜성왕으로 해석하고 아쇼카왕을 후세 왕들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권력을 지닌 왕이 도덕적 권위인 다르마에 복종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을 다르마에 복종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에게 불법의 수호자라는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가능했다. 실제로 역사의 무대 위에서 활약하는 왕들은 나라를 지배하고 또 정복활동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적 통치자로서 왕이 지켜나가야 할 의무는 라자다르마(Rajadharma)라고 한다. 그러나 왕은 통치자로서의 임무뿐 아니라 불법을 수호해야 하는 정법왕(Dharmaraja)이 되어야 할 이상도 함께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붓다의 가르침을 자신의 통치에 구현하는 이상적인 왕인 정법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보시(布施), 계(戒), 희사(喜捨), 정직(正直), 유화(柔和), 고행자(苦行者), 무념(無念), 자비(慈悲), 인욕(忍辱), 비방해(非妨害)의 10가지가 있다.11)
아쇼카왕을 이상적인 왕으로 내세운 것은 그를 국가 통치자로서의 차원을 넘어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이자, 붓다의 자비를 실천하는 왕, 즉 라자다르마(Rajadhama)로부터 다르마라자(Dharmaraja)로 전이된 대표적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도 절대적 도덕법으로서 다르마사탐(Dhammasatham)을 왕의 개별적 행동이나 실질적인 통치에 관한 법인 라자사탐(Rajasatham)을 보다 우위에 둔다.12) 라자사탐(Rajasatham)이 실제 왕의 역할을 하는 필요한 왕법이라면, 다르마사탐(Dhammasatham)은 정의의 왕으로서 왕이 준수해야 할 법이기 때문이다. 왕법의 질서인 라자다르마(Rajadharma)와 불법의 질서인 다르마라자(Dharmaraja)를 연합시키려는 시도는 초기불교 때부터 있어 왔다. 이는 승가가 처음부터 왕권 및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불교사 안에서 붓다를 각자(覺者)와 전륜성왕의 두 측면으로 보는 것이나, 세속왕이 지닌 '정치적 다르마'나 붓다에게서 발견되는 '성스런 실재로서의 다르마'라는 다르마의 양면적 해석은 불교가 초세간적 종교만이 아니라, 현세사회 안에 응답하는 해석체계로 거듭나고자 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국왕, 정법, 승가의 삼자 관계는 불교사 안에서 전승되어온 국가와 종교 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승가의 지고한 옹호자인 국왕의 원조가 있었기에 승가는 일상사에서 해방되어 초세간적 지계수행의 생활 형태를 존속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국왕은 승가를 지지하고 후원함으로써 정법유지에 공헌해왔고 승가는 국왕을 전륜성왕인 붓다 권위의 계승자로 봄으로써 왕의 권력에 성스러움을 부여해주고, 정법은 국왕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원리로 기능함으로써 정법, 국가, 승가의 삼각관계가 유지되어 온 것이다.13)이상에서 정법, 국가, 승가의 삼각관계에 대해 고찰해왔다. 그럼 전통불교에서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4. 전통불교에서의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
막스 베버(Max Weber)는 인도에서 불교가 공인종교로서 영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구도행을 수행하는 자들에게만 해탈이 가능한 것으로 한정시킨 점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14) 불교에서는 신이나 구세주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 개인의 구원은 각자의 깨달음에 달려 있다고 본다. 즉 이승이나 저승을 막론한 모든 삶에 대한 집착의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의 구원관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상한 세계와의 일체 인연과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보는 전통불교의 구원론은 승려 이외의 사람들 곧 재가자들은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막스 베버는 말한다.15) 그러나 생전의 붓다는 재가자들에게도 열반에 들 수 있음을 인정해 주었다. 「밀린다왕 문답록」을 보면 재가자도 직접 열반의 경지와 교유할 수 있다는 내용이 설파되어 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불교가 재가자들에게 제시하는 구원론은 출가자들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전통불교가 재가자들을 위해서 마련한 구원론적 지평은 ‘복전(福田)사상’에 근거하고 있다.17) 복전사상이란 공양자에게 복을 준다고 믿는 공양의 대상을 밭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복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고대인도의 자이나교에서는 ‘태어나면서 명지(明知)를 갖춘 바라문’을 복전(福田)이라고 한 용례가 있다. 이를 수용하여 처음에는 붓다를 복전이라고 하다가 점차 그 의미가 변해 승가를 가리키게 되었다.18) 즉 재가자의 입장에서 승가를 복전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복전이야말로 재가자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공덕쌓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붓다고사는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세간 위에 있는 승가는 세간에 비할 수 없는 복있는 곳”이라고 서술한다.19) 이와 같이 승가는 어떤 세간과 비할 수 없는 세간무상의 복이 생기는 곳이기에 거기에 공덕을 쌓음으로써 내세 복락을 얻고자 하는 장소로 정착해 갔다. 즉 복전사상의 신봉자들은 승가에 공양보시하는 것이 행복의 획득, 더 정확히 말해 윤회에서의 지위 향상에 유효한 수단이라 믿고 승가에 공덕쌓기를 행한 것이다. 즉 승가에 대한 보시행위는 윤회적 삶 안에 지위의 상대적 상승을 바라는 민중의 욕구인 복전사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재가자의 공덕사상은 윤회의 세계에서 인간의 행복은 공덕에 의해 좌우된다는 믿음과 함께 그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상의 장소인 복전이 승가임을 믿는데 있다. 이와 같이 재가자에게 승가가 복전이 되는 것은 그 곳이 초속성(超俗性)을 지닌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 내의 승가와 재가라는 내외질서, 즉 초세간적 영역으로서의 승가와 세간적 영역으로서의 재가라는 이원론적 구조는 복전사상이 발생할 수 있는 논리적 요청이라 할 수 있다.
공덕의 획득을 위해 승가에 보시를 하는 재가자들의 ‘공덕쌓기’ 행위는 생산성이 없는 승가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와 같이 복전(福田)사상은 물질적 원조가 필요한 승가의 요청과 개인적 행복을 획득하려는 재가신도들의 요청이 만나 민중불교 교리의 중심 기둥(主柱)이 된 것이다. 즉 재가자들에게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보증해 준 복전사상은 역사를 통해 민중의 종교행위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따라서 복전이 되는 승가는 민중불교의 기반적 존재가 되었으며 승가의 쇠퇴는 곧 민중들의 기반이 상실됨을 의미했다.20) 이렇게 볼 때 국왕과 승가의 관계는 승가의 존속을 필요로 하는 재가자들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Ⅲ. 개혁불교에서의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
1. 불교적 민족주의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약 450년간 유럽의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불교에도 내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21) 약소국이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화될 때, 피식민지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자각을 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게 된다. 제국주의가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도 유럽 기독교인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그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인들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스리랑카 내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랑카에서 생겨난 '불교적 민족주의'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민족주의는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전통불교에서는 승가와 재가자 간의 차이가 구별이 뚜렷했는데 그 중 하나는 재가자들이 교육수준이 낮아서 경전을 접할 기회가 적었으므로 그들의 구원관은 승려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가 들어오면서 스리랑카 불교에는 내외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말 영국이 들어와 서구교육을 실시하면서 종래 교육의 장이던 승가는 문화적 가치와 정보의 중심지로서의 독점력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승가의 중요성은 감소되어 갔지만 팔리어 경전이 영어로 번역되어 교육받은 재가자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곧 이어 싱할라어로 번역되어서 경전을 접할 기회가 점차 늘어났다. 이와 같이 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재가자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그로 인해 재가자들의 의식세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주된 부류는 19세기말 영국식민지 하에서 교육받는 자들로서 주로 도시중산층들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이 등장한 불교 형태가 바로 개혁불교(Protestant Buddhism)이다.22) 즉 교육받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개혁불교는 강한 반식민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에 민족주의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개혁불교가 일어나는데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이다. 아나가리카란 ‘집 없음(Homeless)’이라는 뜻으로 본래 출가자들에게만 적용된 것이나, 1881년 다르마팔라에 의해 승려뿐 아니라 현세적 금욕주의를 행하는 재가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용어가 되었다.23) 다르마팔라는 승려들처럼 계를 지키고 금욕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정치활동, 사회봉사, 포교활동에도 참여했다. 즉 그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세상 안에서 불교적 금욕주의를 실천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가 재가자들에게 제시한 200가지 윤리적 행동규범 중 많은 것은 서구식이었고 대개 스리랑카 엘리트를 위한 것이었다.24) 그래서 그의 세간적 금욕주의는 변화하는 정치, 사회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스리랑카 엘리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금욕주의는 대중들이 지키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개혁불교에서 재가자들의 신앙생활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2. 개혁불교 재가자들의 신앙
다르마팔라는 서구 프로테스탄트처럼 합리주의를 선호하고 정령신앙을 거부하고 순수한 교의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를 따라 초기개혁 불자들도 주술이나 정령신앙을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선호했다.25) 이는 그들이 마을공동체를 떠나 도시에서 살아온 배경과 연관성이 있다. 즉 마을을 떠나온 그들에게 마을 공동체에서 숭배해온 신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시 농촌마을 공동체에서는 농업과 관련된 신들을 섬기는 정령신앙을 중시했으나 마을 공동체를 떠난 도시 중산층들에게는 자기들의 생활과 무관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26) 대신 도시 엘리트들은 교리의 재해석을 중시했다. 그것은 서구교육이 보급되고 의식이 발달하면서 그들도경전을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가자들도 경전을 접하면서 그들의 의식세계에 변화가 생겼고, 이로 인해 교리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도 열반을 승려뿐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열려 있는 세계로 이해하게 되었고 현세에서도 열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타계(他界)주의에 대한 종전의 열반이해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졌음을 뜻한다. 즉 열반이 ‘저기 그리고 먼’ 얘기가 아니라 ‘여기 그리고 지금’의 얘기라는 것이다. 이로써 개혁불교에 와서 재가자들은 승가에 들어가지 않고도 니르바나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27)
재가자들은 승려들처럼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함을 추구하기보다 세상 속에서의 해탈을 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완전이탈이 아닌 애증에 대한 초연, 무관심, 냉정함, 평정함을 지니고자 했다. 이는 힌두교의 카르마요가와 유사한 것으로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으로 무집착을 통한 평정을 의미한다. 개혁불자들은 해탈을 얻기 위해 명상수행을 하기 시작했고, 명상수련을 위해 인도에 가는 불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불교명상은 자신이 의존하고자 하는 대상(신)이 있다는 환상을 없애고 무아(無我)를 깨달아감에 있다는 점에서 힌두교 명상의 절정인 신과 합일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과 달랐다. 개혁불자들 중 힌두교 명상 전통을 접한 이들은 정서적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했다. 그들은 특별한 신을 신앙하기를 원했고, 이를 통해 영적 충만함을 맛보고자 했다. 이러한 개혁불자 명상가들의 종교적 감정은 순수한 박티와 유사하다.28) 그러나 명상수행을 통한 해탈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많은 재가자들의 신앙형태가 되기는 어려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개혁불교는 소수의 도시 엘리트 불자들에게는 영향을 주었지만, 많은 재가자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제도적 개혁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이다. 그 대신 다르마팔라가 강조한 불교의 교리적 측면보다 그가 거부한 데바 신앙이 더 성행했다. 이와 같이 재가자들 사이에 데바 신앙이 성행한 것은 스리랑카의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도시의 인구증가로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이로 인한 불안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서를 달래줄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교육의 확산으로 여성들도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도시화로 인해 여성의 지위변화라는 사회현상이 일어나면서 여성들의 신들림 체험을 통한 여성사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또한 데바신앙을 부활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개혁불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개혁불교를 통해 나름대로 재가자들의 신앙의 변화가 일어났지만 도시엘리트층이 중심이 된 개혁의 바람이 대중들의 신앙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 개혁불교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바로 도시 불교이다.
Ⅳ. 도시 불교에서의 승가와 재가자 관계
1. 불교와 주술
앞서 우리는 재가자들의 신앙형태로 복전사상과 관련한 공덕행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행위는 재가자들이 지닌 내세에 대한 희망을 충족시켜주기는 했으나, 현세의 일상생활 중에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욕구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못했다. 위기에 직면한 사람이 합리적 수단에 의해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 자주 주술적 수단에 호소하여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미개인만이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보이는 현상이다. 말리놉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주술이 객관적 사태를 변화시킨다기보다 개인의 불안을 해소하고 회복을 돕는 것이라면, 현대인에게서도 그 기능이 상실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9) 승가는 재가자들의 현세적 욕구를 외면할 수 없기에 이를 충족시켜 주는 정령신앙을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령신앙의 수용이 결코 상좌불교 자체를 주술종교적인 측면으로 굴절시킬 수는 없었다.
본래 전통불교는 세속을 초월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술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상좌불교는 재가자들의 현세적 욕구인 양재(攘災), 초복(招福)적인 면을 충족시켜 주고자 주술적인 면을 수용한 것이다. 이로써 주술행위는 공덕행위와 함께 재가자들의 신앙형태가 되었다. 만일 상좌불교가 윤회적 생존에 관한 구제론에만 그 임무를 한정하고 일상적 불안해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민중의 지지는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30)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들은 사찰 내에 민중들의 정령신앙을 수용하여 민중들의 주술적 요구에 답하려는 기구를 갖고 있다. 그럼 스리랑카불교는 어떤 식으로 정령신앙을 수용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스리랑카에서의 정령신앙
(1) 신들의 교체
스리랑카는 서구의 식민지로 있을 당시 국민의 교육수준이 향상되긴 했지만, 경제성장 없이 인구와 교육열만 증가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큰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은 대개 중산층과 하층계급이었는데 경제불황으로 인해 점차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적 좌절감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종교를 찾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도시 불교는 빠른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불확실에 허덕이는 도시빈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근대화를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즉 전통불교와 개혁불교의 윤리관에 대한 대응책으로 수용한 정령신앙이 점차 도시빈민가에 자리를 굳혀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도시빈민층에 의해 변형된 정령신앙이 사찰 내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스리랑카 승가는 특별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즉 정령신앙이 도시 불교의 하나의 특징이 된 것이다. 그 구체적인 경우를 살펴보자.
마하밤사에 따르면 붓다는 스리랑카인들의 정령신앙을 지켜주었는데 그 책임을 신들의 왕인 사크라(Sakra)에게로, 사크라는 다시 비시누(Visnu)에게 그 책임을 줌으로써 스리랑카를 책임질 권위가 붓다에서 사크라를 거쳐 비시누신에게로 전이되었다고 한다.31) 비시누는 그의 다른 세 신(Natha, Saman, Vibhisana)과 함께 스리랑카를 사등분하여 지배했다. 그리고 그 밑에 열두 신을 두었는데 이들은 지방군주를 신격화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신들은 도덕적으로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졌다.32) 이와 같이 전통적인 스리랑카불교에서의 판테온은 붓다를 선두로 하여 스리랑카의 수호신인 네 신(Visnu, Natha, Saman, Vibhisana) 이 있고, 그들 밑에 더 작은 지방신인 열두 신이 있으며, 가장 하위에 유령, 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만신전은 사회의 권위구조가 불분명해진 새로운 도시생활에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만신전의 전통적 권위구조는 파괴되고 체계가 바뀌어 만신전 신들을 대신하여 카타라가마신(Kataragama)이 주요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어떻게 카타라가마신은 다른 신들을 밀어내고 주요신이 될 수 있었는가?
네 신 중 비쉬누(Visnu)신은 지나치게 도덕적이어서 대중들과 너무 거리가 먼 신이었고 나타(Natha)신은 칸디안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왕권이 1815년 몰락하자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힌두신화에 따르면 카타라가마신은 시바(Siva)에 의해 태어나 전쟁신이 되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전쟁신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현대생활에 필요한 새로운 기능을 갖게 되었다. 즉 카타라가마신은 새로운 도시엘리트의 출현 및 확산과 관련하여 생겨난 많은 어려운 문제들(사회적 지위열망, 사업에서의 성공, 자신의 富나 자식의 성공을 기원)을 해결해주는 신으로 부각된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여러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도시중산층이 카다라가마신을 찾아감으로써 그는 현대에 넓은 활동공간을 지닌 신이 되었다.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줄 역할신으로서 새로운 자리매김을 한 카타리마신은 다른 신을 대신하여 스리랑카 정령신앙의 주요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리처드 검브리치(Richard Gombrich)는 가난한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큰 슬럼가를 형성하고 있는 콜롬보의 사찰을 조사했다. 이 사찰들은 1920년 이후에 네 신을 모신 사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점차 네 신의 권위가 상실되고 카타라가마가 중요한 신으로 등장하게 되자 그를 네 신과 함께 모셨다. 이는 카타라가마신의 위상이 다른 네 신의 지위까지 격상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65년 이후 다시 새로운 신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으니 바로 후니얌신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작인(作因)으로 악령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후니얌신이 바로 그런 악귀였다.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후니얌의 의미는 악귀였으나 그 지위가 데바타에까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카타리가마신을 제치고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중들의 신앙에 변화가 온 것은 무슨 이유인가?
사당을 찾는 이들은 자신들의 바램(구직 승진, 사업성공 등)을 신에게 청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바램이 채워지지 않은 현실 앞에서 좌절감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카타라가마신을 두려워했으므로 그 신에게 자신들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은 원인에 대해 실패에 대한 탓을 돌리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았다. 즉 그들은 자신의 무가치함, 자신의 불리한 점성술,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업 때문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서 자신에게 탓을 돌렸다. 그러나 결국 자기 문제의 해결점을 찾지 못한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 욕구를 들어줄 더 강한 힘을 지닌 신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현세적 욕구를 들어줄 더 강한 힘을 지닌 신이 있다면, 그들은 그 신에게로 가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카타라가마 신도들이 후니얌신에게로 옮겨간 이유이다. 카타라가마신의 권위가 격하된 것은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더 이상 현세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전통적인 합리화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사람들은 굳이 흑주술의 이름을 지닌 후니얌신을 택했는가?
(2)흑주술로서의 후니얌신
스리랑카 내에 특히 인구가 급증하고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곳에 후니얌신 사당이 많이 생겨났다. 처음에 후니얌 신도는 도시빈민층들이 많았으나 점차 도시중간층(사업가, 관리인, 전문가)에까지 퍼져나갔다. 실제 조사통계에 따르면 후니얌신 사당을 찾아오는 이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그 목적은 축복 추구, 가족분쟁 해결, 직업 및 사업, 병치유, 적을 저주하기 위해서 등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흑주술인 후니얌 신앙이 현세축복신앙으로 바뀌었을까? 후니얌은 남인도의 주술이라는 의미인 ‘수니얌’에서 유래했다. 수니얌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 악령을 보내 주술을 건 흑주술을 말한다.33) 이와 같이 후니얌은 스리랑카 전통에서는 하나의 악귀로서 흑주술신이었으나 후니얌 사당을 찾는 이들의 기원인 현세행복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의 역할에 변화가 온 것이다. 따라서 후니얌신이 카타라가마신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럼 악귀로서의 후니얌이 어떻게 데바타로 지위가 향상되었는가? 후니얌은 12세기 초에는 도시인들의 신이 아니라 샤만의 개인적 수호신이었다.34) 샤만들은 자신의 주술이 실패하는 것이 경쟁자인 샤만이 흑주술을 걸었기 때문으로 보았는데 이때의 흑주술을 후니얌이 주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샤만이 후니얌을 자기 개인의 수호신으로 택했지만, 많은 도시인들도 그 신을 필요로 했다. 도시인들이 후니얌신을 필요로 한 데에는 자신들이 겪는 불행이 이웃이 건 흑주술 때문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한다. 즉 개인의 불행은 흑주술로부터 온다고 생각한 그들은 주술신인 후니얌신을 신봉함으로써 자신은 그 신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적에게는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후니얌이 악귀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에게 있어 악귀적인 면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제들은 달이 찰 때는 후니얌이 선신이지만, 달이 이울 때는 악귀로 나타난다고 해석한다.35)
그러나 악귀의 지위로는 수호신이 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후니얌신을 악귀에서 데바타로 그 지위를 상승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후니얌신의 지위가 신격화되면서 그에 걸맞은 신화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거기서 그는 인간과 신의 집단을 중재해주는 특별한 형태의 신으로 등장한다. 즉 그는 마을을 책임진 신으로서 인간의 선악을 보고할 권한을 부여받아 신들의 모임에 이를 제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 변화로 인해 그는 다른 신보다 인간과 더 가깝게 되었다.
이상에서 대중들의 정령신앙의 대상이 변한 것은 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스리랑카 내에 도시인구의 증가는 점차 마을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친족 간에 상호유대 관계의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으며, 이는 나라 전반에 걸쳐 사회 비통합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이와 함께 빈곤도 증가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어떤 설명을 필요로 했고 여기에 흑주술은 가난한 이들이 겪는 불행에 대한 인식론적 설명을 해준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시 불교에서 흑주술신인 후니얌신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신으로 지위가 향상된 측면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판테온신들의 지위상 변화가 생기는 것은 사회적 변화에서 오는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러나 상좌불교 내 정령신앙이 점점 더 확산된 것은 전통불교 내에 대중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줄 요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정령신앙을 사찰 내에 수용함으로써 대중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었고, 이것이 오늘날 스리랑카불교에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3) 백주술로서의 보디푸자(Bodhi Pūja)
후니얌신이 흑주술이라면 스리랑카에서 백주술의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1976년 아리야담마(Ariyadhamma)라는 젊은 승려에 의해 부활된 보디푸자(Bodhi Pūja)이다.36) 본래 전통적으로 행해져온 보디푸자 의례는 제물을 올리는 사람만 참여해서 팔리어 경구를 암송하는 것으로 아주 짧은 시간이 소요되는 의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리야담마에 의해 새롭게 변형된 보디푸자는 신도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암송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례서가 팔리어에서 싱할라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그 시구에 감정적인 표현을 많이 넣고 특히 붓다를 어머니로 언급하는 등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들 때문에 많은 신도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보디푸자가 대중화되면서 그 형태와 의미에 변형이 일어났다. 전통에 대한 혁신은 처음에는 개인에게서 일어났지만 사회 안에서 행해지면서 처음 혁신자가 의도한 바와는 무관하게 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보디푸자 의례도 아리야 담마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와 정령신앙의 혼합형태로 변형되어 갔다. 즉 보디푸자는 대중화와 더불어 군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 개인들에 의해 사적으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행해지기도 한다. 이 의례는 승려들에 의해 경전이 독송되는 피리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중심은 경전보다 보리수 자체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보리수 숭배’로까지 나아갔다. 결국 보디푸자 의례는 보리수를 주술적으로 사용하면서 정령신앙으로 변해간 것이다. 불행이 닥쳤을 때 보리수에 우유를 부어 공덕을 쌓으면 그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한 보디푸자는 그것이 지닌 정령신앙적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무엇보다도 보디푸자가 더 대중화된 것은 피리트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던 종교적인 감정의 표현과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붓다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본래 금욕적인 불교전통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전통불교 내에 금물이던 것이 대중들의 호응 속에서 의례 안에 정착되면서 불교의례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 현상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스리랑카 정령신앙의 주요대상인 네 신들에서 카타라가마신을 거쳐 후니얌신으로 교체된 현상이나, 불교의례상 재가자들의 정서적인 면을 수용한 보디푸자의 변형은 불교가 재가자들의 신앙형태를 수용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 불교는 상좌불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변형된 정령신앙을 수용한 불교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정령신앙은 현세적 필요를 위해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한 기복신앙이라고 본다. 그래서 불교는 교리상 이를 거부해 왔다. 그것은 불교가 기복신앙의 중심인 신이나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령신앙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보았듯이 스리랑카에서는 사회경제적 역사적 정치적 변화에 따른 대중들의 종교적 정서를 위해 정령신앙을 사찰에 수용하였다. 이러한 스리랑카 불교내의 변화에 대해 오베예세케레(Obeyeseker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싱할라불교는 상좌불교와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상좌불교에서 나온 신앙과 비상좌불교적 신앙체계가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인 전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37) 또한 리처드 검브리치(Richard Gombrich)는 스리랑카 불교 내에 일어난 변화는 빠르게 일어나는 사회 경제 정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38)
이상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사찰이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대중들의 종교성을 사찰 내에 대폭 수용하는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 현상을 고찰했다. 대중들의 정서를 읽고 그들의 현실적 필요에 응답한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 과정을 사찰내 민중신앙을 수용해온 한국불교의 상황과 비교해 봄은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되리라 본다.
Ⅴ. 결론
지금까지 스리랑카의 전통불교, 개혁불교, 도시 불교라는 역사적 변천과정을 통해 승가와 재가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통불교에서는 양자 간의 구별이 뚜렷한 반면, 개혁불교에서는 재가자의 교육수준 향상으로 인한 의식 변화로 양자 간의 간격이 좁혀지는 듯 했으나 제도적인 개혁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개혁불교가 쇠퇴한 것은 하층민들이 지닌 종교의 정서적인 면을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재가자인 다르마팔라가 제시한 세속적 금욕주의를 통해 승가와 재가자의 간격을 부수어보려는 개혁불교의 이상은 실제적으로 그들이 지닌 정신적 능력과 정서적 차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불교가 대중들의 종교적 정서를 읽고 이에 응답하는데 실패했다면, 도시 불교는 정령신앙을 사찰내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재가자들의 정서적인 면을 수용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찰내 정령신앙을 수용했지만, 정령신앙은 스리랑카불교 내에서 여전히 주변적인 위치에 자리한다. 그들 신앙의 중심에는 역시 붓다가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경전과 승려가 중심인 출세간적인 면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 역시 출가자와 재가자의 이중구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불교의 구원론이 지닌 교의적 특성 안에서 볼 때, 승려와 재가자 간의 이원론적 구조는 극복되기 힘들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불교가 민족불교로서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통성을 유지해 온 승가 내에 변형된 재가자들의 신앙형태를 관대하게 수용하려는 자세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이는 재가자들의 신앙체계를 사찰 내에 흡수함으로써 승가와 재가자 간의 괴리감을 좁히고자 한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이며 세속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화현상에 대한 평가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가능하겠지만 이를 한국불교의 사찰내 민중신앙 수용과 비교함은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작업은 한국불교의 사회화 과정을 성찰하고 촉구하는 밑거름이 되리라 본다. 산중불교에서 생활불교, 대중불교로 거듭나 신도들과 소통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기 위해서 한국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한국불교는 현대 사회 정치 경제의 변화에 따른 대중들의 종교성에 얼마나 귀기울이며 응답하고 있는지, 산중불교, 수행자 위주의 불교로서 이로 인해 생겨난 일반대중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점들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문헌
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