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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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_선불교간의_대화의_난제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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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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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선불교 간의 대화의 난제(難題)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와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의 사상을 중심으로-

                                                                    최 현 민
                                                       

목차

Ⅰ. 들어가면서
Ⅱ.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의 선사상(禪思想)
1. 절대이율배반(絶對二律背反)
2. 히사마쯔의 깨달음의 세계
3. 히사마쯔가 본 그리스도교
Ⅲ.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견해
1.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의 임마누엘 신학
2.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견해
1) 히사마쯔에 대한 긍정적 평가
2) 히사마쯔에 대한 비판
Ⅳ. 가역성과 불가역성에 대한 제반 평가
1.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지닌 한계
2. 타키자와 신학에 대한 평가
3. 종교간 대화의 방법론적 성찰
Ⅴ. 나오면서

                               
                                  국문초록

본고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교또학파 사상가 중 하나인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유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은 그리스도교가 신을 자기 외의 대상적인 존재로 봄으로써 이원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과 예수를 절대 유일한 계시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불교학자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쪽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를 임마누엘신학을 펼친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의 견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타키자와는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해 일면 긍정적 평가를 내리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사상 안에 숨겨진 한계도 지적한다. 양자 간의 견해 차이에서 드러나는 것을 필자는 가역성과 불가역성의 문제라고 본다. 즉 선불교는 궁극적 실재 자체와 그 실재를 자각하는 주체인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으로 보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바로 궁극적 실재 자체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궁극적 실재와 인간 간의 관계를 불가역성으로 보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자각의 주체인 인간 쪽에 강조점을 둔 선불교 입장과 인간의 존재 근거인 궁극적 실재 자체에 중점을 둔 그리스도교 입장 간에 강조점의 차이는 선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간 대화에서 끝까지 남게 되는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진 양종교간의 대화를 고찰해볼 때 쌍방의 공통점만을 추구해온 점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칫 종교간 대화가 양종교에 부재한 제삼의 보편적 실재를 만들 우려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 양종교간 대화를 통해 서로 간의 공통점 추구보다 서로가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웃종교의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함을 통해 분명 우리가 만나는 접점이 있음도 발견해 나간다면 각자의 신앙 안에서 더욱 풍요로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같이 종교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신앙의 표현들을 배움으로서, 다른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다문화시대, 다종교사회를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절실히 요청되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백범선생의 다음 말은 이런 사유의 다양성이 지닌 풍요로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산에 한가지 나무만 나지 않고 들판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이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 들판의 풍성한 경치를 이룬다.”

주제어 :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의 선사상,  무상(無相)의 자기(自己),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의 임마누엘신학, 가역성(可逆性)과 불가역성(不可逆性).

                            Ⅰ. 들어가면서

다종교 문화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웃종교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웃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종교문화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쌍벽을 이루는 대종교이다. 불교는 한국의 종교문화의 기틀이 되어왔고 한국종교문화형성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교적 시각을 배움은 필수적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양종교 간의 대화는 한국종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양종교간 대화가 깊이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본고는 양 종교가 대화를 함에 있어 가장 어려움으로 부각되는 점이 무엇인지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양종교 간의 대화에서 가장 난제는 인간과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이 실현된 경지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라고 본다. 즉 깨달음(혹은 구원)의 경지에서 인간과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양종교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인(神人)관계를 불가역적으로 보는데 반해, 선불교의 중생과 부처 곧 생불(生佛)관계는 가역적으로 본다. 이것이 이른바 가역성(可逆性)과 불가역성(不可逆性)의 문제이다. 본고는 선불교학자인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 1889-1980)와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 1909- )의 대화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히사마쯔 신이찌(久松眞一)의 선사상(禪思想)

1. 절대이율배반(絶對二律背反)

히사마쯔는 어릴 때 인간의 죄악성과 아미타불의 무조건적 자비에 대한 신앙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신앙을 철저히 신봉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근대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어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특히 선(禪)의 깨달음에 토대를 두고 서양철학과 맞부딪치면서 독특한 철학사상을 펼친 니시다 기따로(西田幾多朗, 1870-1945)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히사마쯔는 대상지적(對象知的) 사변이 아니라 궁극적인 앎과 삶이 불이(不二)임을 보여주는 주체지적(主體知的)인 니시다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니시다의 사상으로는 자신의 실존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함을 자각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히사마쯔가 지닌 실존적 문제란 무엇인가?

히사마쯔는 인간은 생사(生死)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생성전화(生成轉化)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실존적 자각을 한다. 히사마쯔에게 있어 끝없이 반복되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인간 실존에 드리워진 이원성(二元性)의 문제야말로 인간의 실존적 한계이며 딜레마의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위기에 봉착하게 만드는 인간의 절대모순인 ‘절대이율배반(絶對二律背反)’으로 본다.

생사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어 인간은 늘 생사의 반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인간존재의 근저에 드리운 생사의 이원성(二元性)이 존재적 측면에서의 절대이율배반이다. 그러나 히사마쯔는 실존적 딜레마가 존재론적 측면 뿐 아니라 가치적 측면에서도 발생한다고 본다. 그는 구체적으로 가치적 측면에서의 절대이율배반의 예로서 ‘죄 그 자체’를 들고 있다. 인간의 개별적 죄는 극복할 수 있을지라도, 죄 그 자체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통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히사마쯔는 이것이야말로 도덕적, 의지적인 딜레마이며, 논리적으로는 절대모순이고, 감정적으로는 절대고민이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전인적(全人的)으로 일어나 생명 그 자체에서 절대위기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고 절대부정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히사마쯔에게 있어 절대이율배반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원성(二元性)’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원성이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는 한, 인간에게 내재된 절대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가치와 반가치 상에 놓인 이원성의 문제는 인간의 어떤 이성적 활동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는 딜레마인 것이다. 히사마쯔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는가?

2. 히사마쯔의 깨달음의 세계

히사마쯔는 인간의 유형을 물 속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다섯 가지 형태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 형태는 수영방법을 모르고 바다에 들어가 파도 속에서 떳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는 것과 같이 삶에 드리운 상대긍정과 상대부정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상이다. 이들은 이 반복 속에 모든 긍정이 깨질 수밖에 없는 절대부정이 드리워져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삶이 결코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이 인간상을 히사마쯔는 ‘이상주의적 인간상’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끝없이 반복되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인간 실존에 드리워진 이원성의 문제를 인지한 존재이다.

히사마쯔는 이 문제를 인간의 실존 안에 드리워진 인간의 한계인 절대부정이라 본다. 자신이 절대부정적 존재임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이들을 ‘허무주의적 인간’이라 명명한다. 허무주의적 인간은 최소한의 안심(安心)도 낙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부정에 빠져 살 수는 없다.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으로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든다. 그들은 허무주의적 인간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무언가 삶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고자 하는 인간유형이다. 이들은 진퇴양난에서 나오고자 노력하나,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길이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절망의 상태로부터 구출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절대타력적 구제자에게 일체를 의탁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죽음의 절망으로부터 구제되고자 구원자에게 완전히 의탁된 인간을 히사마쯔는 ‘유신론적 인간상’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부정을 탈피했어도 의타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자율성을 상실한 절대타율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사마쯔는 이를 극복한 다섯 번째 인간상인 ‘깨달은 인간상(禪的 人間像)’을 제시한다. 그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타력의 도움없이 절대자력으로 독탈무의(獨脫無依)하게 파도 중에 떠서 스스로 수영하는 인간상이다. 이 유형은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절대타율이 아닌 절대자율로 해결하고자 한 인간상이다. 히사마쯔는 절대자율을 지닌 존재를 절대자자(絶對自者) 곧 ‘무상(無相)의 자기(自己)’라 부른다. 그러면 ‘무상의 자기’라는 자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는 절대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이다. 절대이율배반 곧 인간의 실존에 드리워진 이원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히사마쯔는 우선 대의단(大疑團)에 들어서야 한다고 본다. 대의단이란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자아가 전인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의심의 덩어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히 지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감정적, 의지적 딜레마까지 포함하여 몸과 마음 전체를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막다른 곤경에 처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존 전체가 흔들이는 측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히사마쯔는 우리가 대의단에 들어가 끝없는 참구(參究)를 하면 더 이상 의심하는 주체와 의심되는 객체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끝없는 참구(參究)를 통해 의심하는 주체와 의심되는 객체가 하나됨을 체험함으로써 ‘본래의 자기’에 눈뜨게 된다는 것이다. 히사마쯔에게 있어 본래의 자기에 눈뜸은 생사적(生死的) 자기를 극복한 무생사적(無生死的) 자기가 됨을 뜻한다. 즉 이원성을 지닌 분별적(分別的) 자아가 지닌 허상을 부수고 이원성을 극복한 무분별적(無分別的) 자아를 깨닫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히사마쯔의 깨달음의 세계는 한마디로 ‘이원성의 극복’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 실존의 근원적 모순을 극복함은 본래의 자기, 즉 무상의 자기를 자각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해결은 신이나 부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아의 실존적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선(禪)을 통한 히사마쯔의 깨달음은 한마디로 ‘무상의 자기’이다. 무상의 자기란 자기 외에 대상화된 존재에 근거하지 않고 본래의 자기에 눈뜨는 것 즉, 유상(有相)의 신이나 불(佛)에 일체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자(絶對自者)이다. 무상의 자기는 인간 실존에 드리워진 절대이율배반을 자기 외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자율(絶對自律)에 의해서 극복한 존재이다. 이러한 절대자율의 입장에 선 히사마쯔에게 있어 그리스도교는 절대타율적 입장으로 비춰진 것이다.

3. 히사마쯔가 본 그리스도교

무상의 자기를 깨달음으로 절대이율배반의 문제를 해결한 히사마쯔는 절대타자(絶對他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지적한다. 히사마쯔에게 있어 신은 인간에게 절대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그래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단절(絶對斷絶)이고 절대현절(絶對懸絶)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이 절대현절이야말로 신을 신답게 하는 근거라고 본다. 절대현절적 관계에서 신은 인간을 향해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주며, 인간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존재로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인간은 아가페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단지 신으로부터 오는 아가페적 사랑을 받는 수동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아가페적 사랑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기 때문이다.

  히사마쯔에게 아가페의 주체는 유일신이 아니라 깨닫는 존재, 곧 ‘무상의 자기’이다. 즉, 히사마쯔가 말한 아가페는 유일신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각자(覺者)에게서부터 나오는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아가페의 주체가 유일신이 아니고 인간일 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인간을 향한 일방적인 아가페의 주체로서의 유일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그는 절대타자로서의 신관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히사마쯔는 그리스도교에서의 큰 걸림돌은 예수를 계시의 절대유일한 근거로 삼고 있는 점이다. 그는 어떤 특정 인간만이 신과 직접 관계하고 다른 이는 그 사람을 통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종교라고 본다. 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절대유일의 계시로 본 점을 비판한다. 히사마쯔는 예수와 관련된 문제를 법신불(法身佛)과 방편불(方便佛)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이 관계를 그는 방나비와 번데기의 비유로 설명한다.

“나비가 번데기로부터 껍질을 깨고 나올 때 나비가 번데기 외의 다른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번데기 자신이 그 자신을 부정해서 나비로 탈화(脫化)하는 것이다. 곧 나비가 본래의 실존의 모습이다.”

번데기가 나비로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외연(外緣)이나 조연(助緣)의 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방편에 불과하다. 이처럼 방편불은 번데기가 참된 실존의 모습인 나비로 탈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히사마쯔에게 있어 법신불은 동시에 타인도 자기 성립의 근저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방편불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법신불은 방편불이며, 타인의 성불을 도와주는 방편불은 법신불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는 법신불이면서 동시에 방편불이다.

히사마쯔는 예수도 붓다와 같이 절대위기를 자율적으로 극복해 낸 각자(覺者)로서의 법신불(근원불)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자기성립의 근저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방편불로 본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인간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간보다 먼저 존재하는 ‘그 무엇’인 양 주장하는 그리스도교가 그에게 전과학적(前科學的) 신앙의 산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살펴보았다. 그 비판의 핵심은 그리스도교가 신을 자기 외의 대상적인 존재로 봄으로써 아직 이원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과 예수를 절대 유일한 계시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선불교학자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쪽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 1909-1984)의 견해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Ⅲ.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견해

 타키자와 가츠미는 그의 저서 『불교와 그리스도교』(『佛敎とキリスト敎』)에서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이 부분은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새로운 만남의 장(場)으로서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응답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타키자와의 임마누엘 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타키자와 가츠미의 임마누엘 신학

타키자와는 니시다의 제자인 동시에 칼 바르트의 제자로서 양자의 사상을 다 수용하면서도 양자의 사상이 지닌 결함을 보완하여 자신의 독특한 임마누엘 신학을 펼쳤다. 타키자와는 니시다와 바르트를 각각 어떤 점에서 비판했는가?

타키자와는 니시다가 ‘무(無) 그 자체’와 ‘인간의 자각’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사실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개념 속에 묶어 버렸음을 비판한다. 즉, 타키자와가 볼 때 니시다는 절대무(絶對無)와 인간 주체와의 관계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무와 인간 주체를 구별하지 않는 니시다의 사상은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타키자와는 니시다와 관련지어 선불교에 대한 일련의 의문을 제기한다. 왜 선(禪)의 각자(覺者)들은 절대무와 인간주체를 구별하지 않는가?

이러한 타키자와의 의문은 그리스도교에로 이어져,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형태와 그것을 성립시키는 존재근거가 명확히 구별되고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타키자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의 이중성(二重性)을 자신의 그리스도론적 사고의 중심테마로 삼고 있다. 타키자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본 것은 신인(神人)의 관계이다. 곧 참 인간이신 예수께서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지니셨는지 하는 점이다.

그는 거기서 두 가지 면을 보았는데 그 한 면은 신인(神人)의 관계 그 자체, 즉 신인(神人)의 원관계(原關係)이고 다른 한 면은 신인(神人)의 원관계에 대한 자각(원관계와 인간적 주체와의 응답적 관계)이다. 이와 같이 타키자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지닌 신인(神人) 관계, 곧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만남을 ‘접촉’(接觸)이라는 표현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타키자와는 신인(神人)의 원관계를 제1義 접촉, 제2면인 역사적 대응(對應)관계를 제2義 접촉이라 부른다. 즉 그는 인간 예수에게 부여된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임마누엘이라는 원사실(原事實)은 모든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부여된 제1義 접촉이며, 인간 예수처럼 원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종교적 실존의 완성을 이룬 것을 제2義 접촉이라고 본 것이다.

瀧澤克己가 쓴 ‘접촉(接觸)’이라는 말은 다음의 의미를 간과한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용어이다. 즉 그가 말한 제1義 접촉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지탱하는 역사의 이면(裏面)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인(神人)관계의 존재적인 면을 의미하며, 제2義 접촉은 근본적 사실에 기초하여 역사의 표현에 일어나는 면 즉 신인(神人)의 원관계(原關係)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기능적인 면을 의미한다.

여기서 타키자와 신학의 핵심은 무엇보다 임마누엘 원사실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타키자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재 근거인 임마누엘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마누엘이라는 원사실이 있고 이를 드러낸 완전한 증인으로서의 인간 예수가 있지 이 순서가 뒤바뀌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꿔말하면 인간 예수가 존재하지 않아도 임마누엘의 원사실은 불변(不變)함을 의미한다. 즉 제1의 접촉이 제2의 접촉보다 선재하며, 제1의 접촉 곧 원사실의 우선성으로 인해 제1의 접촉과 제2의 접촉 간의 절대로 뒤바뀔 수 없는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불가역성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불가역성이란 모든 인간의 자기성립의 근거인 임마누엘은 인간이 그 원사실을 깨닫기 전에 이미 모든 존재 안에 선재(先在)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 선재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를 자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궁극적 실재 그 자체와 그것을 자각하는 인간 주체와의 관계에서 ‘임마누엘 원사실’에 우선성을 둠으로써 양자는 결코 그 순서가 역전(逆轉)될 수 없는 불가역성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타키자와의 임마누엘 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분석을 통해 드러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제1의 접촉과 제2의 접촉은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키자와에게 있어 인간의 자기 성립은 임마누엘이라는 원사실 그 자체에 있지, 이를 자각한 역사적 예수에게 있지 않다. 이와 같이 타키자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를 그 존재이게끔 한 그의 실존적 근거인 원사실, 즉 ‘임마누엘’에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성서가 제시한 절대유일의 계시 근거가 되며 예수 외에 다른 계시의 근거는 없게 된다는 종래의 신학적 견해를 타키자와는 비판한다.

타키자와가 말한 불가역성은 히사마쯔가 비판하듯이 신을 다른 존재처럼 대상화시킨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의 우선성’에 대한 신앙을 말한다. 다시 말해 타키자와는 인간의 깨달음에 앞서 ‘주어진 은총’을 통찰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존재의 근원이 선재하고 인간이 이를 깨달을 뿐이라는 신인(神人) 간의 뒤바뀔 수 없는 관계성이야말로 그가 말하고자 한 불가역성의 본 뜻이다. 이는 타키자와가 칼 바르트를 높이 평가한 점에서 잘 드러난다.

바르트는 임마누엘의 원사실과 무관하게 역사적 예수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즉 발트는 임마누엘과 상관없이 종교적 체험의 깊음이나 도덕적 품성의 높음이나 주변사람들에 대한 감화나 후세에 대한 영향 때문에 예수를 주 그리스도라 믿는것은 인간 예수에 대한 우상화라고 본다.

타키자와는 바르트가 예수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신인관계에 대한 해석의 사유를 생명 그 자체의 원점인 ‘임마누엘’로 되돌린 점에서 바르트의 사유를 높이 인정한다. 즉 타키자와는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에겍서 역사의 피안 존재의 근거를 보았고 그 임마누엘을 신학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새로운 사유를 시작했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예수가 제이의 접촉 곧 임마누엘의 징조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키자와는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에 한계점이 있음도 지적했다. 그것은 바르트가 인간 예수를 임마누엘의 원사실과 동일시했다는 것 때문이다. 바르트는 예수 출현을 통해 비로소 임마누엘이 성립되었다고 봄으로써 예수의 수육사건 자체가 인간존재 상황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이야말로 모든 인간 역사 위에 있는 원역사(原歷史)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예수 사건에서 비로소 실현된 신인의 원관계인 임마누엘 사실 그 자체에 단순히 ‘예’라고 말하는데 있다. 바르트는 예수야말로 성서가 제시한 절대유일의 계시근거이며 예수 외에는 다른 계시의 근거가 없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됨으로써 인간이 신의 아들이 되는 길은 한번 일어나면 되지 왜 시공에서 계속 일어나야 하는가?”

이렇게 될 때 결국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르트가 예수그리스도를 절대유일의 계시 근거로 본 견해를 타키자와는 ‘낡은 사유’라고 비판한다. 타키자와는 칼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페르소나가 지닌 이중성 곧 임마누엘 원사실인 제1의 접촉과 이를 드러낸 제2의 접촉을 구분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타키자와는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페르소나가 지닌 이중성을 구별하지 못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신과 인간의 제1의 접촉(임마누엘)이 성립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로소 역사적 예수를 절대화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다카자와가 볼 때 바르트는 예수 그릿도가 지닌 페르소나의 또다른 측면인 징조(徵兆)로서의 성격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임마누엘과 우리 가운데 ‘사건’으로 일어난 임마누엘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키자와의 경우는 영원한 임마누엘의 원사실이 선재하며 이를 자각하여 실존적 완성을 이룬 인간 예수가 있는데 반해 바르트의 경우는 역사적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임마누엘의 원사실이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타키자와의 불가역성 사상이다.

타키자와의 불가역성은 히사마쯔의 가역성과 상반되는 관점이다. 따라서 타키자와의 불가역성의 문제는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 있어 중요한 문제로 부상된다. 그럼 타키자와는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해 어떤 견해를 펼쳤는지 가역성과 불가역성의 문제와 연관지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견해

1) 히사마쯔에 대한 긍정적 평가

앞서 우리는 히사마쯔가 하느님을 인간과 현격한 거리를 둔 절대타자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했음을 살펴보았다. 히사마쯔에게 있어 깨달음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인간 ‘안’에 있다. 즉 인간이 본래의 자기에로 전회하는 그 원동력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절대타자인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신론적 종교는 반과학(反科學)적인 물신(物神)숭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키자와는 인간 실존의 근거를 자기 밖에서 찾으려는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대한 히사마쯔의 비판을 일단 수용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신관 내에 히사마쯔가 비판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타키자와가 임마누엘 신학을 통해 말했듯이 인간의 자기 성립의 근거는 인간 자체 안에 있지, (제2의 접촉인) 예수 그리스도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인간 예수는 인간 구원의 절대 유일 근거라기보다 자기 안에 주어진 궁극적 실재(원사실)를 자각하여 실존적인 완성을 이룬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의 근거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 안에 있으며, 예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원사실의 자각을 통해 본래의 인간이 되는데 있다. 이 점에서 타키자와는 인간이 알든 모르든,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간에 임마누엘 원사실은 모든 인간 안에 주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타키자와의 또 다른 긍정적 평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히사마쯔는 예수를 계시의 절대유일 근거로 본 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면서 그를 각자(覺者)로 보았다. 타키자와는 바로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자신 안에 주어진 원사실을 자각한 존재라고 본 자신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이러한 타키자와의 시각은 종전에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절대타자인 실체[有相]로서 보았던 신관(神觀)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절대유일 근거로 그리스도론에서 인간존재의 근거인 궁극적 실재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 즉 히사마쯔에 대한 타키자와의 긍정적 평가는 그리스도교의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신관과 그리스도론을 정화시켜줌으로써 개방적이고 열린 신관에로 나아갈 가능성을 준다.

또한 그의 사상은 우리가 개방된 신관을 지닐 때 공관(空觀)을 지닌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이 타키자와는 히사마쯔가 인간의 자기성립의 근거를 인간 자체 안에 두고 있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 히사마쯔의 사상 내에도 병폐가 있음을 지적한다.

2) 히사마쯔에 대한 비판

앞서 우리는 타키자와의 불가역성 사상은 인간 각 개인의 깨달음보다 원사실이 우선(于先)하며 따라서 제1의 접촉과 제2의 접촉 간에는 엄격한 순서가 있고 구별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히사마쯔가 말하는 ‘무상(無相)의 자기’는 깨달음의 주체와 깨달음의 실재인 무상은 가역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곧 ‘자기가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자기’라는 것이다. 타키자와는 히사마쯔의 가역성이 각자(覺者)의 체험을 너무 중시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각자(覺者)의 깨달음 그 자체와 깨달음을 가능케 해 준 근거를 구별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엄밀히 구별치 않음이야말로 히사마쯔 사상의 한계임을 지적한다. 궁극적 실재 그 자체와 각자(覺者)를 구별하지 않음은 히사마쯔 뿐만 아니라 다른 선사들에게도 발견된다. 타키자와는 말한다. 

"선자의 인식이 아무리 완전한 것일지라도 無(혹은 空)라는 깨달음의 실재 그 자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타키자와는 선사들이나 히사마쯔가 각자(覺者)와 궁극적 실재 그 자체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진불(眞佛)의 이의성(二義性)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히사마쯔에게 있어서는 각자(覺者)가 진불(眞佛)이고 진불(眞佛)이 각자(覺者)이다. 그러나 타키자와에게 있어서는 ‘진불’의 의미가 이중성을 지닌다. 하나는 제1의 접촉으로서의 진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제2의 접촉으로서의 진불이다. 즉 그에게 있어 그 형태(제2의 접촉)를 佛이라고 하는 것과 그 형태를 가능하게 한 제1의 접촉을 佛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타키자와는 이를 진불(眞佛)의 이의성(二義性)이라 부른다. 타키자와가 볼 때 선수행자들이 인간의 깨달음의 체험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게 됨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절대 기준으로 모든 것을 관하려는 위험한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각자(覺者)를 아무리 진불(眞佛)이라고 볼지라도 그것과 전혀 질서가 다른 영원한 궁극적 실재인 근원불(根源佛)이 인간 근저에 활동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사마쯔는 진불의 이의성을 간과한 채 제1의 접촉으로서의 佛과 제2의 접촉으로서의 佛을 가역적 관계로 본 것이다. 타키자와는 히사마쯔가 각자(覺者)를 아무리 진불(眞佛)이라고 해도 그것과 전혀 질서가 다른 영원한 궁극적 실재인 근원불(根源佛)이 인간 근저에 활동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타키자와는 절대이율배반에 빠진 인간이 돌연히 본래의 자기에 눈뜸은 불가역적인 진불(眞佛)의 작용에 감응해서 성취된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원동력은 자기 성립의 근저에 작용하는 ‘진불의 자비’라는 것이다. 타키자와가 볼 때 히사마쯔는 인간의 원점과 관련된 이같은 눈뜸이라는 자각의 원동력을 명백히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타키자와는 진불의 이의성을 간과한 채 제1의 접촉으로서의 佛과 제2의 접촉으로서의 佛을 가역적 관계로 본 히사마쯔 사상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Ⅳ. 가역성과 불가역성에 대한 제반 평가

1.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지닌 한계

우리는 지금까지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대화에서 선두주자로 활동해온 교또학파의 한 사람인 히사마쯔 신이찌와, 타키자와 가츠미의 논쟁에 대해 고찰해 왔다. 타키자와가 주장했듯이 히사마쯔의 사유 안에는 그리스도교를 불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데에서 오는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연기(緣起)와 무상(無常), 무아(無我) 교의에 기반을 둔 불교는 일체의 이원화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와 같이 불교가 일체의 불가역적 초월성을 부정하고 가역적인 입장을 강조해 온 것은 이러한 교의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든가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는 표현은 일체의 대상화를 거부함을 잘 말해준다. 불자들은 일체의 대상화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라 생각한다. 대상화를 극복할 때 비로소 중생과 불(佛)의 차이는 사라지고, ‘중생이 곧 부처’임을 자각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다음 표현들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부처와 범부가 한 몸(佛凡一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生佛不二)’, ‘윤회 속에 태어나고 죽는 것이 곧 열반(生死卽涅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타자적 초월성도 허용치 않는 선불교의 입장에서는 신의 초월성을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불가역성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히사마쯔가 궁극적 실재와 인간을 가역적 관계로 보는 것도 그가 이러한 선불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히사마쯔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본다. 즉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교의 ‘신’은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교에서 언급하는 신이 히사마쯔가 말한 것처럼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의 체험에 비추어볼 때 그리스도교의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이며 유한한 존재들은 존재 자체인 하느님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하느님을 ‘하나’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하는데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를 의미한다. ‘존재나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엑카르트의 신관은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별하며, 둘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성은 존재 자체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그에 따르면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은 신이고 그것은 신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엑카르트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십시오”라고. 후자의 하느님은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을 의미한다. 히사마쯔가 이해한 그리스도교의 신 또한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대상화된 신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쯔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신이해와 관련하여 가역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가역성이 대상화된 신 이해에 기반한 것이라면 이는 재고해 필요가 있다. 타키자와가 히사마쯔의 가역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도 그리스도교의 신은 대상화된 신이 아니라 공과 만날 수 있는 궁극적 실재의 측면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키자와는 임마누엘 원사실이 깨달음의 주체인 인간과 불가역적 관계임을 말한 것이며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와 인간 간의 불가역성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를 되물은 것이다. 그러나 타키자와 신학에 대해서도 현대신학자들은 그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2. 타키자와 신학에 대한 평가

타키자와는 히사마쯔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 그 한계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타키자와는 자신의 임마누엘신학에서 이 궁극적 실재를  ‘임마누엘의 원사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임마누엘의 원사실’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적 근거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타키자와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를 동일시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양자 간의 불가역적 관계가 지닌 의미인 것이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를 동일시한 선불교적 입장을 비판한 타키자와의 견해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이와 같이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을 불가역적 관계로 보는 타키자와의 사유의 근저에는 그가 말한 ‘임마누엘의 원사실’이 있다. ‘임마누엘의 원사실’과 유사한 표현들은 다른 신학자들의 사유 안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일본 현대신학자인 야기 세이찌(八木誠一)가 말한 ‘장(場)’이 그것이다. 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는 역사의 어느 일점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근거에 있다고 보면서 이를 장(場)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아베마사오가 말한 ‘궁극적 근거’나 틸리히가 말한 ‘존재의 근거’와도 유사한 개념이다. 야기는 인간의 실존이  바로 이 장 안에 놓여있다고 보는 점에서 타키자와의 사유와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야기의 사유에는 궁극적 실재의 측면에서 타키자와의 그것과 유사성을 지니나,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타키자와가 임마누엘 원사실인 제일의 접촉에 더 큰 무게를 둔데 반해, 야기 세이찌는 예수의 주체적 자각을 통한 제이의 접촉을 그리스도론의 근거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야기는 제일의 접촉인 임마누엘 원사실보다 이를 주체적으로 자각한 ‘예수의 자각’ 곧 제이의 접촉을 강조한다. 인간이 깨닫기 전의 제일의 접촉은 관념 내지 표상일 뿐이며 제일의 접촉을 토대로 인간이 이를 주체적으로 깨달을 때 비로소 원사실이 그에게 궁극적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야기는 인간실존이 ‘장’ 안에 놓여있음을 주체적으로 깨쳐야 한다는 주체적 깨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주체적인 깨달음에 강조점을 둔 야기는 타키자와 신학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타키자와가 ‘임마누엘의 원사실’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그리스도교 특유의 역사성 곧 예수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메시지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구원의 신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야기 이외에도 타키자와의 임마누엘 신학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비판의 소리가 있다. 그것은 야기가 지적한 것과 같이 타키자와의 임마누엘 신학이 자칫 그리스도교 특유의 역사성을 약화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리교 신학자 이정배 역시 타키자와가 임마누엘 원사실을 자기 신학의 핵심으로 둠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보편성 속에 해소시켜버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종교간 대화 특히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종교간 대화가 이루어진 과정에서 방법론적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3. 종교간 대화의 방법론적 성찰

 타키자와가 ‘임마누엘 원사실’을 자신의 신학의 중심을 두고 사유해온 것은 다원주의적 관점에서의 종교대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신중심적 다원주의자인 존휙은 자신이 말하는 ‘신’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유일신 관념이 없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세계도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신 대신 ‘공(空)’을 말한다. ‘공(空)’은 존휙(John Hick)이 말한 궁극적 실재의 불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과 공’이 종교 간의 대화 주제가 되어온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이와 같이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