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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의 회심체험과 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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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의 회심체험과 그의 정체성
최 현 민
1. 연구목적
본 논문은 오늘날 불교 조계종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불교계에서 독창적인 사상을 펼친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의 회심체험 및 이와 관련하여 그의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연구범위
지눌이 살던 시대적 배경 및 상황 그리고 그의 저서들(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 진심직설, 원돈성불론) 등을 통해 그의 회심체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이러한 체험이 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3. 다루게 될 질문들
1) 지눌의 회심체험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2) 그 결과 그의 회심체험이 그의 사상에 어떤 변화 및 성숙을 가져왔으며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3) 지눌의 회심체험이 그의 정체성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4) 그의 사상이 한국불교계에 미친 영향을 어떠한가?
서론
종교적 회심을 한다는 것은 각자의 인격적인 태도와 가치들, 감정들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회심을 통해 새로운 믿음과 가치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정체성의 체험도 회심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전체성과 동일성의 느낌을 통합해 준다. 종교적 회심에 있어 위기를 해결함으로써 통합성이 생기듯이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정체성 경험이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가장 강하게 드러나듯이 종교적 회심도 인생에서 결정을 해야 할 그 기점에서 일어난다.
회심체험과 정체성 체험은 둘 다 실제적인 갈등과 긴장에 의해 형성되며 따라서 양자는 모두 중요한 위기감을 갖게 한다.
종교적 회심은 일종의 정체성의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187)
종교적 회심경험 중 간과할 수 없는 주요 역할은 그 자체가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회심은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제공한다. 종교적 회심이 지닌 첫번째 기능은 삶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준다는데 있다. 즉 회심은 갈등을 해소시켜 주며 연속성과 통합성을 제공해 주는 조절자로서 작용한다.
정체성과 같이 종교적 회심은 헌신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차 있다. 정체성 위기와 회심의 이런 면은 의미있는 세계관을 세우도록 이끄는 기초가 된다.
1. 회심의 의미
종교적 회심이란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핵심적 변화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심은 종교체험에 대한 연구의 중심주제로 부각되어 왔다. 종교체험을 종교라는 한정된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으로 제한해선 안된다. 종교 경험은 심미적 과학적 도덕적 정치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모든 경험이 잠재적으로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회심에 관한 연구도 회심이라는 사건이 지닌 여러 다각적인 측면이 간과된 채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회심은 그 사람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및 그 사람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죵교적 회심은 한 사람이 자아를 자각하게 되는 위기의 상태로서 강한 감정을 수반하기도 하고 점진적으로 혹은 급작스럽게 오기도 한다.
회심은 삶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 및 통일성을 제공해주는 사건이며 존재의 통일된 양상을 말한다.(9쪽)
발리 길레스미는 「종교적 회심의 역동성」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회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회심은 변혁을 위한 상징체계이다. 그것은 성서에서 사용하는 신비적인 것이나 감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뱡향을 제시해주고 관심사의 전향을 의미한다.”(28)
또한 회심은 옛 사고방식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감 즉 변화를 의미한다.
회심을 통해 일어나는 변화는 여러 측면이 있다. 자아 통합적 측면, 투신에 대한 강화, 긍정적인 결과로서의 기능,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측면, 정체성의 측면이 있다. 즉 종교적 회심시기는 자각이 일어나는 시기(점진적으로 일어나기도 하며, 급작스러이 일어나기도 함)이며 실질적으로 삶의 스타일이 변화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심체험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킬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 회심은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종교적 회심의 자기 통합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139)
윌리암 제임스는 회심의 상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심은 단순히 성스러움의 한 부분이 아니라 참된 삶의 전환으로써 성스러움이 그의 삶의 가치관과 실제의 삶 안에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36쪽 58주) 그래서 회심을 통해 사람들은 내면의 깊은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새 사람,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헨리 넬슨 비만은 종교적 회심을 통합(unification)이라고 규정했고(39쪽) 골든 앨포트는 통합(integration) 혹
은 재통합(reintegration)이라 한다. 여기서 회심은 단지 감상적인 회심이 아닌 지적인 면이 뒷받침된 회심만이 자기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지눌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내적으로 선종과 교종 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심했고 이 두 양자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심정적으로 확신하면서 이를 경전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그의 확신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그의 회심과정이 지적인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인 회심은 곧 이어 지눌에게 감성적인 회심을 가져왔으니 그는 이를 읽고 기뿜을 억제하지 못해 경전을 이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1.보조국사의 시대적 배경 및 생애
지눌이 살았던 시기는 전 고려사를 통해서 극도의 변란과 불안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고려 의종12년(1158)부터 희종6년(1210년)까지였다. 예종까지의 융성기를 지나 고려를 변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의종말 명종초에 일아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한 무신의 난, 그 후 계속되는 무신들간의 권력다툼으로 서로를 모략하고 샬륙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지눌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상호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세습정치를 하기는 그가 38세 때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불교는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밖으로는 계속되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불교가 함께 휩쓸려 종교적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안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 또한 심하였다. 고려가 통일국가를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불교는 태조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귀족사회가 점점 난숙해감에 귀족과 사원과의 유대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불교는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 문관들이 비호와 지원아래 발전해 왔으므로 의종24년(1170년) 정중부의 무신란이 일어났을때 이 란을 평정하는데 승려들도 직접 무력적인 행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명종 4년 왕실파의 입장에 서 있던 승려들이 정중부 토벌운동에 앞장서 백여명의 승려가 희생당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극심한 정쟁의 틈을 이용하여 1196년에는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므로 최씨 무인정권의 막을 열었다. 결국 武人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武人정치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당시 敎宗에 소속된 개경중심의 각 사원은 구세력의 대변자로서 정치에 개입하여 계속 투쟁했다.
이와 같이 승려들이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휘날리는 가운데 불교는 왕실과의 결탁의 결과 정치적으로 왕실옹호의 정권쟁탈전에 개입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부의 축적으로 극도로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갔다. 불교의식만 행하고 있는 궁정의 모습, 이권만을 노리는 도시화된 불교, 민간에는 攘災招福의 기복적인 불교, 미신화되고 부패된 모습이 당시 불교의 양상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와중에 휩쓸리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되어 정법과 멀어진 것이 지눌 당시 고려불교가 안고 있는 외적인 문제였다면 불교 내적으로도 또한 선과교가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知人心, 見性成佛의 종지를 가진 선이 신라 말에 전래되어 고려 초까지 9산선문을 형성하면서 발전하게되자 재래의 敎불교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禪이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불교와 마찰을 일으킴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눌보다 100년 앞서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의 화해의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 갈등을 극복하고 정법을 구현하는 일은 당시 고려불교가 요청하는 시대적인 과업이었다. 지눌은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당시 불교의 병폐를 막고 정법을 펴기 위해 흔연히 일어나 불교를 화쟁하는 지도이념으로 禪敎一元, 頓悟漸修, 淨慧雙手를 주장하게 된다.
보조국사 지눌(158-1210)은 황해도 서황군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鄭씨로 국학의 學正인 光遇의 아들이다. 어려서 병이 많아 부모는 8세때 출가시켰는데 그는 일정한 스승없이 뛰어난 성품으로 도를 좇아 부지런히 공부하여 25세인 1182년에 僧科에 합격했다. 당시 승선은 승려의 가거제도로 그의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선에 합격한 지눌은 생의 일대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의 호는 牧牛子인데 이는 그의 수행관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修心訣」에 보면 “깨달은 후에 妄念이 일어나게 되면 이를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 無爲까지 이르도록 연구하는 것이 천하의 善知識들이 깨달은 후의 牧牛行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돈오 후의 수행을 중요시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25세때인 1182년 승과에 합격하고 난 뒤 開京 普濟寺에서 談禪法會를 끝내면서 뜻을 같이하는 도반들과 定慧寺(후에 修禪寺로 改名)를 결성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여명의 동지에게 말하기를 “이 모임이 파하거든 우리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結社하고 淨慧를 均修하여 예불하고 경읽기와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運力하는데까지 각각 제가 맡은 일을 다하여 인연따라 心性을 수양하고 한평생을 구속없이 지내어 達士와 眞人의 높은 수행을 따르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고 약속하였다.
그는 명리를 위한 길이 불교본연의 길이 아님을 단정하고 참된 수도자가 되기 위해 淨慧를 雙手하기로 약속하고 당시 서울인 개경을 떠나 남하하여 정진에 몰두하기 위해 수도의 길을 떠났다.
3. 지눌의 회심
지눌을 昌平(현 담양군 창평면) 淸源寺에 머물면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육조단경을 읽고 일대 回心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六根이 보고 들고 꺠달아 앎이 있다해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이며 참된 성품이 自在한 것이다” 이 대목을 접한 그는 일어나 佛殿을 돌면서 이 귀절을 외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1차 心機一轉이다. 이때부터 지눌의 은둔은 시작되어 1190년(명종 20년)까지 8년간 계속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禪 중심으로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하여 일체의 경전은 선과 무관하다고 보아 교학을 멀리하고 敎와 대립 반목했다. 지눌은 과연 敎와 禪이 다른 것일까 하는 커다란 의심(大疑)을 품고 청원사에서 은둔과 수도를 3년하고 다시 1185년 보문사로 발길을 돌려 5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이 곳에서 자신의 大疑를 풀기 위해서 대장경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선승으로써 교학의 총서인 대장경을 열람한 것은 특이하다. 당시 선종과 교종은 서로 대립되어 교종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는 것(敎外別傳) 즉 선을 중시하여 서로 적대시했다.
지눌은 교와 선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그 원리를 추궁했던 것이다. 그는 화엄경 如來出現品에 나오는 귀절에 대한 李通玄의 해설인 화엄론을 읽다가 “한 티끌 속에 우주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즉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 마음에 갖추어져 있지마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귀절을 읽고 그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본래 “한 티끌 속에 대천세계가 들어있다”는 화엄경의 요체를 말한 것으로서 지눌의 심중에 완전히 계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 말을 통해 禪敎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존이 입으로 전한 것이 敎요, 도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禪이라고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연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데에 편안히 안주하여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이는 바로 그의 내면 안에서 知的인 회심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이 품었던 의심은 이 대목을 접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성큼 나아가게 되었고 그의 사상에 확고한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행각을 멈추지 않고 1190년 公山 居祖寺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야말로 지눌에게 있어서 수도생활의 획을 긋는 전환점이 시작되는 시기다. 이때 그는 몇몇 승려와 定慧寺를 결성하고 結社의 무리들이 지켜야 할 취지가 담긴 <定慧結社文>을 짓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의 수행과 탐구를 통한 ㅊ험과 학신을 바탕으로 명종 20년(33세)에는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 ‘淨慧結社’를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의 불교를 일신하려는 큰 혁신운동이었다.그의 깨침을 향한 피나는 정진을 드디어 41세 때 완성되었다.
지눌은 화엄경을 보고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法喜를 얻었고 李通玄의 화엄론에 의거하여 원돈관문에 들었을지라도 情見을 버리지 못해 가슴 한복판이 무엇인가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내가 普門寺에서부터 이미 십여년이 되도록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헛되이 때를 보낸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오직 정견을 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않아야 하나니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 일임을 알 것이다.” (비명 선교관논문 110)에서 마음에 크게 계합하고서 술회하기를 ”나는 거기서 그윽히 깨치게 되어 저절로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안하고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깨침을 기초로 한 중생을 위한 자비행이다. 그는 신종 3년(1200년)에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 남은 생을 그곳에서 교화하는데 진력하였다. 거조사에 있던 정혜결사도 그곳에 옮겨 修禪寺로 개칭, 한국불교 유신의 노력을 계속하였다. 수선사의 선풍은 定과 慧를 고루 닦으며 선과 교를 함께 하는 독특한 것이었다.이러한 선풍은 오늘날 한국불교에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3) 지눌의 정체성
지금까지는 지눌의 3번에 걸친 히심의 자각체험에 대해 삻펴보았다.「六祖壇經」 이통현의 「華嚴論」, 「大慧語錄」을 통한 그의 자각은 그의 전반적인 사상 및 저술, 그리고 그의 삶 전체에 깊으 ㄴ영향을 미쳤다. 이는 곧 지눌의 정체성이 그의 자각적 회심체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 구체적으로 회심체험이 그의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눌은 먼저 정치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구현하는 것과 선교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자신의 覺의 과제로 삼았고 평생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했다.
지눌은 먼저 불자는 누구나 修心에 투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수심불교로 돌아갈 때 불교안팎의 문제인 정법이 구현되고 禪敎 간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닦는 일을 게을리할 때 불교는 정버보가 멀어지며 쓸데없는 시비에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수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깨침(悟)과 닦음(修)의 성격과 체계를 밝히는 일에 진력했다. 이러한 悟와 修의 관계를 지눌은 3관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惺寂等持門, 圓頓信解門, 徑截門이다.
ㄱ) 惺寂等持門
깨침과 닦음에 대해 지눌이 제시하고 있는 첫 관문이 성적등지문이다. 지눌에 의하면 올바른 수심의 길은 먼저 마음의성품을 분명히 끼치고 그 깨침을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 가는 先悟後修라는 것이다. 그는 돈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제 본성을 보면 번죄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 한다.
돈오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인간의 진면목에 눈뜸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육조단경을 통한 그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돈오 후 점수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깨치기 전 오랫동안 익혀 온 나쁜 習氣는 즉시 제거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胎를 길러 오랫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지눌은 悟後漸修의 門을 선양하는 이유를 밝혀
“혹 신심을 가지고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이치로 향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의 현재 행실을 보면 망녕된 생각과 나쁜 습관을 제거하여 항복받지 못하고 사방으로 방탕되이 돌아다니면서 신도들의 보시를 헛되이 소비한다. 요즘에 이런 무리들은 삼대와 같고 좁쌀과 같나니 연수선사의 이른바 ‘말과 행실이 서로 어긋나면 그것으로써 허망과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즉 범부가 돈오하였다고 해서 곧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개념은 迷惑을 깨닫는 바는 그 상태만을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눌은 돈오 즉 見性이요 成佛로 연결시키지 않고 이를 미혹의 깨달음에만 한정지었을까?
지눌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敎學者들은 權敎의 말에 걸리어 진실과 허망을 따로 따로 집착함으로써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며 혹은 입으로 일과 일의 서로 걸림이 없음을 말하면서 觀行을 닦지 않으며 제마음을 깨달아 들어가는 비밀한 법이 있음을 믿지 않고 참선하는 이들의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 곧 말을 떠난 돈교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면서 그 가운데 뚜렷이 깨달은 본 마음의 불변, 隋緣과 性, 相, 體, 用과 安樂富貴가 모든 부처와 같다는 뜻을 알지 못하니 어찌 그들을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또 나는 보건데 선학자들은 계승을 밟지 않고 바로 부처의 地位에 오르는 뛰어난 근기만 알고 ”깨달은 뒤에 처음으로 十信의 地位에 들어간다“는 이별행록의 극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마음의 렬린 곳이 조금 있으면 그 해행의 깊고 옅음과 더러는 習氣의 릴고 사라지는 것은 알지 못하고 법의 교만이 마음에 가득하여 하는 말마다 분수에 넘쳐 도에 지나친다. 그러므로 화엄론에도 ”큰 마음을 가진 범부로, 信因 가운데서 모든 부처의 과덕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맞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만일 이 뜻을 안다면 스스로 비굴하지도 않고 스스로 뽐내지도 않으며 비로소 뜻을 얻은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눌이 그 당시의 禪學者들이 착실히 수행하지 않고 禪學者라는 이름만 내세우고 스스로 높은 경지의 근기가 있다고 過信한 나머지 교만함을 드러내어 참된 공부를 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敎學者들은 그들이 敎에 능통하다고 자만하여 진실된 자기마음을 깨치려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자기의 교학만 고집하려는 경향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눌은 자만과교만, 비굴과 퇴굴의 선과 교의 병폐를 지적하고자 성적등지문을 세운 것이다.
성적등지문은 인간의 진면목을 돈오한 다음 그에 입각해서 정혜(惺寂)를 점수(等持)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한 인간의 진면목은 공적한 마음으로, 그는 본래 모든 인간이 공적한 마음을 갖추고 있어 제불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에 돈오한 후 정혜를 균등이 가질 것을 주장했다.
ㄴ) 圓頓信解門
원돈신해문은 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것으로 그의 정혜쌍수론을 말한다. 여기서 定이란 마음이 空寂한 본체를 가리키며, 慧란 마음의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분리할 수 없듯이 정과혜도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심의 실제에 있어서 정에만 치우치면 昏沈에 떨어지기 쉽고 혜에만 치우치면 산란해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는 것이다.
원돈신해문은 화엄사상을 선에 수용한 것으로 선적등지문에서는 망념이 본래 空寂한 것으로 제시되지만 이곳에서는 根本無明이 諸佛의 不動明智라고 한다. 보살로의 수행 중에서 최초의 심신의 初位에서 自心의 분별성이 不動智의 부처라는 사상은 이통현장자의 화엄론이서 찾은 것이다. 그런데 범부가 十信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제마음이 부동지의 부처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결국 지눌의 운돈신해문은 화엄을 선에 수용하여 禪敎대립을 지양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눌이 화엄경을 선택한 이유는 화엄경은 교학의 최고봉으로 화엄의 圓頓門과 禪門이 일치함으로써 禪敎의 일치를 보이고자 함이다.
그 다음은 徑截門으로 이는 知解의 장해를 막고자 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話頭를 참고하여 증득해 들어가야 한다. <지눌 논문89쪽........
지눌은 禪門이 원돈문임을 信解케 하여 수행문에 나아가도록 원돈신해문을 개입한 것이다. 그가 원돈신히문을 개입함에 있어 그 사상적 근거로 삼았던 것은 이장자의 화엄론이다. 즉 돈오한 후 十信, 十位, 十地의 수행을 거쳐서 佛位에 오른다는 것이 李長者의 해석인 것이다.
禪門의 見性成佛이 화엄(敎門)의 사사무애관을 증득함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즉 화엄교문이 원돈문임과 마찬가지로 禪門도 또한 원돈문임을 설한 것이다. 그럼 어째서 교문외에 다시 禪門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화엄교문이 비록 원묘하기는 하나 아직 解分이 未忘한 고로 禪門 수행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徑截門>
이로서 지눌은 수증에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으며 이로서 자기완성과 아울러 이타방편의 새로운 지도원리로서 간화경절문을 세워 그의 득특한 禪敎觀인 禪敎一元論이 확립되었다. 지눌은 대혜의 간화선에 깊이 힘을 입어 한국불교의 한 전통인 활구를 참구하는 간화경절문을 기립하여 회교...(선교관 30쪽)
지눌이 「간화결의론」을 지어 간화선을 크게 선양한 것은 大慧語錄을 열람하던 중 證悟한 경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선사가 禪門의 離言絶廬를 강조하는 쥐지는 무엇일까? 이는 불교의 수행 및 證入에 방해가 되는 知解病을 타파하기 위함일 것이다.이러한 知解病을 일소하고 돈증법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 국사는 대혜선사의 看話禪을 대중에게 제시한다.
당시의 선교갈등을 바라보는 지눌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慧諶의 看話決疑論 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아 近古己來로 매우 佛法이 쇠폐하여 혹은 禪을 숭상하여 敎를 배척하고 혹은 교를 숭상하여 선을 비방하면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의 그물이요 선은 교의 그물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선교의 양가가 길이 원수처럼 보게 되고 法義의 두 학문이 도리어 모순의 宗이 되어 일실의 도를 밞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선사(지눌)께서는 그것을 가엾이 여겨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지어...”(혜심의 ㄱ산화결의론발)
그는 말하기를 “부처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은 敎요, 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禪이다. 부처님과 祖師의 마음과 입은 필연 어긋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곳에 편안하여 망녕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입으로 전한 것이기에 禪敎는 둘이 아님을 역설한 지눌의 禪敎一元사상은 선과 교가 佛의 口說과 心傳이라는 관점에서 일치되지만 양자가 모두 自性佛을 찾는다는데 지눌은 촛점을 맞추었다. 즉 공부에 들어가는 문을 敎도 있고, 禪도 있지만 이것은 모두 自性이 眞佛임을 깨닫게 함이요 自性이 眞法임을 확인하는 길이다.(화사상 239 3)
즉 선과 교는 깨달음의 길의 고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둘이 부처가 되는 하나의 길이라는 것이다 .지눌은 당시의 禪敎二元에 의해 한쪽으로 치우침을 질책하고 禪敎一元을 통해 부처의 법이 결코 둘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2.淨慧雙手
禪敎一元을 주장한 지눌은 구체적으로 禪敎의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정혜쌍수로 설명하고 있다.
“ 한가지 門에만 치우쳐 닦으면 그는 차차 가까이는 가겠지만 만일 두가지를 고요히 운영하면 그때에는 비로소 바른 문을 얻어 두 가지가 완전한 부처가 될 것이니 이 두 가지가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禪定은 내 마음의 본체요 지혜는 내 마음의 작용이다. 禪定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에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그 두 가지가 다 막히면 그 두 가지는 모두 없어지고 그 두 가지가 다 비치면 그 두 가지는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본체와 작용은 서로 이루고 막히고 비침은 걸림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선정과 지혜의 두가지 門은 수행의 조건이며 부처와 조사의 큰 뜻이며...”(절요 43쪽)
라고 함으로써 禪定과 지혜는 본체와 작용의 관계를 가진 하나임을 주장한다.
3.돈오점수
미혹에서 깨닫는 것이 곧 頓悟요 범부가 변해 성인이 된다는 것은 漸修이다(절요 29쪽) 라고 말함을 미혹에서 깨닫는 것이 돈오요 성인 범부가 변하여 되는 것이다. 범부는 미혹에 있는 자이지만 돈오하여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선 곧 성인이 디는 것으 ㄴ아니다.....계속(화사상 247)
<지눌의 정체성>
지눌의 시대적 사명은 결사운동을 통한 부패된 불교의 정화작업이다. 그러면 정화작업을 위한 이론은 무었일까 지눌은 정혜를 닦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이 부처의 근본임을 일깨웠다. 즉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이기 때문에 백천의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법문이 모두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자기 마음이 깨달음과 미혹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논리 아래 정혜쌍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수행은 정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이 없고 혜가 없으면 이것은 狂이요 愚이라고 했다.
선정은 마음의 본체이고 지혜는 내 마음의 작용이다. 따라서 선정이 바로 지혜이므로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고 지혜가 바로 선정이기에 작용이 본체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즉 선정과 재혜는 표리관계를 이룬느 본체와 작용으로서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선정을 떠난 지혜는 영속키 어려운 것이고 지혜를 떠난 선정은 맹목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지눌의 정혜쌍수는 결사운동의 이론적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정혜쌍수는 국사의 사상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평생에 일관된 수행관이라 할 수 있다. 국사 당시의 불교계는 내적 외적으로 대립상태에 놓여 있었으니 많은 수행인들이 올바른 수행관으로 확립하지 못한 채 禪敎는 대립상태에 놓여 있었고 외적으로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붊교의 근본목적인 수도성불의 이념을 망각하고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승려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사는 이러한 불교계의 모든 부조리는 올바른 수행관의 결여에서 기인함을 간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혜쌍수의 수행문을 복흥하고 선교의 모든 수행인에게 통일된 수행문을 제시했던 것이다. 또한 정혜결사를 조직하여 정혜쌍수를 몸소 실행함으로써 불교계에 수행하는 기풍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지눌 논문112)-----1996년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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