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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사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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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사상이 나오기까지의 일본불교의 역사적 배경>
1. 중세일본불교의 배경
1) 정치권력의 변화
일본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라면 鎌倉新佛敎의 흥기 곧 鎌倉新佛敎 諸宗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본불교가 鎌倉新佛敎를 통해 중국불교를 답습해오던 불교형태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신앙체제로 자리잡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平安시대말부터 일세기에 걸친 혁신의 움직임 안에서 발생한 鎌倉新佛敎(1185-1333)는 당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그 중 특히 무사계급의 興起, 武家정권의 성립이라는 커다란 사회변동은 신불교의 출현에 무엇보다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신불교 성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의 변화는 정치권력의 변화를 통해 확실한 모습을 드러낸다. 일본은 645년(大化1) 다이카개신이 단행되면서 중국의 律令을 받아들여 율령기구를 조직했다. 이러한 율령제도 하에서 당시 인민들은 지배계급에 농업수확물 뿐 아니라 노동력까지 빼앗겨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무거운 부담에 허덕이던 인민들은 8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배계급에 거센 저항을 했지만 그들을 위협할만큼 새로운 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율령제 기구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어왔다. 그러다가 점차 율령조직이 변질되면서 귀족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율령조직에서 귀족사회로의 변화는 지배형태상의 변화에 불과했으며 실제적으로는 율령제도와 일관된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같이 일본은 4세기에서 12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고대사회로서 공통된 지배체제하에 있다가 그후 셋칸정치(攝關政治)가 성립되면서부터 그 이전 사회와 다른 특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귀족들의 역할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율령기구에서 귀족들은 관료로서 인민들과 어느 정도 접촉할 기회가 있었지만, 셋칸귀족정치 시대가 되면서는 인민대중과 접촉할 기회가 점차 사라져 갔다. 그것은 귀족들이 맡아하던 실제 정무는 하급관인에게 맡겨지고 귀족들은 연중행사가 된 관직의 임명이나 의식만을 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귀족은 지관관이나 재지관리에게 정치를, 在地領主나 莊官(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장원의 관리를 맡기고 그 수익의 일부를 징수하기만 하는 명목상의 최고 권력자였으므로 농촌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세력은 재지영주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이들이 武士라는 신흥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재지지주로서 세력을 잡게 된 무사들은 농업경영이라는 현실적 기반 위에서 뿌리를 내림으로서 종전의 권력자들과는 다른 세력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천황제 기구의 내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귀족과의 타협을 자주 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봉건사회로 바뀌기까지는 수백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호오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을 해결함으로써 교또에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다이라(平)氏도 아직 귀족정치를 대신할 武家정치를 열지 못했고, 建久3년(1192) 다이라씨를 멸망시킨 미나모또 요리또모(源賴朝 1147-1199)에 와서 幕府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물론 미나모또 요리또모는 모든 大權을 쥐고 무사와 그 領地를 통제하기 위한 독립적 권력조직을 만들기는 했지만, 교또 정부의 권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도읍인 교또와 鎌倉의 이원적 정치지배관계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1221년 조큐(承久)의 變에 의해서 막부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되어 무사에 의한 통일적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비로소 중국식 황실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부터 강력한 지방지주들이 주도하는 중세적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무사가 권력을 쥔 봉건사회는 더 이상 국가권력으로 인민을 노예처럼 부리고 그 노동력을 징집하지 않고 분산적인 토지지배를 통해 토지를 지닌 인민들의 생산물을 거두는 사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처럼 토지에 대한 지배가 곧 봉건적 지배의 중심을 이루게 된 봉건사회가 되자 토지를 차지한 무사계급 간에 잦은 전쟁이 생겼고 이러한 전쟁은 주종의 계약관계로 맺어진 무사와 부하의 관계를 새롭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한번 전쟁에 나가면 생사운명을 같이 해야만 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主從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맺어진 인간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를 넘어선 성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 무사들이 귀족들을 물리치고 권력장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새로운 인간결합이 발휘한 위력 덕택이라 할 수 있다.
鎌倉막부가 열리면서 정권의 중심은 京都에서 鎌倉으로 옮겨졌고 정치, 문화, 종교도 公卿중심에서 武家본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히 불교의 경우 귀족중심의 불교에서 무사중심의 시대가 되면서 민중중심의 불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즉 무사를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의 상승이 귀족불교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민중신앙을 낳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신앙이 싹트게 된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는 귀족간의 투쟁, 무사들과의 전쟁 등 만성적 전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격렬한 변동과 심각한 위기적 상황도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와같이 정권교체와 세력다툼으로 전란이 계속된 상황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재해까지 덮치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종전과 같은 현세기복적 차원의 불교로는 해결될 수 없는 존재근저로부터의 물음을 갖게 되었고 이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겸창시대에 혁신적 종교운동이 발생하게 된 요인이 된 것이다.
2) 平安佛敎의 쇠퇴와 末法思想
일본 중세 鎌倉시대에 들어서면서 발생한 신불교운동의 배경이 된 平安불교는 最澄(767-822), 空海(774-835) 두 대사에 의해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자는 모두 入唐하여 空海는 밀교를 배웠고, 最澄은 천태교학과 北宗禪 그리고 밀교를 접한 뒤 귀국했다.
9세기 초에 사이쵸오(最澄, 767-822)가 당나라에 가서 천태종의 교리를 배워와서 히에잔(比叡山)에 연력사(延曆寺)를 개창함으로써 일본의 천태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이쵸오는 천태종만이 아니라, 선종과 밀교 등 그 시대 중국 불교의 여러 종파를 아울러서, 기존의 불교교단이 나라(奈良)의 구불교에 대항하는 신불교운동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의 천태종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다양한 불교를 배우고 이를 수용한 最澄은 圓 禪 戒 密의 4宗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천태종을 열고, 그 중핵으로서 法華一乘主義를 주장했다. 이와같이 법화일승아래 대표적인 불교사상을 모아 총합적인 체계확립을 도모한 最澄은 조정의 후원을 입어 히에이산에 절과 대학을 건립하고 거기에 중국에서 가져온 경전들과 천태종의 가르침을 담은 典籍을 소장함으로써 히에이산을 당시 불교대학으로서 발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히에이산은 진리탐구의 배움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수행의 도량으로 자리잡아갔다.
이와같이 傳敎大師 最澄은 법화경의 일승묘법을 근간으로 삼고, 弘法大師 空海는 진언밀교의 비법을 핵심으로 삼아 각각 사상 철학의 총합 체계화를 꾀함으로써 양자에 의해 자리를 잡아간 平安불교는 위정자를 비롯한 귀족들의 귀의와 보호로 인해 융성하게 되어 사탑을 세우고 법회를 집행함이 전시대에는 볼 수 없던 국가불교요, 귀족불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대표라 할 수 있는 叡山불교는 귀족들과 깊은 결속관계를 맺어가면서 귀족들이 불교에 건 기대인 개인과 가족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 加持祈禱와 주술적 의례를 주로 하는 형태로 변해갔다. 그래서 四宗일치를 주장하던 천태종은 儀式作法이 다른 것보다 앞선 밀교를 점점 더 중시하게 되면서 밀교본위가 되어갔다. 이같이 일본천태종에 밀교적 경향이 짙어진 근저에는 最澄이 眞言密敎를 중시하여 법화사상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즉 最澄은 法華一乘과 眞言一乘 간에 우열이 없다고 보고 眞言密敎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것은 밀교의 수행법인 三密의 실천방법이 구체적으로 卽身成佛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는 밀교의 실천적 방법이 천태종의 一念三千의 理觀을 보완해 줄 수 있다고 봄으로써 밀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귀국 후에도 밀교를 연구했던 것이다. 최징이 가졌던 밀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그의 제자인 엔닌(圓仁, 794-864)과 엔찐(圓珍 814-891)에게 전수되었다.
唐에 들어가 밀교를 받아들여 천태교학에 접목시킨 圓仁은 천태원교와 밀교의 관계를 理同事別이라 보았는데, 그것은 圓敎와 密敎의 일치가 理에 그치고 事는 별도로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圓珍에 와서는 밀교와 천태가 理同이지만 事에 있어서는 밀교가 한층 뛰어나다고 보는 理同事勝을 주장함으로써 밀교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천태종은 엔닌과 엔찐 때에 이르러 밀교적 경향으로 기울어졌고 그후 5조인 安然(841-915)에 와서는 교리적인 敎相門과 실천적인 止觀門에 있어서 진언밀교와 達摩禪 및 大乘戒를 합쳐 顯密조화의 台密敎學이 된 것이다. 安然은 叡山眞言宗을 수립해서 이를 諸宗 중에서 제1위에 두고 一大圓敎論을 전개해서 진언밀교야말로 대소승의 일체교법을 포섭한 一大圓敎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하여 확립된 台密敎義는 最澄이 천태법화종의 발전을 위해 밀교를 도입한 의도와 달리, 叡山 眞言宗을 수립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러나 安然이 대성시킨 일본천태는 교리상의 敎相門과 실천적인 止觀門이 종합된 顯密調和의 台密敎學였으나 11세기초 全叡山에 영향이 미친 고우께이(皇慶)에 와서는 敎學的 敎相면을 무시해버리고 事相上의 형식과 加行, 正行, 祈禱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밀교적 색체가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이와같이 천태교단의 천태교학은 밀교와의 관계 안에서 점점 번쇄한 교학으로 변화되어갔다.
결국 이러한 천태종의 번쇄한 교학이 중심이 된 平安佛敎는 그 당시 온갖 전쟁과 天災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아무런 종교적 구제의 메시지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정치적 불안에 천재지변까지 겹쳐 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심각한 위기감에 빠지게 되어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의 원의가 날로 절실해졌지만, 당시 불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교는 나라시대부터 시작되어온 사원의 대규모 부동산 획득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면서 사원의 타락과 부패의 징조는 늘어만 갔다.
사원들은 그들의 토지와 여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출가수도승들을 승병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처음에 방어를 목적으로 세웠던 군대는 얼마 안가서 공격을 위한 군대로 전환되어 더 많은 부를 끌어모으는데 이용되었고 조정을 협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와같이 승병의 반란과 폭동, 권력을 위한 투쟁, 살인, 음모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당시 불자들은 말법시대가 현실적으로 도래했다고 믿게 되었다. 즉 호겐, 헤이지, 지쇼의 전란으로 인해서 사회질서가 해체되어 갔고 사회적 위기는 매년 점점 더 심각해진 당시의 상황을 경전에 있는 말법의 가르침이 실제로 눈앞의 사실로서 나타난 것처럼 비추어진 것이다.
관념으로만 전해오던 末法시대가 현실화된 느낌을 준 헤이안말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神道라는 현세기복적 종교와 정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거의 하나가 되다시피 세속화되어 진정으로 불교가 추구하는 초월의 세계가 상실된 상태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당시의 말법시대적 상황은 가마꾸라불교가 등장하게 된 데 큰 요인이 되었는데 그외에도 가마꾸라불교출현의 주요요인이 된 것으로 당시 천태종에서 성행했던 천태본각사상을 들 수 있다.
3) 천태본각사상
천태본각사상은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발생근거는 중국의 본각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설해진 본각이란 말은 <대승기신론>이 화엄종을 비롯하여 여러 종파에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불교 내에 두루 쓰여진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본각사상은 <대승기신론> 이래 발전되어온 중국불교 전체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본각사상 전체를 다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 鎌倉신불교 발생 근거가 된 일본의 천태본각사상이 지닌 문제점을 밝히려는 목적을 갖고 있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본각사상 비판을 근거로 자신의 불교사상을 펼친 비판불교 학자인 하까마야(袴谷憲昭)는 본각사상을 불교 본래의 사상과 거리가 먼 비불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붓다가 지닌 문제의식을 인도의 토착사상에 대한 거부 즉 梵我一如적인 場的 實體에 대한 부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서, 붓다는 梵과 아트만(我)을 기반으로 한 우파니샤드의 철학 즉 불변적인 하나인 장소를 부정하고 시간적인 緣起야말로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까마야가 볼 때 본각사상은 붓다가 부정한 바로 그 場的 실체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본각을 붓다가 부정한 바로 그 場的 실체적 개념이라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본각은 현상세계를 넘어선 근원적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은 본래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어 상주하고 있지만 이를 자각하지 않는 한, 현상으로써는 변화생멸하는 것으로 心常相滅說을 말한다.”
이와같이 본각을 모든 중생내 상주하는 근원적 깨달음으로 정의할 때 이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의 장소적 개념이 된다. 하까마야는 이러한 본각사상이 인도사상의 범아일여 더 나아가 중국사상의 노장적 자연관의 토착사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본각사상 내에는 중국의 토착사상이 지닌 장소적 의미가 잔재해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사상을 緣起로 보고 이를 시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하까마야는 장소적 개념으로 등장한 본각사상이 불교의 기본사상을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본각사상이 중국불교사상에 정착하게 되는데 근저가 된 것은 <대승기신론>으로 거기에는 본각 이외에도 이와 유사한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 즉 眞如, 自性淸淨心, 如來藏, 覺 혹은 一心이 그것인데 하까마야는 이 모두가 불변하는 장소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고 본다. 이와같이 하까마야는 <기신론>에서 말하고 있는 변화하는 중생심 내에 불변하는 실재개념이 본각사상으로 발전되어 갔다고 본다. 이와같이 心性 내에 불변하는 본체로서 상주한다고 하는 심성상주설은 중국불교내-특히 화엄종 조사들을 통해서-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서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와 천태본각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본각사상 연구의 대가인 田村芳朗는 <本覺思想論>에서 본각사상은 중국의 화엄3조인 賢首法藏(643-712)이 <화엄경>과 <大乘起信論>을 倂用하여 화엄철학을 확립한 데에서 시작한 것으로 본다. 法藏은 <화엄경>과 <기신론>에서 강조한 一心을 眞如로 보고 이것에 의해서 현실적인 생성약동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起信論義記>에서 그가 주장한 眞如隨緣를 통해 잘 드러난다. 賢首法藏은 <大乘起信論義記>에서 본각을 “법신부처가 얻은 깨달음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석하였는데 이와같이 항상성을 지닌 본각개념은 종밀에 와서 眞性이나 眞心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本覺眞性, 本覺眞心이라 불리게 되었다. 宗密은 <禪源諸詮集都序> 권 상에서 “근원은 一切衆生本覺眞性이다. 이를 佛性이라 하며 心地”이라고 하여 일체중생은 本覺眞性 다른 말로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都序>의 후반부에서는 이를 本覺眞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종밀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原人論>에서도 本覺眞心에 대해서 말한다.
“일체중생은 모두 본래부터 깨달은 참마음(本覺眞心)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끝없는 옛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존재하고 청정하고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는 항상있는 앎이다. 이를 불성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여래장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종밀에게 있어 본각은 그의 핵심적 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본각을 眞性나 眞心과 하나로 표현한 本覺眞性 혹은 本覺眞心을 이를 一眞心體라고 하여 그로부터 隨緣流出을 설했다. 都序권 하에 보면 “ 一眞心體가 隨緣流出하여 一切處에 두루 퍼지고, 일체중생의 身心 중에 두루 편재한다”고 하여 本覺眞心이 자기 자신을 유출시켜 인식대상을 만들고 그것을 마주하는 인식주관을 형성한다고 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종밀의 본각진심사상은 <圓覺經>에 그 원형이 있다. “일체중생의 온갖 幻化가 모두 여래의 圓覺妙心에서 나왔나니 마치 허공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 같다. 허공꽃은 멸할지라도 허공의 본성은 멸하지 않나니 중생의 虛幻한 마음도 幻에 의해 사라지나 모든 幻이 다 사라져도 본각의 마음은 요동치 않는다.”
이와같이 圓覺을 일체의 근원이라고 본 <원각경>에 대해서 종밀은 깊은 관심을 가졌고 원각경에 관한 많은 주석서를 내었다. 종밀은 <원각경약소초>권 상1에서 圓覺을 法體 즉 凡聖不二의 根本法體라고 해석하면서 本覺과 圓覺을 하나로 보았다. 이와같이 종밀에 와서 眞如, 一心을 절대심으로 하여 현상배후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실 종밀의 사상은 화엄종뿐 아니라 선종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중국불교를 이어받은 한국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각사상의 문제는 단지 일본불교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의 진여나 <원각경>의 원각묘심과 같은 상주불멸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같이 상주불멸하는 실재를 상정하기에 이르른 중국의 본각사상은 일본으로 건너가 천태본각사상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천태본각사상은 중국의 본각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외 다른 여러 사상-천태, 화엄 밀교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같은 것으로 보아선 안된다. 그럼 어떻게 천태본각사상이 형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의 본각사상은 일본에 건너와 새롭게 재해석되었는데 그 선구자 역할을 한 이로 空海를 들 수 있다. 그는 화엄교리를 빌려 밀교의 체계화에 노력하면서 화엄철학의 부산물인 본각사상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기신론을 응용 해석한 <釋摩訶衍論>을 활용해서 본각사상을 재해석했다. 즉 그는 <釋摩訶衍論>에서 말하는 不二摩訶衍法 등 不二를 강조한 부분을 밀교에 적용시킴으로써 본각사상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에서의 본각사상은 화엄철학의 근본 一理(一心)와 관련하여 심성상주설로 발전했다면, 일본에서는 空海가 진언밀교 교리 안에 본각을 不二로 해석하여 받아들인 것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해석이 가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空海가 말한 不二는 본각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가 不二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空海의 본각사상은 그후 叡山天台로 이입되어 천태종의 밀교인 台密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台密사상은 최징이 기본적으로 지닌 법화일승과 진언일승 간에 우열을 두지 않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최징은 즉신성불의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한 진언밀교를 중요시하고 천태법화사상과 밀교를 동일시하여 일승사상으로 양자를 융합하고자 했고, 여기에서부터 현밀융합의 태밀사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圓仁, 圓珍에게로 계승되고 그후 밀교를 우선으로 한 顯劣密勝의 형태가 뚜렷해져 安然에 이르러 叡山眞言宗을 수립하게 되면서 台密교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와같이 천태교학과 진언밀교의 융합을 통해서 형성된 태밀사상은 安然에 이르러 집대성되었지만 그 싹은 근원적으로 천태종의 번쇄한 교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천태지의의 摩訶止觀은 중국불교의 정수라 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훌륭한 실천방법론이나, 이론이 고도로 치밀하여 그 理觀의 망에 걸려 자칫 법화경의 <방편품>에서 말한 大坑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같은 천태종 내의 번쇄한 교학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성불에 대한 미묘한 불안과 불확실감이 일본천태종 내에서 생겨나기 시작했고, 보다 확실성있는 실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는 사이에 平安초기에서 중기에 걸쳐 台密사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이와같이 安然에 의해 法華와 眞言의 融合, 顯密융합이 이루어진 후 顯密융합의 사상을 실천수행방법론 중에 넣어 卽身成佛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방향이 진전되었다. 안연에 의해 원밀 융합의 이론적 결합이 가능해지자 이 융합사상을 실천행법 안에 넣어 즉신성불설을 내세운 자가 源信과 覺運이다. 源信은 정토교와 천태원교와 융합을, 覺運은 여기에 밀교를 가해서 淨 圓 密의 삼교의 융합을 하고자 했다. 이와같이 천태정토교가 台密 學風의 영향을 받아 천태법화사상 혹은 밀교와 융합하여 즉신성불의 새로운 실천행법으로 등장하면서 源信, 覺運에 의해서 천태본각론적 염불형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같이 태밀사상과 관련하여 실천적인 행법이 부각되면서 천태종 내에서 천태본각사상은 점차 그 형태를 이루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천태본각사상은 전통적인 법화교학과 화엄 그리고 밀교가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천태본각사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각이 상주불멸함을 강조한 데 반해 천태본각사상에 오면 본각은 범부 중생내에 상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중생의 모습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천태본각사상에 오면 多種多樣한 事相이 生起 변화하는 현실의 모습이 곧 영원 보편적인 진리의 생성 약동하는 모습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같이 본각진여설이 확대해석되면서 본각진여는 범부중생의 안에 있는 理가 아니라 중생의 모습 그 자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천태본각사상은 새로운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태본각사상이 ‘중생심이 곧 본각진여’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되어가면서 이를 현실에 적용시켜 일상의 모든 소작, 욕망까지도 본각의 드러남이며 佛의 산 자태라고 긍정하는 극단적인 현실 절대긍정의 세계관을 펼쳐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衆生卽佛이라는 相卽 논리의 구극을 주장하게 된 천태본각사상은 속세, 속사, 번뇌 등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결과 뿐만 아니라, 굳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수행무용론을 낳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의 범부 자체로 절대적인 佛이 드러난다고 할 때, 성불을 위한 수행은 무용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행의 불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점점 승려들의 수행이 게을리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즉 천태본각사상에서 야기된 수행무용론은 승려들의 학문과 수행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무능하고 나태한 학승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 천태종에서는 천태본각사상을 중심으로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절대시하는 觀心主義의 학풍이 생겨났고, 한 스승으로부터 신뢰하는 한 제자에게 口述에 의해서 비밀리에 口傳으로 전수하거나 혹은 작은 紙面에 要旨를 적어 전수하는 切紙라는 형태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독자적인 傳法방식으로 비밀리에 법을 전수함으로써 천태교단 내에는 여러 分派, 分流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천태교단은 파벌적 대립과 더불어 쇠퇴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실한 구도자들은 교단 내에서 진험한 학문과 수행의 길을 닦기 어렵게 되자 교단을 떠나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4) 聖層의 출현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당시 聖이라 불리우는 계층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二中曆>에 따르면 聖層은 대개 다음의 4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명리영달을 싫어하여 은둔생활을 하는 자이고, 둘째는 수행을 엄하게 하며 보살행을 행하는 자이며 셋째는 고행수련과 산림수행에 몸을 바친 자이고 넷째는 단식고행하는 자들이다. 이같이 은거와 유행, 산악수행 혹은 재가생활 등 여러 형태가 섞여 있으나 이들은 종전의 귀족불교와는 달리 민중들에게로 가서 포교활동을 했다.
사실 중세 이전까지의 불교는 국가불교이며 세속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귀족불교였지 서민구제를 위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대승경전을 배운 승려가 점차 증가하고 널리 중생을 구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대승불교 본래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승려들이 나오면서 그들은 사원을 떠나 포교활동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원 외에서 활동하는 그들은 佛과의 結緣을 위해 勸進을 행하고 堂塔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거나 경전을 드리는 經筒, 死者에게 제사하는 의례를 행하면서 포교활동을 행했다. 그러나 이같이 대승불교의 이상실현을 위해 사원을 떠나는 승려들 이외에 또 다른 부류의 聖層도 생겨났다.
그들은 헤이안불교의 중심역할을 하던 천태교단에 속한 이들로 번쇄한 교학과 수행 등한시, 세속화로 인해 헤이안산에서는 진정한 구도의 길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다. 그들은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기성교단을 부정하여 그것과 거리를 두고 고행, 유행, 은둔 등의 삶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와같이 세속을 떠나서 들어갔던 사원을 다시 나와 재출가한 이들은 정규출가자로부터 이탈한 자들이었으므로 대사원의 별소에 모이는 일이 많았다. 이들 중에 마을사람들의 願에 응해서 포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진정한 求道의 삶을 살고자 산림에 들어가 염불과 禪定을 하고자 하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鎌倉불교를 창시한 이들 중 일부는 前者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문자를 읽을 수 없고 경전에서 설하는 복잡한 교설을 이해할 수 없는 서민에게 가르침을 요약해서 간단하고 용이하게 행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권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法然의 專修念佛인 것이다.
그런데 鎌倉신불교 창시자들은 민중의 종교적 요구를 채워주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신종파를 만든 것은 아니다. 신불교의 출현은 당시 불교에 문제의식을 지녔던 이들이 자신들이 지닌 종교적 의문을 해결하고 깨달음을 얻은 위에 민중구제 활동으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신불교 종조들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신불교는 종전의 불교와 달리 초속주의적 분위기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때부터 일본불교는 비로소 세속과 대치하는 절대적 신앙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함으로써 불교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鎌倉시대 불교의 혁신운동 중 가장 먼저 일어난 法然의 정토종 이전에도 지방민중들에게 포교활동을 하던 無名의 遊行僧이 있었고 그들의 활동에 의해 민간정토교가 유행하고 발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정토종은 중국에서 전래된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토왕생을 위해 염불 뿐 아니라 여러 諸行을 함께 병행해왔으나 法然에 와서 다른 諸行 위에 稱名專修念佛을 둠으로써 새로운 정토종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같이 법연이 칭명전수염불을 강조한 것은 아미타불에게 절대적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法然은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 아래 모든 속세간의 윤리도덕을 상대화함으로써 초속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超俗주의를 추구하던 정토종은 기성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세속의 권력과 긴 투쟁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본래 초속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일본에 불교가 종교로서 제자리를 잡아가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자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와같이 일본은 중세 가마꾸라시대에 들어서면서 超俗主義적 자각을 지닌 신불교운동으로 인해, 비로소 본연의 불교신앙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鎌倉신불교 중에서 정토교조사들은 그 수학과정에서 이같은 천태본각사상을 충분히 연구하고 源信의 염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신란도 법연의 제자로 선택본원의 염불을 수학했다고 생각되나, 59세때 병으로 누어있는 동안에 자력의 믿음이 없어진 것을 계기로 하여 본각사상의 잔재를 씻게 된 것이다. 만년이 되어 諸佛等同이라는 본각론적 표현을 설하고 있으나 이는 신심의 체험에 근거한 표현으로 자신의 타력의 마음을 설한 것이므로 단순한 이론은 아니다.
榮西는 兼修禪의 법계를 이어받았어도 겸수선이라는 말하는 것과 같이 계율을 제일로 하고 천태 진언을 겸수하여 내면적인 실천으로서 선을 행한 것이라고 본다.
日蓮은 天台沙門이라고 칭하듯이 천태종의 법계를 계승한 법화지상주의에 서서 법화경창제를 주장했으나 많은 박해를 받는 사이에 법화경의 행자라는 자신을 갖게 되어 자신이 영원한 석존으로부터 말법세상에 법화경을 알리도록 부여받은 上行보살의 재탄생이라고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제목중에 구원실성의 석종의 지혜 능력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제목을 창하면 그 불의 공덕의 종자가 중생에게 심어져 성불에 이를 수 있다고 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태본각사상에 의한 실천행법이라 할 수 있다.
2. 鎌倉불교의 창시자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가마꾸라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본불교는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절대모순을 자각하고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대로 가마꾸라시대에 와서 일본불교가 중국에서 답습하여 모방하는 불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시대와 상황 안에서 자기네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가마꾸라 신불교라는 새로운 신앙형태가 발생하는데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일본중세 불교 내에서 형성된 새로운 불교교리가 지닌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 안에서 싹트게 된 것이다.
1) 法然
鎌倉불교의 대표자로는 신란, 도겐, 日蓮을 들 수 있지만 이들이 창시한 것은 2차 신흥불교이고 그보다 선행된 1차 신흥불교로 大日能忍과 榮西의 선종과 法然源空의 정토종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종전의 불교신앙으로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이념을 지닌 불교사상을 세웠다. 그들의 교설은 널리 민중을 구제하려는 실천적 특징을 지녔고 믿음, 易行, 選擇專修 등 사상적으로도 공통기반을 지녔다.
그들 특히 선택전수라는 실천행을 제시한 것은 고대불교와는 다른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專修사상은 가마꾸라불교가 종파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띠게 만들었다. 專修사상은 간단하고 쉬운 신앙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이를 비난한 구불교계의 내부로도 점차적으로 흡수되면서 확산되어 가기에 이르렀다.
처음 신불교를 연 사람으로 정토종의 法然源空(1133-1212)을 들 수 있다. 法然은 천태종에서 공부했으나 그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정토종을 세웠다. 중국의 담란, 도작, 선도의 가르침은 계승하되 당시의 말법적 시대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독특한 정토교의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建久9년 (1198)에 <選擇本願念佛集>을 찬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의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켜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는 <選擇集>에서 ‘末法시대는 大聖(석가모니)이 떠난 지 오래되고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의 근기도 저열하다’고 설한 중국정토교가인 道綽의《安樂集》의 설을 이어받아 念佛一行이야말로 당시의 시기에 상응한다고 보고 念佛一行의 정토종을 주장한 것이다.
<選擇集> 全篇 요약문인 略選擇을 보면 “이 미궁세계를 떠나고자 하면 聖道門을 벗어나 정토문으로 들어가고, 정토문에서도 여러 雜行을 버리고 正行으로 들어가야 하며, 正行 중에서도 助業을 옆으로 두고 正定業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法然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法然이 五種正行 중 제4 稱名正行을 특히 正定業이라고 부르고, 다른 4개를 助業이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호넨은 正行 중에서도 칭명염불을 正定業이라고 하여 이를 선택전수염불로서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하는 칭명염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法然이 설한 칭명염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易行이었는데 法然은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를 제시해 주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연의 이러한 주장은 말법시대적 분위기에 놓인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聖道門의 수행에 의문을 품은 승려들 중 이를 새로운 해탈법으로 받아들여 정토종으로 전향하는 자도 많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자리잡게 된 호넨의 정토종은 근원적인 신앙을 모색하고자 한 중세불교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法然은 처음부터 타력전수염불을 설한 것은 아니다. 그는《選擇本願念佛集》을 선술한 66세전까지는 源信의 본각론적 염불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源信은 아미타의 3字 중에는 일체의 佛의 본질 능력 지혜가 포함하여 그 종자와 같은 것이 우리 마음에 내포하여 있으므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면 마음 내의 종자가 발아 成育해서 최후에는 佛의 경지에 이른다는 논법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원신의 본각론적 염불사상이 법연이 만년에 이르기 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본각사상으로부터 이탈할수 있었던 것은 선택집을 선술한지 14년이 지난 <一枚起請文>을 쓴 80세에 이르러서 였다.
그는 <一枚起請文>에서 전수염불은 당의 선도나 일본의 源信이 설한 관념의 염불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왕생극락을 위해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창하고 의심없이 왕생할 수 있도록 확신해서 창하는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선택집>을 선술할 당시만 해도 명호를 창하기 위한 마음과 그 行儀로서 중시했던 三心四修라는 조건이 <一枚起請文>를 작성했을 당시 法然에게는 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이다. 즉 아미타불의 3字 중에 佛의 일체의 능력 지혜 법문이 있어 그 절대성에 기대어 왕생을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一枚起請文>의 結文에 표현되어 있는 安心起行은 그의 타력염불에 자력적인 면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安心은 본원을 믿는 마음이고 起行은 칭명염불의 行을 말하는데 이 표현 속에는 염불을 행하는 주체라고 하는 자기라는 의식이 있어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타력염불이지만 자력적인 믿음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法然의 자력적 믿음단계로부터 한 발 나아가 자기라는 의식이 없어져 자타의 대립이 없어져 본원의 믿음만을 강조한 자가 바로 親鸞이다.
2. 親鸞
신란은 叡山의 本覺論的 정토교에 의심을 품고 그것과 결별한 후 建仁 元年 29세에 法然의 정토종으로 귀의했다. 거기서 그는 法然의 전수염불에 따라 雜行을 버리고 稱名正業에 정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자력의 근성이 소멸되지 않고 18년간이나 잔존해 있어 병중에 있을 때 經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까지 드러났다. 신란은 이를 반성하고 자력의 믿음을 버리고 法然의 경지에서부터 일보 더 나아가 철저한 타력 신앙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같이 신란은 法然의 정토종을 이어받으면서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타력신앙을 중심으로 한 淨土眞宗을 창시했다.
신란이 호넨에게서 나와 독자적인 사상을 펼치게 된 것은 그의 인간관과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신란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은 깊은 죄악의 바다에 빠져 있어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깨달음을 위한 마음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력으로 구원에 나아갈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관을 지닌 그는 法然의 타력염불행에도 자력적인 요소가 남아있다고 보고 진정한 정토왕생은 佛行에 의해서가 아니라 信心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이와같이 신심을 중시한 신란은 아미타불의 48원 중 18원을 정토왕생의 조건인 염불행으로 해석한 法然과는 달리 이를 信心行으로 보았다. 또한 신란은 그 신심마져도 중생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로부터 회향된 것이라고 말한다. 중생은 깊은 죄악에 빠져있으므로 스스로 신심을 낼 수 없으며 설사 신심을 낸다하더라도 그러한 신심으로는 자신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신란의 견해이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신심마져도 아미타불로부터 거져 주어진 선물이라는 신심회향설을 낳게 했고 우리의 구제는 ‘오로지 아미타불의 本願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절대적 신앙의 세계를 펼치게 했다.
우리를 구제할 만큼의 금강석과 같은 견고한 신심은 인간 스스로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서 廻向된 것이라고 본 신란의 신심에 대한 관점은 法然의 그것과 분명 차이를 보이고 있다. 法然은 <選擇集> 結文에서 安心起行이라고 하여 安心과 起行을 병렬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法然은 安心을 본원을 믿는 마음이라고 보고, 起行을 칭명염불의 行이라고 말하는데, 이와같이 本願을 믿는 安心에서 稱名念佛을 행할 때에는 자기가 염불을 행하는 주체라는 의식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法然이 말한 칭명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타력염불이지만 스스로 염불을 행한다는 점에서 자력적 믿음의 단계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란은 이러한 자력의 믿음단계로부터 아미타불로부터 회향된 신심에 대한 신앙으로 나아간다. 이와같이 신란사상은 인간의 자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함께 아미타불의 本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바탕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아미타불에 의한 철저한 믿음은 왕생사상에 서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즉 그것은 아미타불로부터 신심을 부여받을 때 이미 왕생이 확고하게 결정된다-이를 正定聚不退位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란은 信心의 확정과 함께 구원이 주어진다고 봄으로써 전통적 정토신앙이 지닌 미래지향적 구원론에 종지부를 찍었고, 현세적 구원관을 펼치게 된 것이다.
신란의 현세적 구원관은 왕생즉성불설을 낳게 되었다. 曇鸞의 <淨土論註>에서 설하듯이 일반적으로 정토교에서는 극락정토에 태어나서 거기서 “비파사나(觀함)의 방편력”을 성취해서 비로소 佛이 되는 정토왕생 후 성불을 말한다. 그러나 신란은 범부도 往相回向의 心行을 획득하면 “즉시 大乘正定聚에 들어가고 正定聚에서 살기 때문에 반드시 得道에 이른다”(敎行信證 證권)고 현세성불설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왕생과 성불을 이원적으로 설한 것이지만 <淨土和讚>와 <正像末淨土和讚> <末燈鈔> <御消息集> 등에서는 왕생즉성불사상이 나온다.
학자들은 이를 如來同等說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겉으로 볼 때에 천태본각사상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란의 왕생즉성불은 천태본각사상에서 말하는 중생즉불사상과 무관한 것이다. 신란의 경우는 인간의 철저한 죄악성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왕생, 성불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같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기초한 신란의 왕생즉성불사상은 중생과 불사이에 건너기 힘든 현실적인 감각이 있으나 천태본각사상에는 이러한 현실적인 심각성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양자 간에는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法然과 신란사상은 처음에 '비예산'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延曆寺와 興福寺 등 구불교 측의 비난과 박해를 받게 되었으나 민중사이에는 점점 퍼져갔다.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開宗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호넨과 신란을 중심으로 한 신불교운동은 당시까지 주술적 현세신앙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불교를 신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서 자신들의 신앙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종파에서도 일어났으니 日蓮도 그 중 한 사람이다.
3. 日蓮(1222-1282)
'가마꾸라'시대 새로운 불교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에 의한 니치렌종(日連宗)의 開敎다. 日蓮도 다른 종파의 개창자들처럼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공부했으나,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법화경》하나만을 의지하는 것을 종지(宗指)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미 천태종에서도 법화경을 부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선이나 진언 등 다른 종파를 배제하지는 않았는데 반해, 니찌렌은 다른 모든 수행과 가르침을 배격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사변과 논리로서가 아니라 법화경 신앙을 실천하고 체득할 것을 요구한 니치렌의 주장은 호오넨과 신란이 오로지 염불만을 행할 것을 요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종교관으로, 가마꾸라시대 불교의 신앙성과 순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니치렌도 다른 가마꾸라 개창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법사상을 들고 나왔다. 니치렌은 『법화경』이야말로 완벽한 것이며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러한 <법화경>이 말법시기에 가장 상응하는 경전으로 보았고 따라서 당시 말법시대에는『법화경』을 통한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녔던 것이다. 日蓮의『법화경』에 대한 가르침의 내용은 『삼대비법(三大秘法)』에 포함되어 있다. 삼대비법은 본존(本尊 또는 御本尊), 제목(題目), 계단(戒壇)을 말한다. 그 중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화경 창제이다. 그는 단순한 가르침을 원하는 말법시대 사람들에게 법화경의 진리를 알려주는 방법으로 법화경 창제를 주장했다.
이는 법화경의 제목인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日蓮의 법화경 창제는 다른 신불교의 창시자들과 같이 말법사상에 기초한 選擇專修사상이라 볼 수 있다. 日蓮은 법화경이 석존의 최후 8년간 설한 최후의 경전이며, 법화경의 핵심은 본문수량품에 있는 妙法蓮華經의 제목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妙法蓮華經의 5자 중에 전불교를 통합 집약하고자 한 것이다.
지의의 주석에 의하면 종자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듯이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