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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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 연구

니시타니의 도겐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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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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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사상2>


(1) 지관타좌


1) 도겐의 문제의식-본각과 시각(시간과 영원, 개별과 보편, 인간과 신, 불)

2) 지관타좌 (자수용삼매, 자타불이, 불향상의 입장)

3) 신심탈락과 탈락신심( 자타불이와 보살, 발무상심과 발보리심)


(2) 현성공안


1) 현성의 의미

2) 미궁과 깨달음

3) 자기와 만법

(3) 불성


(개요)


(1) 지관타좌


도겐이 지닌 문제의식은 “우리가 본래 천연자성신이라면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라는 修證의 문제였다. 니시타니는 도겐이 지닌 의문이 단순히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전체, 그리스도교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곧 불교에서는 본각과 시각의 문제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의 절대성과 신앙인의 신앙, 구체행위의 관계의 문제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본각이 필연적으로 주어졌다면 왜 수행해야 하는가? 신이 절대적 존재라면 왜 신앙행위가 필요한가? 석가는 왜 발심하고 성불하고 수행하며 開悟라든가 證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이는 시간적 현실의 존재와 초시간적 영원간의 문제로써 인간과 신, 인간과 佛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니시타니는 도겐이 이 문제를 지관타좌로서 해결했다고 본다. 지관타좌는 한 사람이 좌선할 때 거기서 절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한 사람이 일정한 때에 일정장소에 앉아 있다는 그 사실을 대신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지관타좌는 절대라는 것이다. 이 절대의 세계에서는 자기의 대한 상대적 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신심이 탈락되어 자기가 전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와 타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세계 곧 자타불이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 사람이 앉아있다’는 그 절대적 사실 안에 세계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좌선하는 사람에 대해서 제불과 사물이 도와 준다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앉아있음을 통해 좌선인이 제불의 세계와 사사물물의 세계에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일시에 앉아있음으로써 전체에 울림을 준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전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전체와의 연관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한히 동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22, 203)


이상에서 살펴본 지관타좌의 문제는 제불의 문제와 중생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좌선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타좌는 바로 신심탈락으로 마음과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곧 무아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일시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대신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관타좌는 절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관타좌하는 좌선인에게 있어 自는 自他의 상대적 自가 아니라 상대를 뛰어넘는 절대의 自의 의미이다. 이를 도겐은 자수용삼매라고 한다.


앞서 말한 절대는 바로 자수용삼매의 自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절대의 세계이기에 자타상대가 없다. 즉 자신에 대한 他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기는 전체라고 해도 좋다. 佛인 他는 없는 것이다. 신심탈락이라는 형으로 좌선할 때는 ‘절대’이다. 대립하는 타자는 없다. 타자가 있다면 그 타자도 ‘자기’ 안의 입장인 것이다. 이와같이 도겐의 지관타좌는 바로 신심탈락이며 자수용삼매인 것이다. (22, 216) 그런데 여기서 자타불이로서의 발무상심과 보살도로서의 발보리심은 어떤 관계인가?이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2) 현성공안


현성공안의 현성이란 제법실상의 현성이 공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은 한 사람이 일시에 하는 좌선이라는 실존적 현실을 강조한다. 그 실존적 입장에서 “제법실상이 그대로 공안”이라는 현성공안이 명확히 나온다는 것이다. “제법의 불법이 되는 시절, 즉 迷悟가 있고 수행이 있으며, 삶과 죽음이 있고 제불과 중생이 있다. ”(23, 20)


불교의 기본입장은 공이고 무아이다. 이는 초월의 세계이며 절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적 현실에는 애증과 번뇌, 생멸유전하는 苦의 세계가 있다. 불도에는 애증이 없지만, 현실에는 꽃이 지면 슬프고 풀이 생기면 싫은 현실의 자기가 있다. 꽃이 지고 풀이 생기는 장이 바로 애증이 있는 현실의 장인 것이다. 애증과 번뇌가 있는 곳에는 꽃이 피고 지며,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미워한다.


불도에는 신체도 마음도 없다고 하지만 역시 눈내리는 날이면 추위를 느낀다. 도겐은 애증과 번뇌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그대로 현성으로 본다. 즉 애증도, 번뇌도 큰 깨달음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미궁도, 깨달음과 함께 큰 깨달음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미궁도 있고, 깨달음도 있으며, 미궁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行道도 있으나, 그 모두가 큰 깨달음 안에서의 미궁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불도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고,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며, 자기를 잊는 것은 만법이 증험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깨달음은 자기가 활동하는 것을 멈추는 것, 그만 두는 것이라고 도겐은 말한다. 미궁의 주체가 자기라면, 깨달음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만법인 것이다. 이와같이 깨달음에서는 이러한 존재방식의 실존적 전환이 일어난다. 바오로가 말했듯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 


도겐이 말한 미궁과 깨달음의 관계는 자기와 만법의 관계이다. 미궁과 깨달음은 만법과 자기와의 관계의 존재방식으로 규정된다. 만법과 자기와의 관계의 修證에서 자기를 움직여서 만법을 수증할 때 그것은 미궁이며, 만법 스스로 자기를 수증할 때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자기가 움직이는 것에서 만법이 움직이는 것에로 전환이다.(수동적 영성) 즉 거기에는 방향의 역전이 있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를 움직이는 자기의 활동에서 ‘만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만법이 스스로 활동함을 의미한다.(불의 활동, 성령의 활동) 그렇게 깨달음이란 방향의 역전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 자기의 본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이를 퇴보라고 할 수 있다.) 만법에 증한다고 하는 것 즉 만법의 활동에 의해 미궁에서 깨달음에로 전환되는 것이다.


‘미궁에서 깨달음에로’라는 것이 ‘깨달음에 의해서’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모르나 절대적인 전환은 그같이 일어나며 생기한다. 깨달음은 “자기가 깨닫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것에 의해서 즉 불도 위에서는 자기를 잊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것에 의해서 “불도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불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자기의 존재방식이 된다.


호수에 떠 있는 달을 상상해 볼 때 달은 어디까지 달이고 물은 어디까지 물이다. 이 인과의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현성의 의미이다. 현성공안의 현성은 그 때 그곳에서 현실의 것으로서 드러난다는 점, 공안을 현성한다는 것은 그 때 그때의 인간의 행이라는 점, 천상의 달이 물에 머문다는 것, 그 인간의 진무가 동시에 현성공안한다는 것이다. (23, 91) <현성공안>에서 유명한 말인 “불도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잊는 것이 만법을 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바오로가 말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때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하고, 그리스도가 바오로를 생명으로 한다.  바오로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현성공안해 있다.(23, 103)


아우구스팅은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신의 은총이다. 신에 이르지 않으면 본래의 쉼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신이 나를 신자신을 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23 53)


매화꽃이 피어남도 법의 활동이고, 불의 활동이며 신의 활동이다. 바오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이며 아우구스팅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인 것이다. 물고기는 물을, 새는 하늘을 떠날 수 없다. 물고기에게 물은 생명이다. 물고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물과의 연관성을 떠나선 생각할 수 없다. 물고기도, 새도 옛부터 물과 하늘(무한의 세계)을 떠나지 않는다. 물고기는 물이 생명이다. 물고기가 살아간다는 것에는 처음부터 물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은 끝없는 것이어도 물의 존재가 물고기 존재안에 들어있다.


그렇게 말하지만 물고기에 ‘邊際가 없는’ 것은 아니다. 邊際가 없는 물전체가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큰 경우에는 크고, 작은 경우에는 작다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다. 메다가의 경우는 작게 움직이고, 큰 물고기에는 크게 움직이는 구별은 있다. 그러나 ‘물과 물고기’라는 관계로부터 보면 어느 물고기 안에도 살아있는 물이라는 전체가 들어있다. 물만이 아니라 바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風性常住라고 말한다. (23, 93)


새와 하늘, 물고기와 물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무한한 것만이 아니다. 유한한 현실의 활동도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영원의 생명’이라는 것이 성령이라고 보는데 본래 그리스도교 신도의 입장은 성령을 지님으로써 이를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고기로 말하면 물이 생명이며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말하면 성령이 생명이다. 물고기와 물의 경우에서처럼 자신이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다. 성령이 자신의 생명이며, 예수가 자신의 생명인 것이다.(23.96)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입장에선 사람에게 있어선 성령이 자신의 생명이다. 이것은 인간의 측면이다. 성령의 측에서 보면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성령이 그 사람으로서 그 세계 안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성령의 입장에서 말하면 사람을 성령자신으로 한다고 해도 좋다. 영원한 생명이 현실에 움직이고 그것이 사람에게 드러난다. 그 사람이 거기서 현성하는 것이 성령이며 그리스도이다.


신의 생명이 사람이 된 것이 그리스도이다. 신도는 자기자신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은 영원의 생명이라는 입장으로부터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상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말한 곳이 성령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없다면 성령도 살아있는 형으로 드러날 수 없다.


“생명으로서 물고기가 되고 생명으로서 새가 되는 것이다” 생명이 새이고, 물고기이다. 성령을 지님으로써 신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지니고 자신의 생명이라는 곳에서 성령을 지니고 자신이 되는 것이다. 새로서 생명이라는 것, 물고기로서 생명인 것이다. 그런 입장이 생명을 지니고 새와 물고기라고 하는 것이다.(23, 97)


(3) 불성


1) 불성의 의미


니시타니는 <열반경>에 나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해석에서 도겐의 불성사상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즉 일반적으로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도겐은 이를 ‘일체중생, 존재하는 모든 것(만유)은 불성이다’라고 풀이한다. 즉 불성이 중생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자체가 불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겐의 생각은 불성은 상주하는 어떤 것, 불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도겐의 불성해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실유가 불성이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곳의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도겐이 강조한 “什麽物恁麽來 즉 무엇이 이같이 온 것인가?”에서 잘 드러난다. 즉 도겐이 말한 불성은 단순한 4大의 활동이 아니라, 一兩의 佛面祖面이라는 것이다. 불성에서 불의 얼굴, 조사의 얼굴이 드러나며, 불조의 혼이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23 179) 불과 여래는 대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什麽物恁麽來라는 것이다. 즉 ‘실유는 불성이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什麽物恁麽來(무엇이 이같이 해서 온 것인가?)”라는 것이다.(23, 129)


본래의 깨달음은 미궁을 넘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궁이 있고 깨달음이 일어나는 그 전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궁에서 벗어난 깨달음도 물론 있지만, 그것을 평면적으로 취하게 되면 噓가 된다. 즉 과정적으로 미궁과 깨달음을 구별해서 말해선 안된다. 본래의 깨달음은 미궁을 포함하여 전체로서의 깨달음을 본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미궁으로부터 깨달음에로’라는 미궁과 깨달음의 상대적 이원론을 초월한 절대적인 곳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궁으로부터 깨달음에로’라는 것도 본래 깨달음은 원래로 돌아가는 것, 미궁도 있는 그런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23,223)


불교의 긴 역사안에서 연기의 세계가 계속되었지만 도겐의 行持道環처럼 몸에 다가가서 몸에 침투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수행은 한없이 길을 걷는다는 면이 있다. 한없는 수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證上의 깨달음이다. 證이지만 修를 떠나지 않는 證이다. 도겐의 경우 그것은 지관타좌로써 드러난다. 타좌는 수행의 자세이며 앉는다는 것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다. 깨닫기 위한 길이다. 도겐의 경우 수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증이다.204


2) <무불성;無常佛性>


인간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불성이 인간 안에 본구한다는 것은 인간도, 불성도 대상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도겐은 ‘실유는 불성이다’라는 지금 현전하는 그 당체의 입장, 거기서 불성을 묻고 있다. 이것은 이론적인 명제로 파악되는 것과 다르다. 여기에 무불성의 의미가 있다. 즉 무불성은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은 자신에게서 구명되는 것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자신을 묻기에 요구되는 답도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묻는 자도, 물어지는 자도 자신의 존재전체를 묻고 답한다. 불성론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적으로 살아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교의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 구체적인 인간을 묻는다.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존재자체를 묻는다. 따라서 답도 단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선의 큰 특색이다. 276 그런 문제를 파악하는 근본입장이 바로 什麽物恁麽來인 것이다. 23, 285


3) <불성은 시절인연이다;佛性時節因緣觀>


앞서 말했듯이 도겐이 말하고자 한 불성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소유의 의미가 아니다. 實有자체가 불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칫하면 實有가 불성이라고 할 때 이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 도겐은 이것을 막기 위해서 時節因緣을 말한다. 즉 불성과 時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時 없이는 불성이 없고, 불성없이는 時가 없다. 불성과 時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이다. 이런 시간과 존재의 상관관계 안에서 약동하는 살아있는 불성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도겐의 불성론의 특색이다. 


불성을 알려면 시절인연을 잘 보아야 한다. 현실의 지금을 떠나지 않고 그것을 잘 보는 것에서, 시절에 이르면 불성은 현전한다.23, 203 이런 의미에서 도겐의 불성은 단순히 아는 것(知)가 아니라 行, 證, 說, 忘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도겐은 ‘시절인연’으로 설명한다.(23, 191)


시절인연은 무슨 뜻인가? 시절과 불성현전이 결부되어 생각된다는 것이다. 도겐은 이를 時와 有의 문제로 본다. 時라는 바로 그 순간, 그 때의 유, 거기에 현전하는 것이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다.(23, 244) 이는 도겐의 다른 말로 ‘正當恁麽時’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선 안된다. (23 234) ‘현재 여기에’라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正當恁麽時, 현전하는 그 때 그것이 중요하다. 正當恁麽時를 떠나면 과거의 것이 되고 미래의 것이 되거나, 현재라고 말해도 현전이라는 것을 떠나면 관념적인 것이 되거나 이미지가 되기 때문이다. 23, 295(여기서 우리는 니시타니가 ‘정의로서의 공’에서 말한 이미지마져도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니시타니는 도겐의 사상을 접하면서 자신의 사상에서 크게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보다 깊은 종교적 차원으로의 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23, 309


시절인연이란 불성이 우주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상황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이다. 불성의 의미를 알려면 시절인연을 잘 봐야 한다. “시절에 이르면 불성이 현전한다.” 시간이 무르익으면 불성이 자연히 나온다. 불성의 현전은 시절인연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를, 종교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23, 309


도겐은 ‘현재 지금 여기서’를 문제삼는다.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이 무상이며, 무상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본래의 면목 자체가 무상인 것이다. 무상으로부터 무상을 설착, 행착, 증착함은 모두 무상이 된다. 모두가 무상이기에 實有無常이다. 무상이 무상을 설하는 곳에 자신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23, 315


聖은 깨달은 입장, 열반의 입장이고, 凡은 常의 입장이지만, 聖과 凡의 본질은 모두 無常이다. 무상은 聖과 凡의 이원론을 탈각함을 의미한다. 常聖쪽에서 생각하면 그것은 佛이며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것이며, 다른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常은 일체제법, 모든 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분별하는 마음이다. 무상은 이러한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다. 무상을 하나의 관념으로 생각하게 되면 참된 무상이 아니다. 常聖이 무상이 되고, 常凡이 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3, 316


도겐이 비예산에서 수행생활을 하면서 지녔던 의문은 “만일 本來本法性 天然自性身이라면 수행은 왜 필요한가”하는 것이었다. 즉 “여래 스스로 법신청정하다면 제법이 왜 다시 발심해서 삼보리도를 수행하는가? 삼세의 제불, 지금까지의 모든 불상이 수행해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의문이다.


도겐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해주고 있다. 즉 보통 우리는 수행을 하여 깨닫음을 얻는다. 즉 行을 통해 證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겐은 우리가 본래 자연자성신이라면 굳이 수행을 해서 증할 필요가 있는가? 왜 삼세의 제불은 처음부터 불이 아니라 수행해서 불이 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도겐은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삼정사의 공봉승사를 방문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납득할 수 없었기에 건인사의 明全(榮西의 후계자)에게 갔다. 明全의 “三世諸佛不知有, 狸奴白고却知有”라는 말에 도겐은 선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자신의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天童山의 如淨선사를 만난다. 도겐이 승당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수행중의 어느 스님이 졸자, 如淨이 노하여 “참선은 신심탈락하여 ....”라고 꾸짖는 것을 듣고 도겐은 大悟하게 된다.(질타시탈락)


니시타니는 도겐이 지닌 의문이 단순히 도겐 개인의 의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전체,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곧 불교에서는 본각과 시각의 문제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의 절대성과 신앙인의 신앙, 구체행위의 관계의 문제이다. 본각이 필연적으로 주어졌다면 왜 수행해야 하는가 신이 절대적 존재라면 왜 신앙행위가 필요한가? 석가는 왜 발심하고 성불하고 수행하며 개오라든가 증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이는 시간적 현실의 존재와 초시간적 영원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니시타니는 본각을 절대의 입장으로 보고 이에 비해 시각을 무언가 도를 구하는 상대의 입장으로 본다. 본각이 주어져 있다면, 천연자성신이 주어져 있다면, 절대의 세계가 이미 주어졌다면 왜 시각의 입장에서의 수행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문제1. 도겐에 있어서 신심탈락과 탈락신심의 의미


문제 2. 도겐의 身心의 의미-신심탈락에선 부정적으로, 그러나 탈락신심에서는 긍정적으로 사용(<身心學道>참조. 도겐은 몸을 통한 수행을 강조, 도겐의 불성을 몸이 아닌가?


<75본의 발무상심과 12본의 발보리심의 비교>


1) 발무상심


<진리의 체현자 도겐> :<<불교の 근저にありもの>>참조


157 미궁의 측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하면 158 그럼 무상에 철저해 자신을 떠나서 어떻게 되는가? 우리를 떠난 그 자체가 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상에 철저함이 불도의 시작이라면 佛을 수용함은 목표의 달성이라고 해도 좋다. 이렇게 보면 나는 떠나서 佛을 수용함으로 만사가 종료되며 그 외 복잡한 이론은 필요없다.


이렇게 간단하나 실제로 반드시 그렇지 않다. 나를 떠나는 것은 자신의 버리는 것이며 신심을 방하하는 것이다. 불도는 신심을 방하해서 불의 大海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럼 실제로 자신을 버리는 것은 방법은 있는가? 그것을 도겐은 지관타좌라고 한다. 다만 좌선해서 자기의 전체를 버리고 일환이 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나를 버리고 신심을 방하해서 불의 대해에 들어간다. 도에는 좌선이외 없다. 좌선을 통해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지관타좌이다.


<진리의 체현자, 도겐>-<도겐집>, 日本의 사상, 제2권 玉城康四郞,笵摩書房,1970


11

12 여기서 도겐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곧 무상을 관하는  것이다.  무상에 철저하여 자기를 떠나서 불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지관타좌를 한다 16 이로서 자수용삼매에 들어간다. 이는 자기가 삼매를 감수하면서 한없이 자기를 초월한 삼매이다.


2)발보리심


<참조 ‘도겐의 악’ 五城康四郞 <도겐사상대계> 20권의 19쪽부터 발보리심의 변천참조. 거기에 보면 도겐에 있어 보리심에 대한 견해에 변화를 볼 수 있다. 첫째 는 학도용심집(35세)에선 무상을 관함에 의해서 자기주체의 마음도, 명리의 마음도 생기지 않는 것을 보리심이라 하며, 둘째 41세때 <溪聲山色>에서는 일체중생과 함게 보리심을 일으켜 정법을 듣고자 하는 원이 강조된다.


셋째 41세때의 <袈裟功德>에서는 보리심을 佛祖正傳의 가사에 관해서 말한다. 즉 발심자는 가사를 정ㅈㄴ함에 있어 불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있다. 넷째는 43세 9월9일의 說示로 <身心學道>에서 “感應道交해서 보리심을 일으킨 후 불조의 大道에 귀의하여 발보리심의 行李를 배우게 된다” 고 한다.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보리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시점에서 보리를 향해 마음을 발하는 경우와 모두 실현된 것이야말로 보리심을 발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후자로서 감응도교는 주체자에게 보리가 드러난 것이다. 불조의 대동 귀의한다고 할 때 일상생활자체가 발보리심의 학습이 되어 이쓴 것이다.


변도화의 修證一等도 이 보리심과 연관된다. 이는 여정에 의해 신심탈락된 후 도겐의 마음밑에 정착된 견해이다. 따라서 그 보리심은 어디까지 변천이 아니라 그자신의 보리심의 일관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45세2월 14일 說示의 發無上心 에서는 “八萬法蘊의 인연에서 발심한다” 고 한다. 八萬法蘊은 모든생활에서 만나는 것에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리이타의 구별이 없고 그 의식도 없다. 만나는 것 모두에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45세 2월 14일 <발보리심>을 보면 “자리독도선도타”라고 하여 남은 먼저 건넨다는 것이 보리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감응도교하는 자신은 중생을 먼저 건넨다고 발한 자기이다. 여기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라고 도겐이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는 자기가 먼저 해탈한 다음 남을 해탈하도록 돕는다는 생각이 바로 악이며 외도설임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중생을 거부하는 것은 본래의 발심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이 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발무상심에서 말한 자리이타의 구별이 없다는 발무상심을 말하는 같은 날, 이를 잘못 오해하는 이 곧 자기의 해탈이 곧 남의 해탈이라는 합리화를 갖고 자기해탈만을 위해 힘쓰는 이에 대해서 발보리심을 통해서 남을 먼저라는 것을 설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발무상심과 발보리심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도겐이 수행자의 마음 깊이에 있는 악의 측면 즉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려주는 메시지가 남겨있다고 본다. 자리이타라는 말 속에 잘못 오해할 수 있는 부분 곧 자기가 깨닫는 것이 곧 남이 깨닫는 것이라는 논리 속에 빠지기 쉬운 측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남의 구원을 먼저’라는 보다 적극적인 실천적인 측면이 있을 때 깨닫게 되는 진리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발무상심과 발보리심의 관계; 보리심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 無上으로서 최고의 지혜를 지니는 것, 그 최고 무상의지혜를 지니는 것이므로 常樂我淨의 4덕을 구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의 대열반이다. 이같이 보살은 다만 하나의 일을 수호하는 것이 좋다. (도겐 발보리심참조) >


니시타니는 <공과 즉>의 논문에서 불교의 대해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일한 입구는 발심이라고 한다. (강좌 불교사상 61사사무애와 信의 관계)


도겐이 처음 지녔던 의문은 “도겐은 인생에서의 근본적인 의문을 묻는다. 즉 “본래본법성 천연자성신 각자가 본래 묘법을 지니고 있다면 왜 수행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이는 본각과 시각과의 관계에 관한 의문이었다. 본래본법성, 천연자성신은 인간의 구족의 본심본성이나 이것은 어딘가 본성이나 법신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래 본각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입장이며 시각은 상대의 세계에서 절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구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도겐은 나자신이 절대를 갖추고 있다면 왜 수행이 필요한가? 라는 대의단을 지닌 것이다. 도겐은 이 대의단에서 신심탈락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의문을 벗기게 된다. 그럼 그가 말한 신심탈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힘을 써서 즉 자기 힘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획득하려는 그런 자아를 벗어내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신심을 벗어남 즉 탈락시킴이다. 證은 자기 힘으로 수행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완전히 뺄 때 자기중심을 벗어날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교를 자력종교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교를 타력종교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은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길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버림에서 출발한다.깨달음의 출발점인 발보리심에서 우리는 이를 잘 볼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에서 발보리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심은 처음 自未得度先度也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이것은 즉 자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남을 먼저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깨달음의 첫단계인 발보리심이라는 것이다. 도겐의 발보리심은 자기를 구하기에 앞서 타인을 구한다는 것이다. 구원에서 자기는 최후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이 구해지는 것이 곧 자기를 구하는 길이다. 구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자기의 구원은 없다.


아미타불의 본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악인이 구해지지 않는 한 자신은 불이 되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신란은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이 죄업깊은 자신 한사람을 위해서 드러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 사람 즉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업깊은 자기를 위해서 아미타불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란에게 있어 죄업깊은 한 사람인 자기를 위해 아미타불이 드러남에 비해서 도겐은 한사람이 일시에 좌선함을 통해서 절대의 세계로 들어감을 강조한다. 그럼 도겐에게 있어 ‘한사람이 일시에’ 하는 좌선에 대해서 살펴보자.


3. 지관타좌


우에다는 이시이가 도겐선을 ‘좌선의 불교인가, 지혜의불교인가’라고 묻는 것자쳉 도겐의 좌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핵심이 숨어있다고 본다. 도겐의 지관타좌는 지혜를 떠난 좌선이 아니라지혜와 좌선의 양자를 지간타좌속에 역동적으로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지혜는 좟ㄴ에서 나온 지혜이며 좌선은 그로부터 지혜가 활동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에다 대승불전 210)사실 조동종의 현실 속에서 지혜가 상실된 선정주의에 빠져버린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겐의 지관타좌를 단순한 선정으로만 이해함은 도겐선을 가장 왜곡되게 하는 해석이다. 지관타좌는 단지 좌선이 아니라 신심탈락으로서의 좌선이다. 이시이는 75권본의 지관타좌를 12권본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返本還源의 좌선, 지관타좌의 좌선으로부터 자기가 무상이며 무아임을 관하는 좌선에로 전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명의 자각은 무명을 하나 하나 제거하게 되면 고를 반드시 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자기의 업의 깊이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에다는 무명을 하나하나 제거함은 자력행으로 가능한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자기의 업의 깊이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묻는다.(우에다 대승불전 243)


만일 도겐이 무명의 자각은 자기의 업의 깊이를 철저히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 도겐은 신란이 되지 않은 것인가라고 묻는다.


245 업의 자각에 있어 신란의 경우의 기의 신심과 連動하는 법의 深信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반야존중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야는 비사량의 지혜가 아니라 지성이며 그것은 연기를 아는 지혜이며 인과를 믿는 것으로 “인과를 깊이 믿으면 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혜라면 그것은 업의 자각에 인도된 지혜 혹은 업의 자각이라는 지혜이어서 신란에 있어 법의 심신에 해당되지 않는다. 법의 深信은 업의 자각에 침투해서 업의 자각을 깊게 해서 역대응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신란의 업의 자각은 자기를 깨달을 수없다는 절망이지만 이시이가 말한 업의 자각은 깨달음에로의 타자비판의 언어를 격정적으로 하는 한편, 자기의 업의 깊이를 아는 것으로부터 구원을 구하는 절실이 없다는 것이다 246 “그것에 의해서 자기의 오만을 확실히 알고 자기의 생각에 대한 강한 반성으로 타인에 대한 겸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덕이며 요청이다.


도겐의 사상은 한마디로 신심탈락이라고 한다.여기서의 신심의 의미는 자기를 의미한다. (현성공안에서 신심의 색과 음성의 비유참조) 즉 신심을 탈락한다는 것은자기를 잊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럼 어떻게 자기를 잊을 수 있는가?에ㅣ서 도겐은 그 방법으로 지관타좌를 말한다. ‘수증이란 자기를 움직여 만법을 수증하는 것은 미궁이다. 자기를 잊는 것이다. ’


<정법안장>의 사상에서 지관타좌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즉 오로지 앉아있는 것이 도겐의 종교적 근본정신이며 그의 독특한 가풍이다. 지관타좌는 한사람이 좌선함으로써 절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정한 때에 일정장소에 앉아 있다. 그 사실을 대신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이다. 이 절대의 세계에서는 자기의 대한 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신심이 탈락되어 자기가 전체가 되는 것이다. 자와 타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세계, 자타불이의 세계이다.


‘한 사람이 앉아있다’는 그 절대적 사실 안에 세계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좌선하는 사람에 대해서 제불과 사물이 도와 준다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앉아있음을 통해 좌선인이 제불의 세계와 사사물물의 세계에 울림을 준다. (울림을 준다는 것은 그 전에 제불여래를 즐긴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것에도 있다.) 일시에 앉아있다는 것은 전체에 대해서 울림을 준다. 역으로 말하면 전체로부터 영향을 주어 전체와 연관중에 성립한다. 그것이 무한히 동적으로 전개된다. 사물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기초가 된다.”(22, 203)


즉 지관타좌 안에 제불의 문제와 중생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좌선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타좌는 신심탈락으로 마음과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 즉 무아이다. 어떤 사람이 일시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대신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관타좌는 절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관타좌하는 좌선인에게 있어 自는 自他의 상대적 自가 아니라 상대를 뛰어넘는 절대의 自의 의미이다. 이를 자수용삼매라고 한다. 앞서 말한 절대는 바로 자수용삼매의 自의 의미이다.


절대의 세계이기에 자타상대는 없다. 즉 자신에 대한 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전체라고 해도 좋다. 불인 타는 없다. 신심탈락이라는 형으로 좌선할 때는 ‘절대’이다. 대립하는 타자가 없다. 타자가 있을 때 그 타자도 ‘자기’안이라는 입장이다. 도겐의 입장은 한 사람이 일시에 좌선하는 것은 바로 신심탈락, 자수용삼매이다. (22, 216)


4. 자수용삼매


니시타니는 자수용삼매가 정법안장 전체의 기본적 입장이며 선전체 불교전체의기본적 입장이라고 말한다.(22, 93) 그럼 절대세계인 자수용삼매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자수용은 自受用은 자신이 자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코끼리가 자기 코의 물로 자신의 몸을 씻는 것과 같다. 인간이 참 자신을 안다는 것에 광대한 우주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 앎 중에는 우주전체를 밑으로부터 비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 빛은 바늘구멍과 같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바늘 구멍을 넓히면 自는 우주가 되는 것이다. (22, 94)


단좌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자수용삼매에서 유화하는 것이라고 니시타니는 말한다. (22, 119) 즉 자수용삼매는 자신이 자신 안에서 즐긴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유화삼매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삼매 속에서 노는 것이 단좌참선이다. 즉 단좌참선은 단지 삼매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라 단좌참선 자체가 자수용삼매라는 것이다. (22, 119)


자수용삼매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어서 자신이 자신의 것을 사용하여 수용한다는 입장, 불로부터 불에 전해진다는 입장이다. 22, 143) 이와같이 자수용삼매는 불의 측에서 본 관점인데 이를 중생측에서 보게 되면 타수용이 된다. “만물이 모두 佛身을 사용하며”라는 것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이다. “覺樹王에 端坐”는 소나무는 소나무, 竹은 竹으로 覺樹王에 앉는다.”(22, 156)


自가 절대의 自라는 것이 佛身이라는 의미를 지녔다면 우리는 佛身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즉 소나무는 소나무이고 죽은 죽이며 나는 나이다. 자수용 즉 진여의 입장에서 불이 불자신을 수취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중생측에서 보면 소나무는 소나무이며 대나무가 대나무로서 살아가는 그 장을 떠나지 않는다. 사물이 있다는 것은 佛身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佛身을 사용하는 것은 중생측에서 말하면 타수용삼매이며, 타수용삼매를 불자신의 측에서부터 말하면 동시에 그것이 자수용삼매인 것이다. 결국 佛身을 사용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이 내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수용삼매인 것이다. 니시타니는 지관타좌를 통해 들어간 절대의 세계 즉 자수용삼매의 세계는 살아있는 불이 활동하는 세계, 佛의 장이라고 말한다. 니시타니는 이를 불향상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5. 불향상의 입장


자수용삼매는 앞서 말했듯이 통상 말하는 자력이나 타력의 의미가 아니라 이 세게는 자타라는 상대의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전개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는 자력이 아니며 그렇다고 타력도 아니다. 이 세계는 영원한 불이 있어 거기에 귀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다시 한번 향상하는 세계이다. 이 또 한번의 향상의세계가 바로 불향상의 세계이다. 여기서 비로소 살아있는 불이 활동한다. 인간의 현실 안에서 지금 내가 앉아있는 그 곳에서 불의 활동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떠나게 되면 불의 활동은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불향상의 입장은 단불, 영원한 불을 다시 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향상의 세계는 임제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그 세계이다. 현실을 떠난 고정된 존재, 영원의 존재를 뛰어넘는 활발발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고 말한 그것마져도 넘어서 그 입장을 뛰어넘어 살아있는 불의 입장인 것이다. 지금 여기 활발발로 살아있는 세계이다. 불향상의 입장은 이와같이 살아있는 불의 길 그때 그때의 살아있는 인간을 강조한다. 불을 만나면 불을 죽인다는 그 의미를 이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佛向上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에서 불향상의 기가 살아 활동하며 그것이 불사를 助發하고 佛의 일을 도와 전개하는 것이다.(22,194)


바로 그 세계가 바오로가 말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同修同證의 세계이다. 현재의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 불향상의 세계인 것이다. 불향상의 세계는 바로 공이 육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일시에 좌선하는 세계를 통해서 공의 육화의 세계가 실현된 것이다. 이 곳이 바로 불향상의 세계이다.


니시타니는 이를 心土不二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土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장으로서 무한의 세계, 영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무한, 영원의 장이 현실의 내 마음의 장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무한의 현실성이다. 도겐은 이 무한의 현실성이 지관타좌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말한다.이 세계는 자기의 신심이 탈락됨을 통해 불과 세계와 연결되어 울려퍼지고 그 울림이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이 세계가 바로 心土不二의 세계로 불과 중생이 하나가 되는 세계이다. 

 

하지기 이전에 타인을 구한다는 면이 있다. 구원에서 자신은 최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자신을 구함이다. 구해지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의 구원도 없다. 그것이 보통 보살의 입장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말한 선의 이데아 즉 절대의 세계가 현실에는 없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데아와 감각적 사물 간의 분유 즉 이데아가 무언가의 형으로 주어짐으로써 감각적 사물의 존재가 성립한다고 본다.(22, 57)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일종의 참여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도겐에게 있어 불과 인간의 관계는 참여에 머물지 않고 불과 인간의 차별의 절대성을 뛰어넘는 세계를 펼친다. 선에 있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종의 절대적 관계이다. 도겐에게 있어 특별히 여정과의 관계는 스승, 제자의 관계를 뛰어넘는 불과 인간의 관계로 여겨진다. 즉 여정의 활동이 도겐에게 있어선 불의 활동인 것이다. 이와같이 도겐은 여정과의 관계가 일종의 절대적 관계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빈손으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정이 도겐의 깨달음을 증명한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승에게 머문다는 것은 곧 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불까지도 넘어서는 불향상의 입장이 중요하다.


임제와 황벽간의 만남을 통해 임제는 황벽이 자신을 때리자, 자신도 그를 때림으로써 양자는 때리는 입장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은 自性身, 覺體의 자기라는 의미이다. 결국 임제는 황벽을 때림으로써 스승 즉 불에서 벗어나 자기를 확립한 것이다. 스승은 법 위에서는 부친이 된다. 부친에 의해서 자신이 태어난다. 그러나 본래의 아들은 부친을 초월해야만 한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부친의 지배권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기서 나와야만 절대자유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천동선사를 만나 거기서 눈을 옆으로, 코는 바로 서있음을 깨닫고 그의 인준에 만족하지 않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22, 41)는 도겐의 말에서 ‘眼橫鼻直’은 여실, 여여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만일 도겐이 여정의 인준에만 만족했다면 그는 단지 여정의 제자에 그쳤을 것이다. 이것은 로고스의 법, 이법의 관계이다. 그러나 도겐은 여기에 만족치 않고 자주성으로 이를 벗어나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즉 타자(절대타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2, 42) 


도겐과 여정의 관계는 인간과 불, 인간과 신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여정이라는 불을 넘는다는 것은 단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활동하는 활동적인 영원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22, 18)


불에 머물지 않고 불을 뛰어넘는 고향, 자신이 태어난 곳, 살아있는 불을 접하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불향상의 입장이다. 니시타니는 불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근원적으로 자신이 나온 곳, 고향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고향의 세계가 살아있는 불법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도 여기에 가깝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겐의 경우 신심탈락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과 같다. 신도 마음도 떨어져 나가므로 신심탈락 즉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는 것으로 탈락신심이다. (22, 58) 그리스도교에서 말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는 전환의 곳이 바로 도겐 그 자신이 돌아간 곳이다.(22,59)


도겐은 여정을 만나서 깨달은 그 세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修는 어디까지나 도중이며 고향을 떠나서 여행하는 자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임제가 말한 “도중에 있어 집을 떠나지 않고 집을 떠나서 도중에 있지 않다”는 세계와 통한다. 즉 도중에 있으면서 집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집을 떠나서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본 양방의 입장을 끊고 거기서 합치는 참여와는 다른 측면이다. 불도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고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고 도겐은 말한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이 증에로 나아가는길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겐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만물을 안다는 것은 미궁이다”고 한다.도겐은 만법이 와서 자기를 수증한다고 말한다.


2.현성공안


1) 현성의 의미


우에다의 해석에서는 A가 실존의 장이므로 迷悟가 문제가 되고 미궁에서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수행이 있으나, B는 悟, 證의 장이므로 수행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佛道로서의 C가 나온다. 여기서 우에다는 A와 C의 차이에서 A는 실존의 장에서 미오가 문제가 되므로 수행을 말하나 C는  B의 證에 대한 修로서 證上의 修라고 한다.


여기서 우에다는 D에서 말하는 ‘뿐’의 의미가 단순한 한정의 의미가 아니라 A-C에서 말한 것을 하나의 완고한 사실로서 자각함이라고 본다. 


여기서 도겐의 D가 없다면, 단순히 도겐의 사상은 불도, 불법, 만법이 된다. 도겐이 도겐이 됨은 바로 D에 있다. 그것이 도겐이 말한 현성공안의 의미이다.


니시타니는 D를 인간의 실존상황으로 해석한다. 필자는 여기서 A와 D의 관계를 다시 묶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A는 아직 깨닫지 못한 인간의 실존상태이다. D는 B와 C를 거친 후의 인간의 실존상태이다. 즉 D는 깨달은 자가 현실안에 드리워진 애증 번뇌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A의 인간의 실존상태와 외적으로 같아 보여도 질적으로는 변화된 인간의 실존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미궁의 세계이되 미궁을 모르는 미궁의 상태가 아니라 (도겐은 이를 미궁 안에서 또 미궁한다고 한다.) 이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현실의 장 속에 공존하는 미궁과 번뇌를 말한다. 그래서 꽃이 지고 풀이 생기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참된 깨달음의 세계가 바로 D의 세계인 것이다.


A-D에서 니시타니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의 세계를 여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즉 A는 피조물의 세계로서 신의 창조질서가 있는가 하면 신에 등을 돌린 인간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다. 이에 반해 B는 무로부터의 창조의 세계로서 A가 창조된 유의 세계라면, B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면, C는 유도 무도 넘는 입장이다.


<현성공안>은 도겐이 34세(1233년)에 만들었으나 그가 죽기 전해인 建長4년(1252)에 이를 정법안장의 제일로서 冒頭에 두게 된다. 이로서 <현성공안>은 정법안장의 이름으로 그의 생애의 언어작품의 알파요 오메가가 된 것이다. (우에다, 대승불전, 151) 니시타니는 현성공안의 전체가 실존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23, 88)


<현성공안>은 자수용삼매가 弘法求生 때문에 自覺覺他로서 自他의 門으로 언어가 된 것이다. 즉 좌선에 있어 좌선에 의해서 열려진 세계를 묘사하여 타자에게 보여준다. (우에다 대승불전 163) 이와같이 홍법구생을 설한 현성공안이 도겐이 최후에 자신의 사상을 다시 되돌아 보면서 서두에 둔 것은 75권본과 12권본의 내용상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실상의 중요한 점이라고 본다.(우에다 대승불전 91) 필자는 여기서 12권본의 발보리심에서 설한 “타자를 자기보다 먼저 구한다는 보살의 정신으로 자신의 사상을 일관되게 설명해 보려는 도겐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를 구제된 사람이 여래가 아니면 아니된다는 것, 자신이 여래가 되기 전에 자신의 濟度에 앞서 남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표면에 나온 것이 현성공안이다. 그래서 도겐은 후에 불보다 보살정신을 강조하면서 위에서 말한 중생구제의 정신인 강조된 현성공안을 정법안장의 서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그는 보살정신으로 정법안장을 새롭게 쓰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성공안의 현성이란 제법실상의 현성이 공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은 한사람이 일시에 하는 좌선이라는 실존적 현실을 강조한다. 그 실존적 입장에서 “제법실상이 그대로 공안”이라는 현성공안이 명확히 나온다는 것이다. “제법의 불법이 되는 시절, 즉 迷悟가 있고 수행이 있으며, 삶과 죽음이 있고 제불과 중생이 있다. ”(23, 20)


불교의 기본입장은 공이고 무아이다. 이는 초월의 세계이며 절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적 현실에는 애증과 번뇌, 생멸유전하는 苦의 세계가 있다. 불도에는 애증이 없지만 현실에는 꽃이 지면 슬프고 풀이 생기면 싫은 현실의 자기가 있다. 꽃이 지고 풀이 생기는 장이 바로 애증이 있는 현실의 장이다. 애증과 번뇌가 있는 곳에는 꽃이 피고 지며,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미워한다. 불도에는 신체도 마음도 없다고 하지만 역시 눈내리는 날이면 추위를 느낀다. 그럼 도겐은 이 애증과 번뇌의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애증도 번뇌도 큰 깨달음의 하나로 본다. 즉 미궁도 깨달음도 큰 깨달음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미궁도 있고 깨달음도 있으며 미궁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行道도 있으나 그 모두가 큰 깨달음 안의 미궁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2) 미궁과 깨달음


 “E. 자기를 움직여(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기의 활동으로 만법을 수증하는 것을 미궁이라 하고, 만법이 나아가 자기를 수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F. 미궁을 크게 깨닫는 것이 제불이며, 깨달음에 크게 미궁하는 것이 중생이다. 깨달음위(證上)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가 있고, 미궁안에서 또 미궁한 자가 있다.


G. 제불이 제불인 때는 자기는 불이 된다고 의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바로 불이며, 불임을 증명해 가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도겐은 미궁과 깨달음의 세계를 정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자기를 움직여서 자기가 중심으로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만법을 수증하는 모든 행위를 미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완전히 무가 되고, 만법이 스스로 나아가 자기를 수증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사물을 보아도 실제로 보지 못한다. 참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꽃이 그대로 자기를 수증하는 세계이다. 깨달음이란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궁 중에 있음을 크게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미궁을 크게 깨달은 것이 바로 제불이라고 한다. 미궁은 앞서 말했듯이 ‘자기가 활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자기가 활동하는 것을 멈추는 것, 그만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궁의 주체가 자기라면 깨달음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제불이다. 이와같이 깨달음에서는 이러한 존재방식의 실존적 전환이 일어난다. 바오로가 말했듯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보지만 본다는 것이 잊고 있다. 맹인이 처음 눈을 뜨면 그것을 안다. 실제 우리도 늘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보아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사물을 보아도 실제로 보지 못한다. “옛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 때 내는 물소리” 듣는다는 것이 이런 근본적인 감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니시타니의 해석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니시타니는 꽃 안에서 만법을 본다. 이와같이 꽃에서 만법을 볼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참으로 본다는 것은 자기를 잊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니시타니의 해석에 대해서 혹자는 “니시타니는 자연외도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니시타니의 만년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다.  우리의 신체는 단순히 정신과 분리된 신체가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하나가 된 신체이다. 결국 정신은 몸에서 분리할 수 없고 몸은 정신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런 신체이다. 그 신체는 자신과 타인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타인과 분리된 상태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된 상태에서는 자신도 타자도 이해할 수 없다.  (23, 35)


도겐이 말한 미궁과 깨달음의 관계는 자기와 만법의 관계이다. 192 미궁과 깨달음은 만법과 자기와의 관계의 존재방식으로 규정되어 간다. 만법과 자기와의 관계의 수증에서 자기를 움직여서 만법을 수증할 때 그것은 미궁이며 만법 스스로 자기를 수증할 때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자기가 움직이는 것에서 만법이 움직이는 것에로 전환이다.(수동적 영성) 즉 거기에는 방향의 역전이 있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를 움직이는 자기의 활동에서 ‘만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만법이 스스로 활동함을 의미한다.(불의 활동, 성령의 활동) 그렇게 깨달음이란 방향의 역전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 자기의 본래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이를 퇴보라고 할 수 있다.) 만법에 증한다고 하는 것 즉 만법의 활동에 의해 미궁에서 깨달음에로 전환되는 것이다. ‘미궁에서 깨달음에로’라는 것이 ‘깨달음에 의해서’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모르나 절대적인 전환은 그같이 일어나며 생기한다. 깨달음은 “자기가 깨닫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것에 의해서 즉 불도 위에서는 자기를 잊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것에 의해서 “불도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불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자기의 존재방식이 된다.


(우에다 대승불전 192)


여기서 ‘자기중심에서 만법에로’라는 인간의 실존적인 전환이 요구된다. 마쯔오까는 니시타니의 해석에 인간의 실존적 전환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마쯔오까는 니시타니의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꽃이 핀다. 그것이 자기를 수증하고 있다. 자신 쪽에서부터 나와서 꽃을 연구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꽃이 그대로 나아가서 자기를 수증한다. 거기서 깨달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말하는 꽃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꽃이 단지 피어있다”는 사실을 바꾸어 말한 것이 아닌가? 이는 다음 표현에서도 나온다 “본래의 깨달음은 자연으로 따로 새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본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마쯔오까 연구보고서 55)


이런 인간측의 실존적 전환을 말할 수 없는 해석은 자연외도의 일종이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마쯔오까가 비판한 니시타니의 해석은 단지 자연적 해석이 아니다. 니시타니 사상의 전체 핵심은 공의 입장은 바로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가 꽃이라는 완고한 사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수증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 꽃을 대상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인식에서부터 자기가 사라진 그 자리에 꽃이 드러나는 세계 즉 꽃이 비로서 꽃으로써 드러나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장미꽃을 볼 때 이미 자신의 인식세계 속에 있는 장미꽃의 개념으로 그 꽃을 본다. 즉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장미꽃을 본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그것은 참으로 장미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미꽃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깨닫는 것,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과연 자기라는 주체를 벗어나서 사물을 볼 수 있는가? 그러기에 이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주어지는 세계, 제불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니시타니가 꽃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을 자각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전환없이는 불가능한 세계이다. 인간은 자기라는 주체에서 벗어나 사물을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꽃이라는 하나의 완고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도겐은 말한다. “미궁을 크게 깨닫는 것이 제불이며, 깨달음에 크게 미궁한 것이 중생이다.” 즉 깨달음은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궁이 미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미궁이 미궁임을 깨닫지 못한 것 곧 자신이 미궁중에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 바로 미궁안에서도 미궁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미궁을 깨닫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불이라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가 어디까지나 지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불이 제불인 때는 자기는 불이 된다고 의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바로 불이며, 불임을 증명해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겐이 말한 깨달음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활동성을 지닌 것으로 行佛이라고 할 수 있다.


3) 만법과 자기의 관계


<선에 있어서 법과 인>


니시타니는 이 논문에서 철학과 종교의 근원적인 문제성의 추구는 참 자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라고 본다. 95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