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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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와 겸손을 통한 예수의 제자됨-변선환목사님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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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3-11-0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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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와 겸손을 통한 예수의 제자됨



                                          최 현 민(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원장)


이정배 목사님으로부터 변선환 목사님의 종교재판 30년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아주 오래전 만나뵌 적이 있던 변목사님을 떠올렸다. 필자는 석사논문으로 교토학파와 연관된 「히사마쯔 신이치((久松眞一)의 선(禪)사상」에 대해 준비하던 차에 교토학파를 연구해오신 변교수님 자택을 찾아가 뵌 적이 있다. 그때 변목사님은 제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는데 당시 그분의 말씀보다는 자상한 성품을 지닌 분이라는 인상이 지금 내게 남아 있다. 그 밖에 서강대 종교신학 연구소에서 열린 콜로키움에 오셔서 질문하시고 토론하신 모습에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지닌 분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와 나눈 대화보다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더 오래 남는 것을 살면서 더 느끼게 된다.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몸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0년 전에 변목사님께서 종교재판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다시 돌아보니 마녀사냥이 있었던 16세기에 일어날법한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구원이 교회 밖에도 있다”는 변목사님의 주장이 종교재판을 통해 그분이 속한 교회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할만큼 그렇게 엄청난 것이었을까? 나는 그러한 결정을 한 이들의 구원관이 무엇이고 교회관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을까? 교회 안에 구원을 가두어두는 게 과연 그들이 신앙하는 기독교의 구원관인가?

굳이 변목사님을 종교재판에 서게 한 배경인 종교다원주의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기독인들이 추종하는 예수의 가르침 중 어떤 대목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해석된 것일까? 이 땅의 기독교 교회 중에는 기독신앙을 그 어떤 종교의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앙 우월성이라는 그림자가 자리해왔고 지금도 그 그늘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종교사를 볼 때 기독교는 불교보다 5세기 뒤에 생겨났고 한반도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것은 남인(南人)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이승훈이 1783년 뻬이징에 가서 그 다음 해에 세례를 받으면서였다. 이렇게 시작된 가톨릭 신앙에 이어 개신교는 100여년 뒤인 1885년 언더우스와 아펜젤러가 제물포로 공식 입국하면서 시작되었으니 기독교가 이 땅에 정착한 역사는 아주 짧다.

 기독교가 유입되기 아주 오래전 이 땅에는 이미 하늘님에 대한 토착 신앙이 있었다. 곧 하늘님 신앙에 기반한 제천의식을 통한 경천(敬天)사상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라는 애인(愛人) 사상이 그것이다. 한민족의 고대 종교사상과 종교심성에 토대가 된 하늘님에 대한 토착 신앙은 기독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하늘님에 대한 절대신앙은 없고 다신교적 신도神道 신앙이 주류를 이룬 일본의 경우, 기독교인들이 1%정도 밖에 안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일본의 총무성이 2021년 2월 1일 발표한 일본의 총인구는 1억 2562만 명인데 2020년 12월 22일 일본의 문부과학성이 공개한 종교인구는 1억 8310만 명이다. 이 중 신도가 약 8900만 명, 불교가 약 8500만 명, 기독교가 약 190만 명이다. (탁지웅, 『월간현대종교』, 2021.04.28. 참조)

 이와 같이 세계종교와 이 땅의 토착신앙을 비추어볼 때 구원을 자신들의 교회 안에 가두어 두려는 주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게 아닐까.

    변목사님 사상의 중심축인 종교다원주의가 이웃종교들 안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구원관이라면, 구원을 교회 안에 가두려는 이들의 주장은 닫힌 구원관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율법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이것으로 상대를 단죄하려는 이들과 맞서시다가 결국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했다. 예수께서 해방시키고자 한 것은 그분의 공생활 중 가장 지탄받던 율법학자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씌웠던 굴레는 율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무엇이 그분에게 굴레처럼 여겨질까? 그것은 바로 당신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바로 그것이 아닐까. 믿음이라는 새로운 굴레로 교회 안에 구원의 테두리를 쳐놓은 작금의 교회 모습에 대해 과연 그분은 무엇이라 하실까?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믿음을 신앙과 구분한다. 믿음으로 번역되는 belief와 신앙으로 번역되는 faith 모두 어떤 가치나 신념을 확고히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스미스에 따르면 믿음belief은 우리말의 ‘신념’에 더 가깝다. 신념이란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의 교의 등 축적된 전통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신앙faith은 축적된 전통에 대한 동의를 넘어 그것이 뜻하는 세계에 자신을 헌신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곧 진리라고 믿는 세계와 자신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켜 살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스미스는 그리스도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개별적인 종교적 신앙이 아닌, 나와 너의 신앙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한 종교란 인격적인 것이어야 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한 것은 결국 제도나 교리 신학 등의 축적된 전통에 나타난 인격체적 전달, 인격체적 만남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적 신앙 일반, ‘불교 신앙’, ‘힌두교 신앙’, ‘유대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신앙, 너의 신앙이 있을 뿐이다. 내가 지녀야만 하는 이상적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아야 하는 하느님이 존재하고,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이웃이 존재할 뿐이다.” Wilfred Cantwell Smith,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분도출판사, 1991, 254쪽.



 필자는 사랑의 씨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씨튼연구원을 통해 30년 가까이 이웃 종교인들과 종교대화를 해왔다. 한국의 다종교 문화 속에서 종교대화의 필요에 의해 1994년에 설립된 씨튼연구원에서는 지난 30년간 5개 종단의 전문 학자들로 구성된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1년에 네 차례씩 정기적인 세미나를 가졌다. 이 종교인 모임에서 초기 10년간 교의적 차원에서 종교 간 대화를 해오면서 불교와 유교, 유교와 그리스도교,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에 서로 알력이 있던 문제들을 함께 토론해왔는데 이런 과정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다름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를 녹취 정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운주사, 2010)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바 있다.

 

필자는 종교대화를 해오면서 이웃종교의 언어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더 넓고 깊은 세상으로 초대해주심을 느끼고 있다. 그 세계는 <장자> 제1편 소요유에서 말하는 ‘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변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던 곤이 붕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대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곤에서 자유의 표상인 붕에로의 변모는 어쩌면 우리가 상실해온 자신의 본래 모습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곧 붕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받은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상태이지 않을까? 타볼산에서 예수께서 변모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을 자각할 때 자신이 우물 안에 갇혀 살았음도 깨닫게 되리라.

자유의 길로 나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스승이 예수일 수도 있고, 붓다나 공자일 수도 있겠다.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길을 나선 이들은 예수와 함께 걷는 삶의 여정에서 자유 곧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붓다나 공자를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리라. 예수를 따라나선 필자는 예수의 다음 가르침에서 큰 위로를 얻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8-30).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마리의 소나 나귀가 한 조를 이루어 멍에를 메었다. 미숙한 소를 훈련 시키고자 노련한 소를 미숙한 소와 한 조로 멍에를 메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이러한 문화적 풍습을 빌려 우리를 당신의 파트너로 부르신다. 곧 당신으로부터 멍에 지는 법을 배워 익히라는 의미겠다. 그분께서는 멍에를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비법으로 ‘마음의 온유와 겸손’을 말씀하신다. 이는 온유와 겸손이라는 두 삶의 양식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우리가 삶의 짐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비법임을 의미하겠다.

스승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다시 곱씹어본다. 이 말씀의 실천은 먼저 혼자서 힘겹게 지고 가던 멍에를 내려놓고 그분과 짝이 됨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분처럼 온유와 겸손이 몸에 베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분과 함께 걷는 여정에서 우리는 가벼워진 짐의 무게를 느끼게 되리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분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해방감처럼 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신앙의 선조들도 스승 예수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워 익혔다. 변목사님도 그들 중 한 분이시다. 다시금 변선환 목사님을 기억하며 삼가 명복을 빌어본다.


 변선환 목사님의 회고록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 에 기고된  (2023, 동연출판사)